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음악을 참 좋아한다. 장르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한다. 내가 이렇게 노래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안건 중고등학교 학창 시절. 안그래도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눈가가 촉촉해지는 한참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 특히나 '인생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왜 이생에 태어났을까?' 평생 해결하지 못할 화두를 안은 '개똥철학하는 여고생' 그게 내 모습이었기에 그 배경지에는 항상 자동 BGM이 흘렀다. 특히 감수성을 뚝뚝 떼어 내 눈앞에 걸어줄것만 같은 신승훈 오빠, 김건모, 윤상, 전람회,... 모두 에초티와 젝스키스를 외칠 때 교실 구석에 앉은 내 이어폰에서는 항상 느리고 구태의연한 발라드 일색. 차마 말로 담지 못한 여고생의 마음이 구절마다 절절히 녹아져 있고, 그 음악들은 더 나를 결론도 없는 생각에 더욱 절박하게 매달리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젝키와 에초티를 쫒아다니는 친구들을 속으로 함부로 폄훼했다.
지금은 안다. 그 발라드를 좋아했던 마음은 지금의 해석일 뿐, 그땐 뭣도 모르고 에쵸티 팬 친구를 함부로 평가한 진심 속엔 나의 '질투'가 들어있었던 것을. 삶을 고뇌하지 않아도 엄마의 따뜻한 집밥과 아빠의 적당한 애정표현속에 안정적인 영역에 앉아있는 그들의 사춘기, 그 상징이 에초티와 젝키인를 쫒는 순수함인듯 느껴지자, 상대적으로 배고픈이에 해당되는 나에게 그들의 행보가 '배부른 여고생'처럼 보였다. 부러움과 동시에 그곳은 아무리 해도 내 노력으로는 가닿을수 없는 곳임은 직감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갈 수 없는 곳이기에 머문자리에서 내가 가진 남루한 쥬크박스 중 감성의 그 끝을 찾아줄 것만 같은 노래를 찾고 또 찾아 귀에 꽂았다. 라디오를 듣다가 공테이프에 녹음을 했다. 디제이의 곡 소개가 끝나고 노래 녹음의 시작점 그 찰나의 타이밍을 기똥차게 잘 맞추는 기술을 몸에 들이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앞뒤 60분씩 120분짜리 공테잎이 음악으로 꽉 차면 정성스레 곡명을 여백에 써서 플라스틱 테잎 케이스 속지를 꺼내 정성스레 곡명을 꼭꼭 눌러쓴다. 나만의 뮤즈가 또 한개 탄생한 순간이다.
이런 내 중구난방 음악 사랑은 대학을 가면서는 '국악, 그리고 풍물패'에 빠졌다. 사회과학대학 신문방송학 타이틀을 아낌없이 똑 떼고 그 자리에 '풍물대학' '장구학과'를 달아놓고는 동방귀신으로 다시 태어났다. 전국구로 크고작은 유.무료 공연을 따라다녔고, 방학마다 고창으로 덕적도로 전수와 합숙을 다녔으며, 유일한 여자동기로 그안에서 크고작은 썸 논란의 중심에 섰다가, 예쁜 후배들에게 논란의 중심을 내어주고는 쓸쓸히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잔도 제법 기울였다. 그 동방 바로 맞은편엔 'ㅁㅁ킹스'라는 야구동아리가 있었다. 발 한폭 정도의 거리를 두고 머리를 맞댄 이 두 동아리는 늘 서로를 경계하고 틈만나면 으르렁댔다. 그들은 하루종일 시끄럽게 같은 음을(그들의 귀에는) 연습하는 우리가 이해가 안됐겠지만 나와 우리는 매일 그놈의 작은 공을 하나 쳐보고 잡아보겠다고 아등바등하는(우리 눈에는) 그들이 이해가 안됐다. 그리고 항상 자주가는 감자탕집에 늘 터줏대감처럼 명당 자리를 잡고 떠날 줄 모르는 서로를 서로가 욕했다.
나는 지금, 부산어딘가의 그 마주보고 욕하던 동아리의 방에 가장 오래 머물고 살았던 남학우와 11년째 함께 살고 있다. 신기한건 그도 그렇게 풍물패와 으르렁거렸다고 하니 내가 속한 학교에만 있었던 일은 아니었나보다. 게다가 지금 우리집엔 꼬마 야구선수가 둘이나 탄생했으니 인생은 참 아이러니 웨이의 연속이다.
