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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Aug 04. 2021

'내 감정을 지키는 일' 올림픽정신이다.

글의새 수요칼럼데이, 2020 됴쿄 올림픽 단상

역도 김수현 선수가 쇼셜스타로 탄생했다.

'역도선수'라는 기존의 이미지는 이미 여러선수가 탈피시켜 놓았지만 도전에 실패했다고 대놓고 소리지르고 우는 선수는 전무후무였다. 동메달 좌절이라는 결과를 앞에 자신의 억울한 감정을 모두 여실히 드러낸 김수현 선수는 전화위복이 되어 수십 국민의 응원의 메세지를 힘으로 다시 환히 웃는다.

올림픽 정신은 4년간 뼈를 갈아넣는 도전과 노력을 하루아침에 결판을 보는 잔인한 무대이기도, 그 잔인함이 인간으로서 최고의 긴장감과 생명력을 불어놓어 주기도 하는 스포츠의 꽃, 세계 최고의 무대다.

'양궁은 한국선수들이 메달은 다 나눠가진 다음 남은 메달을 두고 다른 나라 선수들이 겨루는 종목'이라는 양궁 종주국의 면모를 과시하는데 큰 몫을 한 안산선수의 시크함도 함께 화제다. 개인전 최종 결승을 판가름하는 슛오프 한발 앞에서 전세계가 긴장하고 손에 땀이 흥건했다. 그런데 세상에서 단 한사람 웃고있다. 정작 활시위를 든 안선수는 지금 마지막 한발에 금메달 획득여부가 달린 상황을 아는 사람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담담한 표정과 심지어는 웃음기까지 띤 얼굴로 코치와 짧게 담소를 나눈다. 그 짧은말 뭐였을까? 어떤 마음이면 저럴수가 있는지, 해설위원이 말이 내마음이다. 

그렇게 당긴 마지막 활 시위는 정확히 10포이트 라인 안쪽에 꽂혔다.



자신을 다 드러내면서 크게 울어버린 김수현 선수나 마지막 슛오프 상황에서도 편안한 웃음이 있는 안산선수 모두 이번 올림픽을 통해 '찐팬'들과의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전에 그저 티비속 세상과 매체 밖의 시청자, 마음으로 팬심의 관계 장막이 거두어진 것이다. 그 중심에 SNS가 있다. 쇼셜과 그닥 친하지 않는 나도 안산선수와 김제덕 선수의 매력에 빠져 인별그램계정을 바로 검색해 팔로우와 좋아요를 연신 눌렀다.

와, 김제덕 선수는 내 어렸을적 고향 예천중학교 출신임에 신기해하면서.

문득 나의 양궁과의 작은 인연으로 생각이 이어진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까이에서 본 양궁선수는 막내고모였다. 아이가 셋인 어느 부모님의 이혼 과정 그집 막내딸인 나는 경상북도 예천에 외할머니손에 맡겨졌다. 할머니는 당신의 둘째딸이 어린나이에 시집가 세 아이를 낳고 마음의 짐과 척박한 결혼환경을 이기지 못해 얻어온 병이 쓰리기도 속상하기도 해 어린 나를 앉혀두고 넋두리 같은 소리를 자주 하셨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내가 알 수 없는 크기의 아픔이다. 그렇게 둘째딸의 막내인 나를 거두면서 나의 유년시절은 외할머니와 또 언제부터 쓰러져계셨는지 가늠이 안되는 그의 친정엄마, 그러니까 증조외할머니까지 이렇게 3대 여자가 예천의 파란대문집에 함께 살았다. 그곳은 눈만 감으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르는 얼마전에 남편이 안내해줘서 직접 다녀온 그곳이다. 


그 시절 할머니의 막내딸 나의 막내고모는 예천고등학교 양궁선수였다. 쉬는 날이면 집에 왔다가 혼자 읽던 동화책이 너덜너덜해져 있는 어린 조카가 안쓰러웠던지 양궁연습장에 나를 데려가곤했다. 심판석처럼 만들어져 있는 높은 쇠의자에 나를 앉혀놓고 '구경하고 있어~' 라고 말하는 고모를 멀찍히 지켜보는게 내가 하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곳은 지금으로는 양궁의 전설이 만들어진 '예천고등학교' 양궁부였고, 지금은 그 옆에 '김진호 양궁장'이 마련된 것으로 알고 있다.

살다보니 분명, 있었던 일은 확실한데 문득 내 인생에 정말 그런일이 있었나? 싶은 일이 있다. 내 잠재는 분명 기억하고 있을 그날들의 일. 고모 얼굴이 잘 기억이 안난다. 여자치고 네모진 얼굴이었고 그 당시 김진호선수의 열풍시대였는지는 몰라도 KBS차량이 요란하게 학교 운동부촬영을 위해 달렸던 것을 본게 생생한 내 마지막 그림이다.


