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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Aug 14. 2020

치열하게 일상을 사는 한 사남매 엄마의 특이한 취미

물처럼 흘러가는 인생, 잡아서 기록하고 추억하기


아는 동생의 평범한 포스팅을 보고

오늘도 나의 미라클 모닝은 망했다. 아무리 촘촘하게 시간계획표를 짜고, 바인더에 동그라미 액스표를 치면서 체크하고, 내일은 이러지 말아야지 머리 쥐 뜯으며 열혈반성을 해도 나란 사람은 그냥 비슷하게 흘러갈 뿐이다. 내가 나에게 잘 안 잡힌다. 나에게 잘 안 잡히는 내 자신이 참 싫은 대상이었는데, 요즘은 조금 관점이 달라지고 있다. 여행이라는 키워드로 자신의 인생을 소개한 친한 동생의 포스팅을 읽었다. 그냥 무심코 이런 저런 이웃들의 많은 글들을 읽듯이, 가끔 읽고 싶어서 읽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관습적으로’ ‘인사치례’로 ‘글로도 소통해야 하니까’ 내가 읽어줘야 내 글도 읽힐테니까, 글소통이 글쓰기계의 큰 마켓이 되버린 sns라이프 패턴에 따라 나도 여기저기를 눈으로 훝고 있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어두웠던 내 새벽 글 눈이 확 밝아지는 것을 느낀것. 처음엔 무심코 읽다가 허리가 점차 펴지고 나는 모니터에 머리를 박기 시작했고, 이내  빨려들어갔다. 그리고 코 끝이 찡해 지면서 눈가에 물기가 묻어나기까지. 뭐가 달랐을까? 그건 요즘 사람들의 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던 꾸미지 않은 담담함 그리고 바위같은 무게감과 안정감 그게 글을 뚫고 화면으로 표현되어 나에게 전달이 된 것 같았다. 안정감, 그게 나에게 필요한 감정이여서 였을까? 여튼, 그 한 모니터 스크롤 세네번에 해당하는 그 소개글에서, 그 아이의 지난 시절이 나에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무슨일을 하고 나이가 몇살이고 어떤 성장 과정을 보냈는데..이런 설명이 하나도 없이도 그 사람을 그 글 하나로 이해하게 됐고, 거기에 감화받게 됐다. 글을 읽고 있는데, 글을 읽고 있다는 사실보다는 그냥 그 사람의 인생을 감상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가 무슨 글 평론가라도 된다고, 오랜만에 지인의 글로 감화를 받았노라고 칭찬을 잔뜩 퍼붓고는 생각했다. 오늘 이 칭찬이 이 동생의 미래의 씨앗이 될 수도 있겠구나. 나도 누군가 진심어린 글 칭찬이 내가 글을 쓰면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내 소명에 불을 밝혀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적용해야 할 점 한가지를 캐치해냈다. 아... 나도 읽는다는 느낌을 지운 감상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글을 쓰고 싶구나.


나는 사실, 엄청난 스케줄을 소화하며 하루하루를 내달리고 있는 사남매의 엄마다.

일단 달리 도움받을 곳 하나 없이 사남매를 키워 내야 하고, 책임감을 갖고 일할곳을 10년만에 찾았으니 열심히 하고 싶고, 퍼스널 브랜딩 과정을 마치고 시작한 소원쓰기 모임 1기를 시작했으니 턱 하니 나를 믿고 곁을 내 준 모임의 회원들에게도 최대치의 도움이 되고 싶고, 바디프로필이 얼마 안 남았다고 돈 벌이도 없는 내가 생애 첫 고가의 1대1피티도 6회 끊어놨으니 그 값도 해야 겠고, 그 무엇보다 내 오랜 숙원인 ‘내 책 출간하기’의 과제도 풀어내야 한다.

이 밖에도 소소하게 사람들 관리 오고가는 연락 주고 받고, 집안일 챙기기 아이 네 명당 각각 적어도 대여섯가지씩 파생되는 엄마가 챙겨 줘야만 굴러가는 할일, 밀린빨래, 집안 청소, 집밥에 대한 압박, 그리고 친정아빠와 연락을 하지 않고 있다는 체끼같은 불편함. 이런저런 소소한 감정의 격동까지.


가끔은, 아니 자주 숨이 막힌다. 이런 모든것과 함께 살아온지 하루이틀 이야기는 아니지만, 숨은 하루이틀 막히다 보면 요령이 생겨지지는 않더라. 삶은 계속 굴러가고 있고, 나는 계속 그 속도에 맞춰서 내 할을들을 모두 풀어내야만 하니, 호흡조절은 계속 필요하고, 가끔은 죽을것만 같을 때 심폐소생술도 필요하다. 그래서 생긴 버릇인지 모르겠다. 너무 힘들때 이런 삶의 수레가 너무 빨라 그 안에 내가 없이 그저 현상에 매몰되어 딸려간다고만 느낄 때 어떻게 완급조절을 하는지 생각해 봤다.  그리고 질문을 많이 받는 편이다 “그 모든것을 어떻게 다 해요?” “안 힘들어요?” 라고.


