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10조 서약서 편
"그래서, 내가 못 살겠다는 데 어쩌라고요"
"아니, 여태를 참았는데.. 나 이제 좀 자리 잡을 수 있겠다 싶은데.."
"자리고 나발이고 당장 하루가 죽겠다는데, 그냥 긴말 필요 없고 딱 결정해요. 여기 혼자 남던지
나랑 당장 짐 싸들고 한국 가던지"
8년 전 가을 저녁, 텍사스 외딴 신혼집에 살던 어느 부부의 대화다. 나는 독립성이 강하고 어딜 가든 적응을 잘하는 아이니 괜찮을 줄 알았다. 아무도 없는 곳에 남편 하나 믿고 힘들 텐데..라는 주위의 걱정에는 콧방귀도 안 나왔다. 소원 요정이 점지해 준 이 남자, 사람 하나 믿는 힘으로 지구도 들어 올릴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콧대 높게 이민가방을 쌌던 나였다.
"다난성 난포 증후군이라며? 의사가 분명히 쉽지 않다고 했는데..."
뒤늦게 알게 된 첫아이 임신소식에 남편이 갸우뚱거리면서 했던 세 번째쯤의 문장이다. 나도 의아했다. 20대 내내 자궁기능이 좋지 않다는 산부인과 전문의 진단이 익숙한 나로서, 이것이 결혼 생활의 걸림돌이 될지 몰라 연애시절 "이런 나라도 괜찮겠냐?"며 신파극을 찍었던 나로서 민망하고 창피할 만큼 빨리 찾아온 아이였다.
텍사스에서 낳았지만 제조일자와 장소는 한국이라며 우리 부부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그러고 보니, 이민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 상공을 가를 때 아이의 씨가 내 배속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는 것은 여러 번 생각해봐도 새삼 신기하다. 어쩐지.. 쥐약 먹은 사람처럼 졸리더라니..
다시 싸움의 현장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첫 아이 소식을 수줍게 전한 지 1년 만에 둘째가 태어났다. 그땐 내가 왜 그랬는지 몰랐는데, 나는 심하게 자기 효능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나 보다. 유학생인 남편과 그 유학생의 와이프 역할, 그 이상의 역할이 없는 나에게 엄마 역할이 주어졌는데, 만만치 않았다.
만만치 않으면 둘째 엄두를 안 내야 하는데 나는 일단 저질렀다. 하는 김에 하는 거야. 아이는 많을수록 좋다는 평소의 지론에 따라 연년생이 태어났지만, 뭔가 태생부터 힘이 든다.
눈을 제대로 뜨지 않는 이 아이.
심장이 지구의 맨틀을 뚫고 더 심연의 어떤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 느낌, " 왜지? 왜 한쪽 눈을 못 뜨지?"
나의 어눌한 영어실력도, 아이가 문제가 있음에도 새로운 환경에 부딪히는 것이 두려워 병원에 가기 주저하는 내 마음도, 괜히 여기 와서 살자고 잘해주겠다고 나를 꼬드긴 남편도, 고속도로 30분 운전해서 데려다 줘야 하는 한인유치원에 큰 아이를 켜우 맡기고야 병원에 갈 수 있는 이 상황도, 몸조리가 안 된 채로 신생아와 18개월 아이를 실어 운전을 하다말고 아이가 울면 차를 세우고 젖을 먹여야 하는 이 상황들, 나를 더 미치게 만든 40도를 육박하는 텍사스의 지열도, 이 모든게 내 선택이니까 하고 이를 악물던 내 아집도, 그 모든 게 너무나 싫었던 2012년 여름 그렇게 나는 여름과 뜨거움과 육아에 질려버렸다.
그 해 가을 서로 잃어버린 쌍둥이 마냥 그렇게 부비고 좋아하며 지내던 우리 부부가.
사냐, 마냐를 두고 싸우는 사이까지 되어버렸다.
더 의견이 좁혀지지 않던 그때 나에게는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바로 신혼여행 때 자필 서명한 "부부 혼인계약서' 이것을 눈앞에 내밀었다. 그의 작은 눈이 힘차게 흔들린다.
"이게 뭐예요?" "당신이 제주도에서 기분 좋다며, 이런 건 100번도 더 해줄 수 있다며 사인한 거, 1 다시 1조 항 읽어봐요."
그로부터 한 달도 안 되어 우리는 텍사스 라이프를 모두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창살 없는 불지옥이라고 부르던 그곳을 벗어난 것이다.
한국에 와보니 그곳이 불지옥이 아니라 육아가 함께 하는 한, 육아에 대한 내 마음이 이 상태로 머무는 한 세계 어디를 가도 뜨거운 맛을 봐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기다리고 있긴 했으나, 어쨌든 나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부부 사이에 신뢰도 사랑도 중요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약속이 중요하고 이 약속에 대한 증거와 기록이 중요했다. 그가 웃으며 사인했던 부부 공약 10조 항 아내 편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의 의지를 꺾어야 했고, 나는 기록 앞에 당당할 수 있었다. 그의 부부 10조는? 그런거 없다. 그런거 안한다고, 남자가 쩨쩨하게 그런 것을 왜 하냐며 어깃장을 놓던 그는 지금, 엄청난 후회를 한다.
을사조약 이후에 최악의 불평등 조약이라며 나를 신고하고 싶단다.
신고할 곳은 없다. 그리고 한 달에 한번 그리고 1년에 1박 2일 이상 아내에게 월차, 연차도 줘야 한다.
1-2 조항에 당당히 명시되어 있다. 뭐가 그렇게 조항이 많냐며 이 밖에 조항들을 살펴보다가 "이번 생엔 망했다"로 늘 결론 맺는 그의 뒷모습이 가끔은 측은하다.
한국 역이민 이후로 아이를 둘이나 더 낳고 사 남매를 부부의 힘으로만 키우고 살아야 하는 우리는 철저한 동료사이면서도 서로 첨예하게 맞물려 있는 경쟁관계기도 하다. 내가 빠져나간 만큼 딱 그만큼의 일은 그대로 남아 상대에게 돌아가는 사이. 늘 사랑하지만 늘 긴장이 흐르기도 하는 공동육아 하는 사이.
나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후배나 결혼 준비를 하는 신혼부부나 혹은 이미 결혼한 부부에게라도 '서로 간의 원하는 바를 적은 부부 공동조약을 반드시 쓰고 서로의 니즈를 명확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조언한다.
무슨 부부 사이에 계약서고 싸인이냐, 하며 그냥저냥 살아가도 멋진 부부가 되는 경우도 많이 봤지만, 대부분은 싸움과 파국에 이르기는 것을 더 많이 보았다. 나는 내가 대부분의 사람, 아니 그보다 못 미치는 아내일거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던 걸까? 여튼, 실제로 이 계약서 덕에 나는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고 보석처럼 빛나는 셋째, 넷째라는 선물도 받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계약서의 활약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To be contin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