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토록 못나보일 때
이렇게 못난이가 또 있나 싶다.
한번씩 내가 이렇게까지나 별로인 사람인가? 싶은 때가 온다.
그리고 몇 번씩 엄청나게 잘난 사람인 양 어깨에 힘을 주고 싶을 때도 온다.
이제 알겠다. 아니 알고 있었지만, 또 절절하게 느낀다. 나의 문제점은 중간이 없다는 것이다.
오늘 새벽글쓰기 주제를 발췌하려 신문칼럼을 뒤적이다가 이런 개념이 나를 멈추게 만들었다.
유좌라는 그릇이 있는데 이는 비어있으면 기울어져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꽉 채우는 순간 쏟아진다.
그래서 이 그릇이 평온하게 멈추어 있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릇에 물이 반쯤만 차 있어야 한다고.
이것이 참 쉽지 않다. 더 이상 삶에서 간절하게 원하는게 없다고 생각했다. 젊은시절 절절하게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한 그 아픔을 더는 느끼고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나이들어 가는 것의 좋은 점 중 하나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충분히 늙지 못했나보다. 아니면 나이에 맞게 성숙해가지 못했던지..
하루는 인류에 위대한 일을 내 손으로 다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근거없는 자신감이 막 솟구친다.
그렇게 몇일 달려가는가 싶다가 이내 "나까지게 무슨, 지 상황 하나 건사하지 못하면서' 라며 나를 더는 깔아뭉갤수 없을만큼 바닥으로 내팽겨친다.
중간이 없다. 중간을 가지고 싶은데 유좌지기에 물을 반만 따르는 것이 나에게는 그렇게 어렵다.
그릇에 물을 반만 채우려다가 조금만 더를 외치다가 가득찬 그릇이 와장창 다 쏟아지고 나면 그릇은 텅 빈다. 무엇이라도 넣으려는 노력없이 그렇게 빈수레가 되어 한동안을 살아간다. 빈수레가 요란하다. 뭔가 내실없이 시끄럽게 그렇게 지내다가 물을 만나면 완급조절없이 그 그릇을 가득채우려는 욕심을 부린다.
결국 반을 넘긴 그릇은 또 전부 쏟기고 다시 텅 빈다.
이 굴레에서 나는 영원히 살 것인가?
어제는 이 생각이 들어, 너무 괴로웠다. 다시는 나의 누적스트레스를 핑계로 아이들을 과하게 억압하지 않겠다 다짐한지가 몇 년인데, 여전히 이렇게 살고 있는지 내 자신이 너무 한심했다.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고칠래?" 아들에게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그 문장은 화살표의 방향을 고쳐 달고 나를 향해 달려왔다. 하는 일이 잘 안된다는 스트레스에 아이들이 엄마없는 사이 또 유투브를 봤다는 사소한 사건에 내 감정을 얹어 방에 주저앉아 되는대로 울어버렸다.
무엇이 그렇게 서러웠는지 울음이 사그라들지가 않았다. 이게 어른의 감정이라고 드러내고, 엄마의 모습이라고 보이기엔 창피할 만큼 슬펐다. 문틈이 삑 열리더니 틈 사이로 휴지가 하나 던져진다. 손을 보아하니 고사리 같은 막내의 손이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괴로운 마음과 동반해서 살아야 하는걸까? 누구나 이렇게 살아가는 거라던데...
괴로움의 무게를 달 수 있는 저울이 있다면 각자의 괴로움을 꺼내서 달아보고 싶다.
정작 내것이 더 무겁다 한들 그게 나에게 어떤 위로가 될까?
글쓰기가 감정정리에 도움이 된다고 늘 주장하고 다니는 나다. 오늘은 내가 기획한 주제를 향해 글을 쓰지 않는다. 그저 내 감정의 목소리를 따라가보기로 하고 브런치를 열었다. 하는 일이 잘 되었다면 나는 중용을 지키는 사람으로 살게 될까?
나는 아직도 어른이 아니다. 내가 정의하는 어른은 중용을 지키고 사는 것이다. 넘치지도 모자르지도 않는 상태를 유지하는 내공을 어른이 되었다고 바꿔 말하는 것이라면, 나는 하루는 어린이였다가 하루는 장군이기를 반복한다. 그 어느곳에도 속하지 않는 엄마 밑에서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나를 시급하게 깨워내야 할 텐데..
내 나름의 노력을 다 한다고 해봐도 잘 안 될 때 심한 좌절을 느낀다. 어제밤이 그랬고, 그 기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지금도 그렇다.
병원에 가서 당번을 봐야 하는 내 오늘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고 있다. 괴물로 다시 변한 내가 부끄러워 그리고도 아직 그 화살표를 '너 때문이야'라고 생각하는 그 마음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옹졸함이 꼴 보기 싫어 아침이 오는것이 싫은 새벽이다.
점차 물은 차오르겠지만 이를 중간지점에 잘 멈춰놓고 그것을 유지하는 나, 어른인 나, 내 자신이 설정해 놓은 좋은 엄마라는 기준에 적합한 중용의 밸랜스 속에서 여여하게 살아가는 나,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