그러게, 내가 뭘하지?


힘이 되는 말을 되새긴다.

부서진 가슴 없이는 전사가   없다.’ ‘상처의 크기가 사명의 크기다’ ‘ 안에 있는 모든 문제를 향해 인내하라.

문제 자체를 사랑하려 노력하라. 너는 어짜피 답을   없다.  문제들과 그저 함께 살아가라요즘 나를 지탱해주는 명언 3이다.


그런데, 정작 진짜 번아웃될때는 이런 말이 안 통한다. 명언 그거 개나 줘버려.


그래서 내가 진짜 힘들때는 멍 때린다는 것을 알게 됐는데, 멍 때리는 것을 잘 유도하는 세가지 상황이 있었다.


첫째.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 쳐다보기

29살. 남들 다니는 번듯한 직장도, 미래를 함께 계획할 짝꿍도, 단단한 자아도 없던 내가 선택한 마지막 인생 탈출구? 어느덧 나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미국 뉴저지의 부자동네라 불린다는 잉글우드 클리프 저택 2층 서늘한 방에 큰 이민가방 두덩이와 함께 놓여졌다. 털썩, 침대에 주저앉았다. 이렇게 우여곡절끝에 여기를 왔는데 왠지 이것이 해결책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이게 아니면 난 정말 끝인데. 현실로 느껴지자 심장이 발등에 쿵 떨어지는 불안감이 나를 타격했다. 여기가 미국이건 별나라건 중요하지 않다. 그냥 그 설명할 수 없는 나락의 끝으로 하염없이 빠져들고 있는 내 마음만으로 육신의 무게를 버틸 힘이 없었다. 영화에서 괜히 충격을 받았을때 침대 끝에 털썩 주저 앉는것이 아니라는 것. 그렇게 주저앉아 멍한 눈으로 창밖을 무심히 보다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과 눈이 마주쳤다. 아니, 내가 그 나뭇잎 하나를 지정해 놓고 처음엔 무심코 바라봤다. 그런데 어느덧 시선을 뗄수가 없었다. 시간이 한 5분 10분 흘렀을까?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렇게 살다가 바람이 떨어뜨리면 흩날려서 어디론가 가겠지’. 어디로 가야할지 내가 걱정하는게 의미가 없구나. 이거였을까..

지금에서야 12년전의 그 알수 없는 편안한 감정이 이해가 된다.  


둘째, 고랑에 떨어지는 빗방울 쳐다보기 

비를 좋아하는 나는 비가 오면 마냥 행복하다. 요즘과 같은 폭우시기에 사람들 모두 비가 와도 너무 온다고 하고 뉴스에선 비 피혜사례가 속출하는제 속절없이 ‘헤헤 오늘도 비가 오니까 너무 좋다~’ 표현 할 수 없어 속으로 삭힐 뿐, 나는 여전히 비가 너무 좋다. 그 이유도 명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그냥 느낌이고 감각이고 직관이다. 비 냄새도 좋고, 비가 오는 그 소리도 좋고, 비가 오는 그 회색 색감도 좋고 제일 좋은건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너무나 힘든 일이 있었던 시기, 불면증이 지속되던 어느 날 밤 어떻게 애를 써도 잠이 안 오고 마음이 허해 유투브에 ‘비오는 소리’를 검색해서 틀어놓고 눈을 감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끌리듯 스크롤을 내려 보게 된 댓글에 난 정말 빵 터졌다. ‘아. 처음에는 너무 좋아서 들었는데요, 계속 듣다보니 삼겹살 굽는 소리와 너무 똑같아요. 저 결국 못 참고 삼겹살 구워먹고 이제야 자려고 다시 누웠습니다.’ 했던가. 그 삼겹살 기름에 굽는 소리에 빗소리를 비유당한 이후로, 비에 대한 내 감성 나만이 느끼던 그 비가 품고 있는 흙냄새의 향미는 고기냄새로 대체가 되어버렸다. 감수성 파괴 하지만..그날 그 누군지도 모르는 그 사람의 댓글에 오랜만에 웃으며 잤던 기억.

한 번 웃고나니 그 힘들었던 마음이 무색하게 너무 별게 아닌것처럼 달리 보여서 당황했던 마음 이 또한 비에 대한 추억보태기로 비를 더 좋아하게 만들어 주었다.


셋째, 다이어리 해당 월간페이지 펴놓고 쳐다보기

8월 일정이 빼곡히 담긴 다이어리를 편다. 14살부터 27년간 해 온 의식인데도 내 다이어리는 참 낙서장같다. 요즘 3p바이더니, 플랭클린이니, 시간관리 철저하게 하기 위한 노하우 담긴 수업도 많이 있던데.. 형형색색 보기좋게 정리된 플래너라는 것은 내 27년세월속에선 찾아볼 수 없다. 그냥 무심하게 찍 그어놓고 대충 써있는 그냥 다이어리만 보면 어디 공사장 아저씨 일정표같이 휘갈려 써이는 8월을 쳐다본다.  2020년 8월 14일 금요일 아침 7시. 나는 어디쯤에 서 있는 걸까.