네 아이를 낳고 나서 내 음악취향이 많이 변했다. 일단 가사가 들어간 노래를 잘 듣지 않는다. 들어도 머슨 129?, 즉 머슨 말인지 모를 팝송을 즐겨듣기 시작했고 클래식에 점점 자주 관심이 갔다. 내가 육아에 몸살하던 시절 누리던 사치 중에 최고의 사치는 '음악회 감상'하러 가기였다. 난 사실 클래식중에 가장 기본이라는 곡을 들어도 작곡가가 누군지 한참 더듬어야 할 만큼 클래식계의 어린이다. 그래도 마냥 거기 앉아있는게 좋아, 틈이 나면 공연관람석에 앉아있었고 더 자주 앉게 되는 나를 열망했다. 그때까지는 내 안에 고상한 취미가 살아숨쉬고 있다가 이제 발현되나? 착각을 하려더 찰나, 친한 동생이 이런 말을 해주기었다. "언니는 일상이 너무 시끄러우니까, 조용하고 차분한 곳을 찾아가야지만 힐링이 되나봐요" 아. 백번 맞는 말이다. 그래. 난 조용하고 서정적인 장소, 또 그런 음악이 필요했던거다.
우리 아이들은 시끄럽다. 한참 자라는 아이들이 다 그렇다고 하기엔 우리 집 평균 데시벨은 지나치게 높다. '애들이 다 그렇지'라고 했던 수많은 이모들이 우리집에 왔다가 돌아갈때 똑같은 말을 한다. "진짜 힘들긴 힘들겠다. 야.." 그리고 평소에 정신사납다고 구박했던 자기 자식들에게 미안했다는 뜻이 담긴 다정한 손길로 등을 자꾸 자기네들 차쪽으로 보일듯 말듯 민다. 난 익숙한 헤어짐의 풍경이라 어짜피 다 보이는데. 그렇게 데시벨이 높은 것은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굳이 책임 여부를 따지자면 연연연생으로 줄줄이 쏟아놓은 부모탓이겠지. 더 디테일하게 굳이 따져야 한다면 첫애를 낳고 "내가 이 짓을 두번하면 미친사람인게 분명하니 나를 병원에 가둬라"고 했던 내가 "길게 하느니 짧고 굵게!!"를 구호처럼 외치며 2.3.4를 연달아 세상에 내어놓은 내 탓이다.
이미 벌어진 일, 탓 대신 수습을 좀 하고자 하니. 우리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단체로 조용할 수 밖에" 없고 이 조용한 가운데 "말 이상의 가치"를 전달할 수 있는 곳. 나의 혼자만의 공간 '클래식 감상'의 자리를 가족들에게 그랜드오픈해야 할 타이밍이 온듯했다. 중요한 건 아무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이들과 장거리 여행을 자주 하던 나는 패밀리쥬크박스를 일임해왔는데, 노래와 노래사이 슬쩍 클래식 한번씩 넣으려면 그렇게 애들 눈치가 보였다. 태교할 때 클래식을 많이 들려주라했는데, 그때만이 강력저항할 수 없는 나이라서 그랬나, 이렇게 생각하니 모든 적기는 다 그때 뿐인것 같다. 그.래.도. 난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가족 데시벨을 좀 낮추면서 정서적으로 차분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더 넣고자 하는 엄마의 절절한 노력 그리고 내가 나이들어 너무나 좋아진 이 클래식을 가족과 함께 감상하고 싶은 이 문화적 욕심을 말이다.
8번의 이사끝에 나는 우리가족 최종 정착지를 '서초구'로 정했다. 살던 곳보다 비싼 동네이니 몇가지 중요한 것들을 포기해야 했다. 아이낳고 유일한 혜택이라 칭할만한 '다자녀특공'으로 분양받은 새아파트를 팔아 치워야했고, 아파트라는 거주형태 자체를 포기해야 했으며, 덩달아 집평수도 깍아야만 이사가 가능했다. 점점 커가는 아이들 특히 사춘기를 맞은 큰 딸아이는 고만고만한 동생들과 한 방에서 자야하는것, 자신만의 공간이 확보되지 않음에 힘듦을 호소했고, 좁은 공간에서 불꽃튀는 에너지에 가족구성원들의 불만은 늘 휴화산 같았다. 이들을 늘 케어해야 하는 부모입장도 답답하긴 마찬가지 아니 사실 제일 힘들다.
