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번째 이사를 준비하며
“너네 식구, 몇 번째 이사지?”
“응... 8번?”
“와? 진짜 그렇게나? 그렇게까지는 아닌거 같은데. 세보자!. 미국에서 2번 이사했지? 그리고 한국와서 금강 3번째 지웰,금강....동대문, 서초, 다시.. 아~ 정말이네? 이야...이 정도인줄 몰랐어“
“응 언니, 무아가 전학만 4번째야.“
“이제 안할꺼지?”
“응....니... 아니 몰라..
사실은 무아아빠가 미국회사에서~~블라 블라~~”
전세 계약서를 쓰고 나왔다.
오랜 고민끝에 우리의 탈출구는 다시 ‘이사’였나?
빚쟁이가 도피하듯, 그렇게 방배동을 떠나는 그림은 우리가 그릴 수 있는 최고로 안 좋은 시나리오였는데, 우리를 그 시나리오의 주인공으로 만든 장본인이 나라는 생각이 여전히 남아있는걸까.
돌아, 돌아 다시 그곳으로 가는 기분은 다행히 싫지만은 않았다. 일단 나의 삶을 압박하는 ‘대출’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 그리고 두번째로는 ‘친정언니’라는 나의 정신적인 안식처가 그곳에 있었다.
언니는 나에게 있어, 엄마+친구+자매 +(가끔동생)+운전기사+밥사주는 물주+반찬해주는친정엄마+운동메이트 등 적어도 7~8종목을 충족해주는 곳이었다.
9살, 예천에서 올라와 내가 마음 붙일 곳이라곤 언니밖에 없을 때부터 보통 한 사람이 자라면 필요하다는 마을 역할이 언니하나로 퉁이 쳐졌다.
언니랑 공부도 했고, 불교대학도 같이 다녔고, 맞고도 쳤고, 어느날 밤 자려고 누웠다가 “스키타러 갈래?” 하고 눈이 맞아 새벽 홍천길을 달려 야간스키를 타기도 했다. 심지어는 나이트도 함께 가서 부킹도 세트로 하는 자매였다.
성격좋은 언니는 내 친구들과 니가 친구인지, 언니가 얘네 친구인지 아무도 알 지 못하도록 허물없이 어울렸고, 나는 이런 언니가 가끔 창피하고(너무 노골적이고, 직선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는 성격) 그 외의 대부분은 언니가 내 언니인게 자랑스러웠다. 20대 연애시절, 언니를 지나가는 말로 나쁘게 말하는 남친에게 “니까짓게 뭘 아느냐!!!”고 욕을 한바가지 하고, 그 일이 화근이 되어 이별통보를 한 일도 있었다. 그렇게 어느 곳도 뿌리 내리기를 힘들어 하는 나에게 언니는 자신의 품을 넉넉히 내어주는 마음의 고향이었다.
9살,
외할머니 손에 크던 나는 엄마,아빠라는 구성원으로 둘러싸인 평범한 가족이 부러웠다. 아빠는 나를 낳아준 엄마와 이혼절차를 마치고, 오빠 언니를 데리고 재혼을 했고, 또 새로운 남동생도 낳았다고 한다. 이게 어떤 상황인지 어른들 말이 완전히 그려지지는 않았지만, 나의 존재는 미개봉, 즉 일단 숨겨야 하는 비공개 딸이라는 것 정도는 의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게 나를 슬프게도 했지만, 희망을 품게도 했다. “아, 내가 가족이 없는 것이 아니니 언젠가 함께 살 수도 있겠구나”
글을 쓰는 사람이 필요한 요건은 필력이 아니라 ‘관점’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독자는 글을 읽을 때 그 사람의 필력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그 관점이 제시해 주는 세상을 읽는 것이니 남들이 다 하는 이야기를 하는 거라면 글쓰기, 그 본연의 의미가 퇴색된다는 것이다.
신경이 쓰인다.
나의 일기를 쓰는 것과 읽어주는 사람의 마음 사이 내 글은 어디쯤으로 가고 있는지.
하지만 글쓰기의 본연의 의미.
