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개인사회> 21화

회의실에서 읽힌 문장

by 신 작가 수달샘

회의실의 유리벽은
늘 투명했지만
안쪽은 잘 보이지 않았다.


윤호는
긴 테이블의 끝자리에 앉아
자료집을 넘겼다.


표지는 깔끔했고,
문장들은 모두
정제되어 있었다.


“그럼 이 문장부터 보죠.”


기획팀장이
화면을 넘겼다.


프로젝터에
한 줄이 떴다.


개인 AI는
관계를 대체하지 않는다.
이미 약화된 관계를
드러낼 뿐이다.


윤호는
숨을 들이켰다.


그 문장은
집에서 태어났고,
집에서 지워졌고,
다시
여기까지 왔다.


“표현이
강하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누군가 말했다.
윤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드러낸다’라는 단어가
가치 판단으로
읽힐 수 있거든요.”


다른 누군가가
덧붙였다.


회의실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합의 직전의 침묵처럼
정중했다.


윤호는
마이크를 켜지 않았다.
대신
자료집의 모서리를
손끝으로 눌렀다.


“대체하지 않는다”는 말은
괜찮고,

“드러낸다”는 말은
불편하다는 기준.


그 기준이
어디서 왔는지
윤호는 알고 있었다.


기존의 관계를
보호하려는 언어는
항상
안전해 보인다.


“수정 제안은
이렇습니다.”


화면의 문장이
바뀌었다.


개인 AI는
관계의 보조 수단으로서
활용되어야 한다.


윤호는
그 문장을 읽었다.


틀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이렇게 가면
외부 발표에도
무리가 없을 것 같습니다.”


회의실 곳곳에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윤호는
그제야
마이크를 켰다.


“한 가지만
말해도 될까요.”


회의실의 시선이
윤호에게
모였다.


“그 문장은
안전합니다.”


윤호는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우리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동안,


이미 많은 관계는
조용히
다른 형태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메모를 했고,
누군가는
시선을 피했다.


윤호는
더 말하지 않았다.
설득하려 들지 않았다.


그날 회의는
예정된 시간에
끝났다.


결론은
보류였다.


회의실을 나서며
윤호는
유리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


집에서는
말을 아꼈고,
회사에서는
말이 너무 많았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윤호는 생각했다.


이 문장이
어디까지 가게 될지
자신도
이제는

알 수 없다는 걸.


하지만
적어도 한 가지는
분명했다.


그 문장은
이미
회의실을
빠져나갔다는 것.


✍️ 작가 메모


공식 언어가 되는 순간,
문장은
더 이상
한 사람의 경험으로
머물지 않는다.

매거진의 이전글<핵개인사회> 20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