이 한 인생의 전체에서 나는 어디쯤에 서 있는지를 구경한다. 내가 나를 관조하고 있는거다.

산으로 비유한다면 정상이 저만치 아주 희미하게 보이긴 보이는 어디 쯤인 것 같다. 보이긴 하지만 눈에 바로 잡힐 거리가 아닌데서 오는 아직 얼마나 더 가야할 지 모른다는 무지가 주는 압박감의 어디쯤에 와있지 않을까. 오늘 아침 또 소원쓰기를 해야 하는 다이어리를 펴놓고 내가 한 생각이다. 여기가 가장 산에서 난 코스이다.


차라리 정상이 안 보이는 산의 시작점부터 중간까지는 마음은 즐겁게, 체력은 아직 짱짱 이랬는데, 체력은 고갈되고 정상은 어렴풋하고 지금 딱 그 어디쯤에 서 있는 나. 그래도 잠깐 서서 물한잔, 초코바 하나 입에 물 수 있는 여유가 나를 정상까지 결국 가게 하듯, 다이어리 보고 멍때리는 그 작은 시간조차 죄책감이 되어야 한다면 어찌 이 모든것과 함께 가겠니. 하며 미라클 모닝 플랜을 계획대로 못 실행한 나를 또 합리화 시킨다.



소원쓰기 맴버들을 응원하며

함께 소원을 쓰며, 혹은 소원을 찾는 멤버들과 밀착소통을 하는 재미에 빠진 요즘이다. 내가 10년넘도록 매일같이 나를 괴롭히던 ‘나는 누구일까?’ ‘나는 왜 태어났을까? 삶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걸까?’ 이런 질문들을 지금부터 찾고 있는 사람들.

인생의 의미를 제대로 다지면서 살고자 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나는 요즘  답이 없는 것이 더 익숙해져 버린 시간들에 갑자기 환한 해결점이 보이기도 해서 어색하기도 하지만 찾으면 결국 찾아지는구나를 깨달아 가는 인생 재미가 쏠쏠하다. 그 답은 정답도 아니고, 옳은답도 아니다 그저 나만의 답일 뿐이다. 각자 자신만의 답을 찾아야 하는것이 인생이다. 허나 혼자 할 수 없는 인생이다.

그렇게 되게 우리 인류는 꾸려져 있나보다. 원래 하나에서 도출된 것이 각자 자신의 답을 찾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원래 하나였으니 그 뿌리가 무엇인지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는 한 그 답은 찾았다 해도 허상이다.

그래서 결국 모든 사람의 소망은 ‘선한 영향력’이나 ‘함께 나눔’으로 명사형 종결형이 비슷비슷한 것이다. 그 내용이 글로서 영향력이든, 기업가로 영향력이든, sns체널이든 그 컨텐츠가 다를 뿐 귀결점은 모두 좋은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은 거다. 그래서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지만, 모두 다 다르기도 한 것이 가능한 것 아닐까.


 

나를 찾아가는  어려움, 하지만 그만  수도 없는  무엇

나는 조금 더 먼저 인생의 매를 맞았다는 이유로 함께 인연이 된 사람들에게 내가 아는 바를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게 요즘 말하는 메신저의 역할이란다. 사람마다 고유의 경험치가 있고 거기에 따른 통찰력이 생기는 것이 당연하니 그것을 잘 정제해서 전달해 주는 것이 메신저다.내가 가진 경력은 27년동안 주구장창 써 온것이다. 꾸역꾸역 넣은 생각들을 어떤 필터링도 없이 막 배설했다고도 보이는 그 기록들이 나름 내 내공을 만들어 주었나보다.


그 내공으로 내 결에 맞는 배우자를 찾는 눈을 갖췄고, 체력을 키워둬야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일찍 알아채 그 체력으로 요즘 세상에 드물다는 사남매의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존재에 대한 깊은 고민과 괴로움을 뚫고 나와 내가 헌신해야 하는 세상과 무사히 도킹했다. 도킹 이후에 해야 할 일들이 더 많이 산적해 있지만, 겁먹지 않기로 했다.


이제는 나이가 불혹이 넘어서인걸까, 아니면 그간 쌓아둔 인생 경험치들로 인할 걸까. 여튼 세상이 별게 아니라는 것을 조금 알고 난 후로는 꽤 많이 자유로워졌다.

내 몸뚱아리 안에 들어있는 것 같긴하데 도무지 보이지 않는 참 자아를 찾아 오늘도 고군분투하는 세상 모든 사람. 그 모든 사람을 내가 챙길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는 우리 식구 6명에게 영향력이 대단한 엄마이고, 내 소원식구 열몇명에게 먼저 맞은 매의 경험으로 조금 덜 아프게 도와 줄 수 있으며, 내 글로 누군가가 작은 위로나, 혜안을 얻는다면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나의 멍때리는 취미를 적극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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