나의 마음길을 ‘정확하게 보는것’에 일단 초점을 맞추고 글로서 내가 힐링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으니, 자기검렬대신 내 마음이 하고 싶은 글씨를 계속 써내려가 보려 한다.
언니는 결혼 후, 아이를 둘 낳고 진접으로 삶의 터전을 잡았다.
미국에서 둘째까지 낳은 나는 귀국을 결심하면서 자연스럽게 언니와 형부가 미리 알아봐준 집으로 이사를 했고 처음엔 드디어 자매가 아이키우며 옆 동에 이웃해 같이 살게 됐다고 신바람이 났다.
결혼 전 우리처럼, 대부분의 시간을 같이 놀았다.
아이들을 등교, 등원시켜 놓고 나면 일단, 만나서 백화점을 가든, 새로운 밥집을 가든, 어제 샀다가 환불해야 하는 옷을 핑계로 다시 백화점에 갔다. 같이 운동을 다니고, 댄스를 배우고, 문화센터를 다니고, 이것저것 다 하고 나서는 주로 커피숍에 앉아 그렇게 끝도 없는 수다를 떨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수다가, 아직 떨치치 못한 서로간의 외로움을 달래주는 의식같은 거였나보다.
그런데, 결혼 후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로 달라질만한 환경이라는 것을 인식한다.
형부는 교인이였고, 우리집은 불자집안이었으며
형부는 전라도였고, 내남편은 경상도 토박이었다.
원래 털털하고 거침없는 언니에 비해, 깊고 좁은 나의 성향은 ’자매‘라는 이름으로 어려운 환경을 함께 헤쳐나갔기에 공동이해의 영역이 되었지만, 각자의 배우자의 결을 맞추는 일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었다.
나딴에는 중립적이려고 노력했고, 남편이 이 관계에서 서운함이 들지 않도록 남편에게 마음의 축을 기울면서도 이런 나를 언니는 이해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나의 처녀시절부터 나를 알던 형부는 다르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남편을 만나기 이전부터 결혼해서 아이를 넷 낳을 동안 늘 우리 가족을 챙기고 나의 아이들을 챙겨주던 형부였지만 남편과의 오해와 트러블 앞에서는 나쁜 처제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슬쩍 발을 빼본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의 가정을 잊지 않고 챙겼다.
서울살이. 부부 둘이 죽이 잘 맞는 것 말고 뿌리가 없는 우리 가족은 저녁외식을 나왔다가 집에 돌아가기 싫은 헛헛한 마음이었을까?
“드라이브 좀 할까?” 아빠의 말 한마디에
“이모네 집으로 가요!!” 이모네!! 이모네!! 떼창을 하는 아이들 성화에 못 이기는 듯 언니네 집을 찾았다. 그날도 역시 오늘처럼 기나긴 이야기와 난상토론이 벌어졌고, 그때의 사안은 뭐가 더 심각했는지 아니면 각자의 외로움을 이해받는 행복한 시간이라고 암묵적인 합의를 했는지, 어쨌든 잠깐 차나 한잔 마시자고 언니네 집에 들어간 길로 3박 4일을 합숙한 일도 생각난다.
전세 계약서를 다 쓰고, 부동산 사장님과 소소한 수다를 떨고 있을때 쯤, 언니와 형부가 반갑게 고개를 내민다. 부동산 사장언니와는(친정언니 덕에 담박에 사장님에서 동네언니로 묶였다) 다음에 골프를 한번 치자고, 이렇게 여자셋이 한 썸을 만들면 되겠다. 남자들은 번갈아 한번씩 끼면 되겠다고 깔깔,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헤어졌다.
자연스럽게 두 커플 부부가 우리 차에 올라탄다.
“뭐 먹을래? 아, 확정일자 부터 하고 가게 주민센터로 가자 제부야”
아... 밸리를 배워 공연을 하고, 같이 커브스를 다니고, 뭔가를 부지런히 다니러 다니던 나와 언니가 겹쳐 보이는 이곳, 그곳에 몇 년 후 전세 확정일자를 신고하러 다시 오게 될 줄이야.
