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아이에 대한 이야기
* 볼빨간사춘기(BOL4)의 "나의 사춘기에게" 노래를 함께 들으시면 더 좋은 글입니다.
공허했다. 자는 시간이 유일한 안식이었다. 한 3개월 정도를 잠만 잤다. 학교 강의에 출석만 하고 강의가 끝나자마자 공강 시간에는 동아리방에서 잤고, 모든 수업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가서 잤다. 그렇게 좋아하던 달리기도 이 시기에는 전혀 할 수가 없었다. 열심히 무엇인가를 해서 땀을 흘리는 것 자체가 두려웠다. 노력해도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
불현듯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없는 시간에 걸었다. 새벽에 나와서 어디든 정처 없이 걸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사람들이 있는 시간에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그제야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을 때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와 비슷하게 이전에 고통을 겪은 사람들, 지금도 힘들어하는 친구들이 보였다.
고등학교 때 그렇게 열심히 살았었는데, 대학교 와서 무너진 친구가 보였다. 나보다 한 발 앞서 멈춰 삶을 돌아보고 있는 친구였다. 새벽에 같이 걸으면서 실패와 절망, 고통에 대해서 주로 이야기했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참 주변에 무심했구나.. 이 친구도 그럭저럭 잘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아픈 속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구나.. 우리는 불안을 나누었으나 거리를 유지했고 서로 짐을 지우지는 않았다. 각자가 이고 있는 짐이 여전히 무겁다는 것을 서로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앞서 대입에서 실패를 경험했던 친구가 보였다. 결핍과 욕구에 대해 깊이 고민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도 비슷한 이유로 너무 힘들어하고 있었기에 지금은 회복했다는 그 친구의 이야기가 큰 힘이 되었다. 지금도 그 친구는 그런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풀어내고 있는데, 그 용기가 이때의 나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이때 나를 살린 것은 아마 이런 친구들이 아니었을까 하는 깊은 감사의 마음을 품고 있다.
더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겠다 싶어서 외부 독서 모임에 나갔다. 거기서 연세대학교에서 상담심리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형을 만났다. 형은 내 이야기를 조금 듣더니, 조심스럽게 자신의 연구의 표본이 되어보지 않겠냐는 말을 꺼냈다. 비용은 무료로 해줄 테니, 아직 수련하는 학생이지만 자신에게 상담을 받아 보지 않겠냐는 이야기였다. 뭐라도 잡아야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함께하기로 하고 6개월 정도 매주 연세대학교를 찾아가게 되었다.
주로 카페에서 진행한 심리상담은 너무 너무 좋았다.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라고 해도 될 정도로. 선생님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지금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살아가면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왜 정치를 하고 싶었는지, 그게 좌절된 것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인지, 여전히 정치가 하고 싶은지..
그중 제일 좋았던 점은 상담 과정을 통해 나의 내면아이를 만났다는 것이다. 내면아이란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어린 시절의 아픔과 상처로 인한 자아가 있다는 상담기법의 일종으로, 쉽게 말하면 어린 시절 겪은 상처가 무의식적으로 지금 내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예컨대, 어릴 때 가정환경이나 외부의 영향으로 돈이나 관계에 대한 강한 결핍이나 상처를 얻게 되면 그게 인생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나의 경우 아주 어릴 적 관계로 인해 크게 상처받았던 적이 있었지만, 그 상황 자체는 전혀 내가 유발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선생님과 대화하면서 되돌아보니 나는 그 상황이 내가 유발한 것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었다. 거기에 대한 책임감과 거기로부터 유발된 욕구가 내 인생 전반에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과 함께 마치 내면아이가 타자인 것처럼 말을 걸고, 그 아이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신기하게도 눈물이 나왔다. 내면아이를 인식하는 순간 애써 회피해 왔던 내 무의식과 화해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 이후로는 선생님이 없어도 스스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선생님이 나에게 이제는 상담이 필요 없겠다고 하셨는데, 그때 즈음부터는 잠을 자는 시간도 점점 줄어들었다.
학교 공강시간에 주로 내가 잠을 자던 곳은 천주교 동아리 동아리방인데, 지금은 무교지만 나름 어릴 때 세례도 받았고, 사람도 잘 안 오고 시설도 좋아서 자주 애용했다. 그날도 별생각 없이 들어가서 잠을 자고 있는데, 드물게 사람이 들어왔다.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가 들어와서는 내 옆에 앉더니, 간단한 인사만 하고 자기가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졸려 죽겠는데 옆에서 자꾸 이상한 이야기를 하니까 듣기 싫었는데, 점점 듣다 보니 그 계획이 너무 재밌어서 크게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그 계획대로 되면 참 재밌겠네요 ㅋㅋ."
그렇게 웃다가 잠에서 깼다. 알고 보니 꿈이었다. 잠을 자는 장소에는 예수님 굿즈?가 가득했는데, 무교인 주제에 웃기는 이야기지만 선생님은 예수님이 보내 주신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 이후로는 연락이 아예 끊겨 버렸기에.. 다만, 상담윤리상 원래 내담자랑 친하게 지내면 안 된다고 한다. 꿈보다 해몽이라고..
내 무의식에 대해 지금도 내가 완전히 이해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제는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 이유에 대해 부분적으로나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다. 앞으로 적을 다양한 만남과 활동으로 인해 차츰 삶을 회복할 수 있었지만, 그 첫 계기는 내 내면아이와 화해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