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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지원 Dec 02. 2024

담론과 실무의 거리

feat. 뜨거운 혈관에 흐르는 것들

뜨거운 혈관에 흐르고 있는 건축의 문장들

독서모임에서 읽은 도시와 건축 관련 책들을 인스타에 아카이빙 중이다. 

약 50권 내외인데 읽었던 책중 어떤 책은 정말 한 문장도 기억이 안 난다. 독서모임 카톡방에  책을 ‘읽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읽었다.’는 문장만 획득한 거 아닐까.라는 생각을  던졌더니

멤버 중 한 명이

읽은 책은 소화되어 혈관에 흐르고 있을 거라고(!) 대답했다.

정말 머리에는 없고 혈관에 흐르고 있는 문장들이 있었던 건지 평소에 생각하지 않던 문장들이 설계 회의를 할 때 자주 입에서 튀어나오곤 한다.

그중 하나가 ‘도시의 맥락을 고려해서 설계해 달라.’는 꽤 지루한 문장이다.

며칠 전에도 그 말을 뱉었는데… 

잠깐, 그게 말이 되는 건가? 다시 뜯어보고 있다.



사전조사

건축 설계 프로젝트 초반부에 (비물리적) 사전 조사를 한다. 

인구, 자연, 문화 다양한 통계와 지표 등을 살펴보면서 도시 맥락을 파악한다. 하지만 몇 주 동안의 조사로 도시의 깊고 복합적인 맥락을 진정으로 이해하거나 슬라이드 몇 장에 요약된 데이터로 정말 그 도시의 숨결을 포착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상태로 계획안을 도출해 나간다.


도시 맥락에 맞췄다고 한 디자인의 쉬운 예는

-주변 건물 높이를 고려하여 비슷한 높이로, 아니면 땅에 묻어버림

-주변에 녹지가 많으니 자연과 어울리도록 외장에 목재를 활용함,

-인근에 엄청 센 (예를 들면 궁?) 모티브가 하나 있으면 그 아름다운 something 차용하여…

이런 방식들로 설계안의 형태를 잡아가며 시작한다.

결국 사전조사 끝부분의 대지 주변의 물리적인 조사에 의한 것만 연결성이 있어 보이도록 귀결된다.


사전조사의 노력이 무색하게 건축 디자인의 결과물은 도시 맥락과 관계없이 직관적일 때 더 매력적인 경우도 많다. 누가 봐도 예쁘니까 예쁜, 멋지니까 멋진, 건축가의 재능에 의해 만들어진 건물이다. 건축가의 창의적 재능이 유난히 드러나는 건물의 용도와 위치가 있는데 문화시설, 쇼핑몰, 소규모 호텔 용도, 거기에 허허벌판에 지어지고 건물 혼자 솟아오르면 극적인 효과는 더해진다.



컨셉설계 단계에서 S와 N

이런 궁리를 하다가 세상이치를 단순화시키기 좋은 MBTI 4가지 특성 중 가장 파국이 많다는 두 개의 상반된 특성인 S와 N을 떠올려 본다.

도시의 맥락을 파악할 때 필요한 능력은 S(경험기반)의 영역에 가깝다. 눈앞에 현실을 읽어내고 파악하는 능력이다.

그리고 앞서 이야기한 누가 봐도 예쁘고 괜찮게 설계하는 건 N(창의성 기반)의 영역에 가깝다.

S는 치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하고

N은 그 분석을 넘어(또는 관계없이)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한다.


현실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면 사전조사를 통한 도시맥락 해석으로 설계를 시작하지만 점차 프로세스가 진행되면서 사전 조사와 설계안 사이의 연결은 점차 사라진다.

분석과 맥락은 흐려지고 건축가의 창의성에 주로 의존하게 된다.

(사전 조사 내용은 건축가의 혈관에서 흐르고 있으려나...)


그러다 보니 자꾸 도시맥락을 고려해서 설계해 달라는 말이 튀어나오나 보다. 균형이라는 미덕에 차여사는 관리자라 그럴 수도 있고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여러 사람을 설득해야 했던 습관이 분석과 이유 찾기로 내면화된 것 같은데, 이 건물을 왜 이렇게 했어?라는 질문을 받을 때 답변할 논리가 필요해서… (쫫-씨)


한편, 직관적인 능력과 분석적인 능력의 균형과 상호보완 할 수 있다는 건 그저 담론 아닐까, 애당초 양립하기 어려운 문제를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하고 있는 거 아닌가 다시 질문해 본다.


낙후된 도시에 삐까뻔쩍한 건물이 들어서서 위화감을 조성하고 있다는 가정을 해보자.

낙후된 주변 느낌에 맞춰서 신축건물이 공손히 손 모은 자세로 지었어야 될 일인지, 아니면 대비와 긴장을 주기 위해 이렇게 삐까뻔쩍하게 했다는 논리를 만들 것인지 고민된다.


반대의 경우도 비슷하게 반박할 수 있다.


애당초 사전조사는 필요 없고 건축가의 직관에 의해 짓고난 뒤에 주변과 대비를 이루기 위해, 도시의 흐름을 변화시키는 초석을 만들었다는 해석만 유효한 것이 아닌지 의심된다.


(도시맥락이란 말보다 대지 주변의 물리적 환경에 대한 분석과 반영만 유효하다는 소리로 생각이

정리되고 있는데…)


아무튼 나는 창조적 영감을 논리로 누르고 있는 소리 일수도 있지만 현재 N의 영역으로만 가고 있는 프로젝트를 바라보면서 이메일을 구구절절 쓰고 마지막 줄엔 분석적 설득력을 뒷받침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을 지웠다 썼다가 지웠다 썼다가…

그림출처 : ddnews.co.kr MBTI N S 차이 10가지 총정리 (감각과 직관)



p.s. 이 글을 쓰면서 설계 실무에 종사하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문답하며 직관과 경험, 사전조사와 도시맥락등의 언어를 사람마다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냥 이미지 한 장으로 건축주를 K.O 시킨 사례 등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담론과 실무의 거리가 아니라, 담론 - 실무 - 상부 보고라는 3가지가 동상이몽을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이 생각은 더 발전시켜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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