 



기자생활을 할 때 그 어떤 올림픽과 겹쳤던 시절 이런 마음이 한번 일렁인적이 있다. 나는 나의 고모가 김진호인줄만 알고 있었다. 나에게 실물로 본 유일한 양궁선수였고 나이나 상황이나 출신학교가 같았으니까. 그렇게 유명한 사람의 숨겨진 조카 코스프레를 사실도 아닌데 혼자 세상의 비밀인양 가지고 살던 20대의 나. 사방이 꽉 막힌 담벼락에 쌓여살던 시절이다. 앗, 지금도 그곳인가? 문득 두렵다. 아직 담벼락에 둘러쌓여 있으면서 마치 그곳으로부터 빠져 나온 마냥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상이 이렇게 자주 답답할 리가 없으니까.

도대체 무엇일까? 내 눈엔 보이지 않는 이 장벽은...


여튼 양궁고모는 지금 세 자녀들을 모두 시집장가보내고 고창어디쯤에 혼자 지내신다는 얘기를 친정언니를 통해 들었다. 언니는 자주 내 의사와 상관없이 소식을 전한다. 원치 않는 소식에는 생모의 소식도 포함이다. 사는곳, 생존여부, 그리고 나와의 대화를 원한다는 것, 보고 싶어한다는 것 최근에 큰 수술을 하게 되었다는 것까지 그녀 그리고 또 하나의 연락망 남편을 통해 자꾸만 알게 된다.

하지만 안다해도 그 요구에 응대하지 않는 나에게 그 누구도 나에게 손가락질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아빠회사 이모가 가끔 심하게 욕을 하긴 한다. "저 냉정한 것, 찔러도 파란 피 나올 X.."


오늘처럼 어떤 단서로 가끔 생각이 나고, 생각이 날때마다 1mm만큼 생각이 확장되긴 한다.  누구는 원망이냐, 미움이냐 묻지만 확실한 건 상대에 대한 감정이 아니다. 그 인생이라고 편했을까? 누구보다 아팠을 것이다. 그런 원망의 힘으로  똘똘 뭉쳐 살던 시기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진정코 많이 건너왔나보다. 나는 그저 나의 이 속도를 지켜주고 싶다. "어쩔수 없음주머니"에 꽉 차도록 넣어둘 수 밖에 없었던 기나긴  학창시절과 29살 끝자락까지 나를 괴롭히던 말로 다 못다하는 마음들을 보상해주는 유일한 나만의 방법이다. 그러니까, 이 글을 보고 있을 몇 안되는 그도 이런 나의 마음을 알아주어, 나를 사랑한다면 부디 억지스러운 연결로의 노력은 그만두어주었으면 한다.



다시 나의 현실로 돌아온다. 마음이 갑갑하니 오늘은 일을 하기 싫었다. '스텔라님도 글쓰기 싫은 날 있으세요?" 라고 글벗님이 물었을때 '그럼요!!. 매일 쓰기 싫어요" 라고 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보다 인간미 있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어서 더 호들갑떨면서 말했지만, 대부분의 날에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들지 않는다.  그러지 않고 20몇년을 한결같이 써올리가 없다. 밥은 안 먹어도 글을  쓰고 싶고 새벽에 도무지 안 일어나지던 나를 10년만에 프로새벽러로 만들어준것도 결국 글이다.

그런데 오늘 새벽 3시30분. 눈은 떴는데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그래서 책상아래 방바닥에 30분을 누워 멍하게 있었다.


순간 "솔직히 말하고 오늘 쨀까?" 칼럼 큐레이팅도 완전하게 해 놓지 않고 내 칼럼예시글도 못썼는데.... 그러다 스프링이 등에 달린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있다가 아이들끼고 마음편히 올림픽을 보며 늘어지려면 지금 이렇게 새벽의 내 일을 찝찝하게 처리해 두어서는 안된다. 또한 도쿄에서 매달앞에서도 옴짝달짝하지 않던 안산선수의 표정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리고 적어도 나이 두배쯤은 많은 이 언니가 부끄럽고 싶지는 않았다. 또한 고민하고 있는 문제에 있어서도 '이게 극복할일이지, 포기를 언급할 일인가?' 라는 큰 맥락으로 일단락 해두었다. 나를 믿어주기로 한거다.


그렇게 와다다다 써내려간 글로 5시전에 완벽에 가까운 예시칼럼을 써서 글벗들에게 전송 완료. 

