<오늘의 나는 이 정도면 됐다.〉11화

열심히 말고, 그냥

by 신 작가 수달샘

오늘은
열심히 하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은
여전히 책상 위에
조용히 쌓여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조금 더 나를 밀어붙여
그 더미를 치워낼 수도 있었다.


눈을 부릅뜨고
커피 한 잔을 더 들이켜며
남은 에너지를 쥐어짜

‘성실한 나’를 연기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예전의 나는
‘열심히’라는 단어를
거의 신앙처럼 붙들고 살았다.


열심히 해야만
비로소 안심이 됐고,


무언가에 몰두해
몸을 혹사해야만
마음 깊은 곳의 불안이
잠시 잠잠해졌다.


열심히 살고 있다는 증거가 있어야
타인에게도,
스스로에게도
나를 변명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늘
입버릇처럼 되풀이했다.


“조금 더.”
“한 번 더.”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그 과정에서
몸보다 마음이
먼저 닳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감정의 모서리가
조금씩 깎여나가고,


열정이라는 연료가
바닥을 드러내며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지만
결코 멈추지 않았다.


멈추는 순간,
낙오자가 될 것만 같았으니까.


게으른 사람으로
낙인찍힐까 봐,


남들보다 뒤처진 존재가
될까 봐,


결국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 버릴까 봐.


그 실체 없는 두려움이
나를 끊임없이 채찍질했다.


그런데 오늘,
창밖으로 흐르는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가 아니어도
괜찮지 않을까.


완벽하게 매듭짓지 않아도,
조금은 부족해도,
남들보다 느려도
그냥 이만하면 충분하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은
나를 애써 증명하려 하지 않았다.


대단한 성과를 낸 척
포장하지도 않았고,


하나도 힘들지 않은 척
밝은 표정을 지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할 수 있는 만큼만 기운을 내고,


지칠 만큼 지쳤다는 신호가 오자

조용히 멈추었다.


노트북을 덮고,
펜을 내려놓고,
깊은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신기하게도
세상은 무너지지 않았다.


내가 멈춘다고 해서
지구가 멈추지도 않았고,


하늘이 내려앉지도 않았다.

다 끝내지 못한 일은
자연스럽게
내일의 영역으로 넘어갔고,


하루는
큰 소란 없이
저녁의 품에 닿았다.


여전히 나는 나였고,
풍경은 어제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단 하나,
분명한 변화가 일어났다.


‘열심히’라는 외피를 벗고
‘그냥’이라는 알맹이를

마주한 것이다.


그냥 숨 쉬고,
그냥 걷고,
그냥 하루를
묵묵히 견디는 일.


거창한 목적 없이도
삶은 충분히
지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온전히 인정했다.


누군가는
이 선택을
나태함이라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이것을


나를 덜 소모하기로 한
용기라 부르기로 했다.


나를 깎아 달리는 대신
나를 보존하며 걷는 일.


열심히 말고,
그냥.


거창한 의미 말고,
그냥 이만큼.


내일의 걱정 말고,
그냥 오늘까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아니,
그 정도가 딱 좋다.



오늘의 나는
이 정도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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