게다가 집은 투자처가 아니라 안식처여야지! 하며 쿨하게 팔아버린 새 아파트는 연인 최고가를 갱신하며 고공행진한다는 소식을 들을때마다 명치끝이 콕콕 거리며 배가 아픈게 사실이다. 가끔 배가 너무 아파 떼굴떼굴 구르기도 한다. 내가 미쳤지. 가서 학군의 혜택을 받을 것도 학원가를 써먹을것도 아니면서.. 더군다나 코로나로 학교도 안 가는 이 판국에 너무 섣부른 선택을 했나, 난 세상을 더 배워야 하나 싶은 답답함에 가슴을 치다가도 어느 한 순간 이 복잡한 마음이 탁 하고 풀리는 때가 있으니 바로바로 '예술의 전당'을 한번씩 다녀올 바로 그때다.
남양주에서 버스3번에 지하철 2번 갈아타고도 모자라 마을버스를 타고 왔던 이곳은 항상 나의 로망이었다. 그 배아픈 새아파트 살던 시절에도 같은 서울이지만 아이들 등원시간안에 갈만한 희박한 공연에 내 시간까지 맞출 수가 없어 놓쳤던 공연들을 지금은 깨알같이 즐기고 있다. 낮공연이 있는 날은 남편과 자전거를 타고 가서 가볍게 커피한잔 마시고 들어가서 음악샤워를 하고 나온다. 공연이 끝나면 주차정산기를 가뿐히 지나 바퀴 두개를 내 발의 힘으로 밀고 그날 관람객중에 1등으로 미끄러져 나오는 기분, 제법 근사하다. 밤 공연일때는 일부러 일찍 나와 운동삼아 산책삼아 걷기도 한다. 차려입고 와야 하는 줄 알았던 곳이 '동네느낌'으로 바뀌니 우리 차림도 편해졌다. 아이들 학교에 데려다주고 문득 예당1층 까페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비도오고 하는데 공연있나 볼까? 하고 트래이닝 복 차림으로 감성에 젖어 나오는때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차림새보다는 음악과 그 분위기와 공간을 사랑하는 '마음새'였던 건가.
피카소관람이 뉴스에서 떠들석할 정도로 난리인 때, 얼리버드 티켓 마지막날 부랴부랴 갔던 그곳의 현장모습을 보고 우리식구들도 기함을 했다. 그런데, 번쩍하는 남편의 아이디어, 집에 가잖다. 일단 티켓을 받아놓고 집으로 갔다. 느긋이 점심을 데워먹이고 에어컨 시원한 거실바닥에 딩굴딩굴하며 충전 100% . 익숙하게 교통카드를 찍고 버스에 오르는 사남매. 이날 피카소전을 관전에다 전날 우연찮게 본 숲속기부 음악영재들 공연까지. 사이사이 지루할 틈 없이 펼쳐지는 정원 분수쇼. 곳곳에 숨어있는 까페테리아와 맛있는 간식. 나에게 천국이 있다면 꼭 예술의 전당을 닮은 모습일거라 생각하며, 사진에 그곳을 담았다. 그리고 때가 왔다. 금호영재 아티스트 악기연주에 심취한 아이들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드디어 '엄마의 은밀한 취향'으로 초대장을 내밀 그 때가 되었다 생각했다. 기민하게 움직여야 한다. 결정적인 타이밍과 괜찮은 관람대상이 필요할 때. 물망의대상이 된 것은 '코리안 챔버 오케스트라 정기공연' 일단 두 아들들을 먼저 대동하기로 했다.
흥미위주의 남자아이들을 뭘로 어그로를 끌어볼까, 고민끝에 선택한 것은 바로 '박스석' 제일 높은 3층으로 한 것은 '재미를 위해서였다'라고 말하고 사실은 '티켓값이 엄마 주머니 탈탈 털어 나와서 여력이 없다'. 그런데 이 녀석들? 코로나 격상 4단계로 인터미션도 없이 100분을 연이어 하는 공연을 제법 집중해서 때로는 즐기면서 듣는 분위기다. 결국 아이들이 지루해할까봐 전전긍긍하던 내가 제일 그날 공연에 집중을 못한것 같고 최씨 남자 셋은 의외로 음악을 즐길줄 아는 남자들이었다. 나는 그게 너무 기뻤고, 다시 한번 예술의 전당 가까이에 이사오겠다는 나만의 리스트업을 포기하지 않은 내가 눈물나게 기특했다.
그래 나는 그런 사람이었고, 그런 이끌림으로 여기에 와놓고 무엇을 쳐다보고 떼굴떼굴 굴렀단 말이냐.