새로 생겼다는 추어탕 집에서 점심을 사이좋게 먹고, 그 앞에 있는 까페로 자리를 옮기는 동안 나의 추억과 이상한 마음들이 한 발 뒤에서 따라온다.
갓 내린 커피를 사이에 두고 두 부부가 마주 앉았다.
늘 했던 행동과 모습인데, 오늘따라 이 모든게 새로 리셋된 기분이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근황얘기로 시작했다가 얘기가 깊어지면 질수록 더 많은 마음속 이야기들이 절로 쏟아져 나왔다. 집안얘기, 아이들 교육얘기, 부모얘기, 일 얘기, 교회 이야기, 서로간의 부모님 얘기....
그 무엇보다 얘기를 쏟아내는 동안 우리 부부가 이렇게 많은 이야기 보따리를 이고지고 살았는지 새삼 놀랍다. 이 이야기들을 어느 누가 이토록 진지하게 자기의 일처럼 들어주고, 깊이 공명해 줄 수 있을까?
글벗들과 영혼까지 나눈다 해도, 가족이란 이름으로 함께 살아온 그 켜켜묵은 일들까지 모두 들추어 같이 알아줄 수밖에 없는 것, 진짜 가족의 의미인가?
타인은 이해하려 해도 이해 할 수 없는 시간들이
서로에게 같은 바탕색인 사람들.
그래서 어떤 말이든 마음 깊이 가 닿는 사이.
때로는 같은 이유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쉬운 사이.
언니는 하느님을 만나고 대부분의 시간을 교회에서 보낸다. 주말이면 같이 놀러갈 계획을 짜던 언니네가 일요일 낀 행사에서는 빠지는게 당연해 지고, 나는 마음이 몹시 힘들던 몇달전 언니에게 “하느님에게 언니를 뺏긴것 같다”라고 응석을 부리기도 했다.
우리 부부는 마치 처음 만난 선배 부부에게 얘기 하듯, 그 동안 들고 있었던 모든 현상의 문제, 마음의 고민, 앞으로의 계획등을 탈탈 털어냈고 언니와 형부는 이를 받아 진심으로 귀기울여 들어주었고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남편은 일단 말하는 것만으로도 복잡했던 생각들이 많이 정리가 되어 고맙다고 하며 하루종일 방치되어있던 사남매에게 돌아가려 하는길.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아이들이 눈에 밟히지만, 서운해 할까봐 아빠에게 안 갈 수가 없다. 아빠를 만나서 가만히 안아드려본다.
어색해 하지만 역시나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리고는 아빠와 언니가 통화를 하는가 싶더니, 언니 형부가 다시 나타났다.
“아, 형부~ 너무 오랜만이다.!” “그치? 그 동안 잘 지냈어?” 6시간을 내리 수다를 떨고 30분만에 다시 만난 우리는 이 나눔의 힘을 모아 아빠의 이야기를 들어드린다. 처음엔 한 1시간쯤 예상했는데, 저녁을 먹고 가라고 하신다.
오리집에서 본격적으로 그 이야기는 시작됐고,
건너편에서 듣다 듣다 졸던 언니에게 눈으로 입모양으로 얘기한다 “언제 끝나?” 키득거리는 듯한 표정만 봐도 서로 어떤 기분인지 안다.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지난 몇 년간 몸만 왔는데, 이번에는 왠지 마음이 따라나선 기분이 든다. 비로소 조금 마음이 안락하고 평안하다.
나의 기질적 우울함은 마침내 안도하는 것일까?
쉽사리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누가 아무리 밀착해서 나의 모든 것을 받아준다해도 해결할 수 없는 나의 마음의 문제인 것을 인정하고 나니, 그런 기대는 쉽사리 안한다.
허나 이번엔 마음보다는 몸이 반응하는 것 같다.
그래도 핏줄이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우리 가족을 많이 챙겨주었던 언니네이고, 그 때 같이 살던 시절과는 또 많은 것이 변해 있을테니 그때보다 더 행복한 제2의 전성기를 맞을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가 스며드나 보다.
“들어온지 4시간이 넘었네? 우리 너무 민폐손님 아니야? ” 형부와 키득거리며 까페를 나서는데 방금 내 머리속을 지나친 생각이 언니의 입에서 나온다.
