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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Dec 08. 2020

친청엄마 대신 아기띠

사 남매 공동육아자 아기띠

아이가 운다. 일단은 안아본다.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기저귀를 확인한다. 기저귀도 이상이 없다. 우유를 타 와서 먹여봐도 신통치 않다. 아.. 너, 답답하구나?. 아이에게 내 마음을 어물쩡 담는다. 내가 제일 먼저 눈으로 찾는 것은 자주색 아기띠.  앗, 어디 있지?. 사 남매를 키우며 수많은 육아 도구를 썼겠지만, 내가 제일 애장 하는 물건은 단연 아기띠였다.  사이즈에 딱 맞춤으로 조정해놓은 아기띠를 딸깍, 왠지 모를 안정감이 든다.  하루 종일 혼자였던 내 허리를 누군가가 붙잡아 주는 것만 같다. 정신질환은 아니겠지? 아기띠의 딸깍 에 위안을 느끼다니..


이 아기띠가 허리를 조여 오는 감각이 내 육아에 위로가 되어주었다면 이 느낌은 과연 얼마나 공감받을 수 있을까? 도무지 아이를 어떻게 안아야 할지, 아이를 안고는 어떻게 일상을 하고 걸어야 할지 모르겠는 초보 엄마에게 엄마 너는 이렇게 하고 걸으면 돼, 아가 너는 이렇게 엄마 등에서 쪼물쪼물하다가 편히 자도 돼. 하고 알려주는 친정엄마 같은 존재였다. 홀로 타지에서 육아가 전부인양 살아야 하는 나에게는 그랬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가까이 아이를 몸에 붙여놓고 나서 아이의 존재를 잊을 수 있는 상황을 연출해 주는 것도 아기띠였다. 육아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몸 가장 가까이 붙임으로써 가장 자유로울 수 있다는 역설.

특히 나는 아기띠를 돌려 아이를 등으로 업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렇게 하면 일단 손이 자유로웠다. 

"아, 등 뒤에 아이가 붙어 있으니까
 순간 아이의 존재를 잊을 수 있구나."

옛날 밭일을 그렇게 많이 하면서도 아이를 많이 낳던 엄마들의 메커니즘을 아기띠 하나로 다 이해할 것 만 같다.

불안정 애착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엄마 입장에서도 아이와 분리되어 나만의 일을 하는 순간이 그토록 자유롭지만은 않다. 10달을 품은 아이를 몸 밖으로 내보낸 시점부터 아이와 엄마는 각자의 입장에서 불안감과 마주한다. 이 둘을 모두 만족시키며 따로 또 같이를 실현해 주는 도구, 아기띠에 대해 내린 재정의다.


 개미 한 마리 지나가지 않는 텍사스 외딴 신혼집에 아이와 둘이 남겨진 나의 기억 속 풍경, 그 속엔 나와 아이가 있고, 그 사이에 우리를 연결시켜주는 자주색 아기띠가 늘 있었다. 내가 낳았다는 어렴풋한 기억 말고는 내가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랄 때마다 그 띠는 나와 아이의 몸을 붙여놓고 내가 정말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사물에 이렇게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본 것은 처음이다. 


"이 물건은 내 피붙이 같아' 이렇게 얘기하는 타인이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물건에다 대고 그런표현은 과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나는 어느덧 육아필수템하면 우유, 기저귀, 아기띠  하나를 삐라면 기저귀를 삐야해 아기띠는 안돼! 라 할 정도로 아기띠와 나를 혼연일체 하는 엄마가 되어 있었다.


언니는 그거 언제 세탁했어?

앗, 이것도 빨아서 쓰는 거야?  부끄럽지만 이게 내 대답이었다. 아기띠를 빨아야 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큰아이 둘째 아이를 그냥 주야장천 저 빨간 띠를 매고 키워댔다. 물고 빨고 할 때마다 실리콘 치발기를 띠위에다 끼워두거나 그런 적은 있었어도 옷처럼 빨아야 한다는 생각은 왜 하지 못했을까?


그런데 그렇게 알고도 나는 이 빨간 띠를 물에 적시지 않았다. 왠지 모를 고집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안에 묻은 손때와 세월의 흔적이 씻겨질까 봐 싫었던 게 아닐까 싶다. 본능적으로 그 물건이 가진 손때 그대로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의 간직하려고 애썼다. 이걸 씻으면 나의 고생담이 면면히 묻어있는 모든 스토리가 씻겨 내려갈 것 만 같아 더럽다 소리를 불사하고 씻지도 않고 사수하고 있던 아기띠.

그 띠는 나와 함께 미국의 외로운 육아 라이프를 견뎌주었고 함께 태평양을 많이도 건넜다. 미국과 한국을 서너 번쯤 오가다가 결국 한국에 정착을 하고 모두가 의아해하는 셋째를 낳았을 때도 유모차로 두 아이를 끌고 막내가 있을 자리가 없을 때도 안락한 엄마품과의 연결고리가 되어주었다.

이렇게 연연 연생의 어린것들을 함께 키워준 빨간 띠의 활약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하이라이트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바로 넷째의 탄생과 함께 안 그래도 필수템이었던 아기띠는 목숨 템이 되었다. 두 아이를 유모차에 태운다. 유모차 손잡이에 한 아이를 앉힌다. 앞으로 띠를 메고는 걸음이 걸어지지 않으니, 아기띠를 뒤로 맨다.

비로소 엄마는 한 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처절한 사 남매 육아기에도 항상 함께 나와 의리를 지켜준 아기띠, 유독 집착했던 물건이라 모든 것을 빠르게 육아용품을 처리해 나갈 때마다 늘 자리를 지켜냈다.

소중한 추억의 물건들이 하나 둘 사라져도 이 아이만큼은 옷장 구석에 늘 떡 하니 자리를 차지했다. 엄마라는 든든한 백이 있기에 버려질 이유가 없는 우리 집에서 영원히 살 아이였다.

나는 큰 딸이 시집가서 첫 아이를 낳으면 이것을 물려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렴풋한 나의 직감이 이 띠를 간직하게 했다. 

하지만 결국 잃어버렸다. 그것도 해외 미아가 된 채로,. 몇 해전 말레이시아로 가족여행을 갔을 때, 말레이시아의 제주라 불리는 랑카위 섬을 가기 위해 탔던 작은 경비행기. 그곳에 두고 내린 것이다. 

어렵게 온 가족여행 자체를 원망하고 싶을 만큼 허망함이 컸고 그걸 챙겨 내리지 못한 스스로에게 분노, 그걸 같이 챙겨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남편을 잡았다.  


하지만 그렇게 떠나보냈다. 현실세계에 버젓이 살아있는 엄마가 보면 기절할 노릇이겠지만 그렇게 나와 사 남매를 함께 키워준 아기띠를 해외에다 버리면서 나의 집착도 버리고 왔다.

내가 특정인에 도움이 없이 고군분투 사남매를 키우느라 애썼다는 것은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은 날, 과연 그날이 올까? 그 날이 오면 나는 지금보다 많이 행복할까?


난 여전히 그때 아기띠를 한번 더 찾으러 공항에 가볼까? 를 후회하는 '아이 키우는 생색'에서 못 벗어난 내 속에 내가 더 많은 철부지 사 남매 엄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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