더 신기한 일은 다음날 일어났다. 공연이 어땠냐고 득달같이 피드백을 묻지 않았다. 진심으로 첫공연을 너무 차분히 잘 본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잘 자고 일어난 일요일 아침 내가 속으로 하는 말을 얘네는 듣나 싶은 답들을 아침밥상에서 자발적으로 쏟아낸다. 자기는 어제 사실 너무 좋았는데 그 중에서도 모짜르트 곡이 참 좋았고, 프랑스 작곡가는 너무 어렵다나?. 때마침 아빠가 틀어놓은 선율에 다시 귀기울이고 한수진이라는 바이올니스트에도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다시 이모네서 1박을 한 누나와 막내를데릴러 가는 길, 한강위에 떠있는 너무나 아름다운 구름을 한참 바라보다 다급하게 나를 부른다. "엄마, 엄마!! 시를 써야겠어요. 펜 있으세요?" 급해서 보이는 종이 이곳저곳에 쓴 큰 아들.다른 시들은 차체에서 종적을 감췄고 다행히 읽고 있던 나의 책 뒷면에 써둔 시가 살아있어 그흔적을 남겨본다.
그날 저녁. 이번에는 3호가 막 운다. 정말 이유도 그 어떤 맥락도 없이 한참을 운다. 뭔가 굉장히 억울한 일이 있는데 한이 맺혀있는데 그것을 차마 어떻게 못해서 미치겠는 표정과 눈물, 아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하는 그 눈물을 지난9살의 내 감수성을 대조해보니 왠지 알것만 같았다.아는척 보다는 가만히 안아주고 충분히 울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그리 해 주었다. 진정하는데까지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울음끝의 그를 차에 태우고 나머지 셋도 타게 하고 짐을 꾸역꾸역 실어 일요일 반에 우리는여수를 향했다. 울던 아이는 언제부터 울음을 멈추고한참이나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나보다. 그러다가 입을 떼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엄마, 저 아무래도 어제 클래식음악듣고 뭔가가 있었나봐요. 이상한 마음이 내 속에 머물고 있다가 한꺼번에 다 나온것 같아요.
스스로도 자기가 왜 이렇게나 우는지 모르겠다던 아이, 마침내 스스로 이유를 찾아냈다더니 그 이유라 하는 말을 듣고 잠시 소름이 돋았다. 아.. 음악 감수성은 내 안에만 있는게 아니구나. 당연히 내 뱃속으로 나온 아이들이 이런걸 갖고 있으리라는 것을 왜 짐작도 못했지? 분명 안 좋아할테니, 어떻게든 '주입해야 할 대상'이라고만 여겼을까? 어쩌면 나보다 더 살아있는 작가들이 이네들일수가 있는데, 난 또 내 앞가림만 하느라 '내 공연, 내 감수성!! 내 티켓!! 나만의 예당!!" 이런거 하느라 그 소중한 걸 못 보고 있었나보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산다고 살아도 지가 키우고 있는 아이들에대해서 조차 한치도 깊이있게 파고들지 못하는 나의 얄팍하고 미천한 사색주머니가 너무도 옹색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옹색한 시간이 지나자 입꼬리가 쓱 올라가며 흐믓해진다. 아...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겠구나. 난 더 이상 고등학교 시절 '에초티와 젝키팬'인 친구들을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지 않는 나로 살겠구나.
이렇게 내 집에 내 감수성과 비슷한 인간들과 함께 거주할 수 있다니...
이때, 그 누구보다 제일 긴장하는 1인이 있었으니, 바로 5명의 최씨중에 내 뱃속을 거치지 않은 최씨다.
그는 내가 티케팅을 하고 굽신굽신 거리면서 티켓을 바치면 겨우 거드름피우며 팔짱을 내어주는 '쉽지 않은 음악 파트너'였다. 그리고 뉴욕데이트 시절부터 텍사스 사는 동안도 솔찮게 꽤 다닌 연주회중에 졸지 않은 날을 손에 꼽아야 할 정도로 늘 졸음 심한날엔 코콜이사운드까지 넣어주는 '똥매너 파트너', 하지만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유일한 동반자, 다른 옵션은 없기에 치사해도 늘 꾹 참고 잘 모시고 다녔었는데 이번 사건으로 자신의 자리가 안전하지 않다느 것을 강렬히 느꼈나보다. 갑자기 "아빠 졸았죠?" 하는 아들의 물음에 벼락처럼 "나 안졸았다!!!! 사람마다 음악을 감상하는 방식이라는 것이 있는거다!!" 대답이라기 보다는 화에 가까운 목소리로 크게 말했고, 일요일 아침 음악소리에 잠에서 깨보니 어제 들었던 작품을 재생해서 듣고있더니, 급기야 '음악감상문' 을 블로그에 쓰기까지.
그러게, 음악감상, 문화파트너도 '희소성의 가치'라는 경제 분문율에 한치의 벗어남이 없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