“우리 정말 다시 이웃사촌되는거야? 실감안나네. 지금이 같이 살기 딱 좋은 시기일수 있어. 재밌겠당”
그래. 재밌겠다. 언니야.
우리도 어쩌면 모진 서울살이(?)를 겪는 동안 철이 들었을지 모르니, 그때의 부부와 다른 모습일 수 있을거야.
어부 이야기가 생각난다.
한가하게 낚시를 하고 있는 어부에게 갑부가
“왜 이렇게 생산적이지 않게 한마리씩 낚시를 하고 있소? 낚시 장비를 사시오”
“뭐하게요?” 했다는 그 어부 이야기.
“장비를 사면, 물고기를 많이 잡을테고, 그 많이 잡은 것을 시장에 내다 팔아 배를 사시오”
“뭐하게요?”
“배를 사면, 물고기를 멀리가서 잡고..어쩌구 저쩌구..결국 부자가 될 것이오”
“부자가 되서 뭐하게요?”
“한가한 곳에 자리잡고 앉아, 맛있는 음식과 날씨와 낚시를 즐길것이오”
“지금 내가 그걸 하고 있지 않소”
이 일화는 부자가 되어봤자, 그 끝에는 원래 하려고 했던걸 하는거다. 혹은 행복이 어디있나 사방팔방 헤매고 다녔지만 그 행복한 파랑새는 바로 우리집에 있었다는 맥락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 얘기의 결론은 그거 아니라고 한다.
부자가 되어 고향에 다시 돌아온 그 어부와, 원래 낚시를 하고 있던 어부는 같은 어부가 아니라고.
경험치가 다르고 그 경험이 주는 깨달음을 가지고 고향에 돌아온 어부일테니.
생업으로 해야 하는 어부와, 삶의 여유로 낚시를 하는 어부는 다른 어부임이 생각해보니 당연한 일이다.
부자가 되어 원래 살던 곳에 돌아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분명 달라졌다. 까페 창업과 폭망, 그 사이 사남매는 모두 초등학생이 됐고, 책을 몇 권 썼고, 회사 두군데를 다녀봤고, 두 아들의 야구선수생활과 은퇴(?), 부동산 사건사고, 잘못된 투자들, 최근에 차털이범까지... 그리고 다시 새벽글쓰기로 돌아오기까지..파란만장한 일들을 겪어낸 우리이니 떠날 때의 나와는 다른 나일 것이다.
원래 집에 있는 파랑새를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찾아 나서지 않았다면, 집에 있는 그 새가 행복이라는 의미일지 평생 몰랐을지도 모르니 난 파랑새의 존재를 기대하며 다시 그곳으로 간다.
“고생을 돌아돌아 이제 정착할 곳을 찾았다“고 말 떼기가 무섭게 남편과의 한,미 기러기를 언니네와 머리맞대고 의논하는 우린 영 편해질 수 없는 운명이라고 여겨야 할까?
그 답 또한 살아가면서 천천히 찾아지겠지.
자기 검렬에 걸리지 않는 글을 쓰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아직도 미숙하고 생각의 폭도, 운신의 폭도 좁다. 어리고 어리석다. 하지만 이런 나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글쓰기의 기능적인 측면을 생각하는 것보다 나은 때라고 여긴다. 그게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쓰는 사람으로서의 소명이라고도 보이니까.
나의 작은 식견보다 어쩌면 내 주변 사람은 훨씬 나은 사람들도 둘러싸여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제 언니네 부부를 보면서, 최근 글벗들의 위로에 감화받으며, 우리를 안기다리는 척 하면서 몹시 기다린 아빠와의 저녁식사 시간에.
나의 뇌리를 관통하던 한 줄기의 생각이다.
“나를 믿지 말고, 나를 사랑하는 주변을 믿어보자.!”
이번의 이사는 원가족으로부터 생긴 불편한 마음이 다시 새로 뿌리를 내리면서 결국 가족으로서 해결될 수 있는 마음이기도 하지 않을까.?
다가올 봄이
내 섣부른 기대보다는 따뜻하길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