앗, 그렇게 해 놓고 났는데 이번엔 내 글이 쓰기 싫다. 이 브런치글. 안쓴다고 아무도 나에게 뭐라안한다. 그래도 이렇게 한번 발빼면 핑계가 습관이 될까봐 두렵다. 새벽3시에 잠에서 깨어 모기때문에 간지럽다는 막내 손가락에 얼음을 발라 다시 재웠던 안방 침대에 간다. 우리집 현존하는 가장 쪼그맣고 하늘하늘 몰랑거리는 손을 슬며시 잡아본다. 욕심이 더 난다. 가만히 안아본다. 귀찮단다. 그래도 최대한 가까이 더 가까이 갈 수 없을만큼 막내를 품에 가득 안아본다. 귀고 볼이고 꽁치입술이고 귀여워 보이는 모든 곳에 입을 맞춘다. 우리 엄마도 나를 이렇게 키웠겠지? 이렇게 감상을 짜내보면 큰 수술하고 힘들어 있을 엄마라는 분께 문자메세지라도 보내는 나로 ? 어때? 스스로에게 딜을 슬그머니 던져보지만 이내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 젖는다. 나는 두말하지 않고 물러선다. 절대 두마음 채근하지도 않는다. 나는 누구보다 그녀를 잘 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내가 나를 지켜주는 방식이니 아무도 나에게 뭐라해선 안된다. 그런데 갑자기 조금 슬프다.




올림픽 정신, 칼럼으로 현실로 돌아오는것. 내가 해본 것중에 가장 도움이 된다. 현실속 막내딸을 직접 안아서 글쓰는 에너지를 수혈한 것 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제 더이상 초록창에 나오는 '인물정보'를 검색하지 않는다. 인별그램에 쉽게 접속해 내가 좋아하는 그 어린 선수의 '개인취향과 라이프스타일'을 보고 즐거워할 수 있는 쇼셜시대가 선수와 교감하는 방법이다. 궁금하면 알 도리가 있는 세상, 이 시대가 올림픽을 함께 하는 그들만의 소통관전 포인트가 무관중으로 진행되는 도쿄올림픽의 허전함을 달래준다.

205개국의 참가, 33개 종목 339개의 금메달이라는 규모에 '감동으로 우리들은 하나가 된다'는 공식슬로건으로 열린 세계 스포츠 축제, 올림픽은 기존의 취지와 반하는 상업성과 정치외교의 도구화라는 비평은 이들의 행보앞에서 무색하다. 스포츠에 생을 걸고 또 이런 생을 열열히 응원하는 관람객들에게는 그저 최선을 다해준 선수들에게서 최고의 에너지를 수혈받는다.

그들이 결과에 대해 대하는 태도도 조금 다르다. 그저 '최선을 다한 결과에 만족하고' 다음을 준비하겠다는 클리세는 없다. 눈물, 억울한 표효, 그리고 나의 최선에 대한 예의로 지고난 경기후에도 밝게 웃는 선수들 또 그 사이 신유빈 탁구선수의 '언니들에게 미안함'이라는 순수함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야말로 '경기 후기도 개인의 취향'따라서다.

올림픽을 손꼽아 기다리는 매니아적인 관림객중의 하나로서 '잘하면 내편, 못하면 남의 편'이라는 개인슬로건을 달고 혼자 승부에 요란하게 집착하는 '극성팬'이다. 나 때문에 같이 티비를 보는 우리집 아이들은 괴롭다. 조금이라도 질것같으면 채널을 넘기고 극적인 순간도 잘 보지 못해 평소에 하지도 않던 부엌 싱크대 정리를 다 했다. 국가대표팀 축구와 야구가 동시에 하던 날 덕에 우리 부엌은 깔끔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좋긴하다.


됴쿄올림픽은 여태 보아왔던 올림픽과는 크게 달라져 있음을 느낀다.

더 진솔하고 더 진정성이 느껴지며 그렇기에 감동이 일상으로 연결된다. 김수현 선수가 평소 좋아하는 가수가 '소셜계정을 통해 '밥한번 먹자' 했고 이에 대해 김선수는 '감독님께 심신단련운동이라 생각하고 다녀오겠다'며 지은 활짝핀 웃음이 티비를 끄고 난 내 마음에도 남아 일상에서도 길게 웃음짓게 한다.

그렇게 올림픽 어린선수들은 어른들에게 신선한 환기다. 승패가 죽기나 살기가 아니라 '그저 나의 일일뿐, 중요해서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까지 내 어찌할 수 없는 일' 혹은 '진짜 최선을 다했으니까 진짜 슬픔을 표현해도 된다'는 양가적인 태도에서 그들과 그들이 대표하는 Z세대가 보인다. 진정 자신의 인생을 사랑하고 그 안에 속한 선수라는 직업도 즐기고 있는 그들의 삶의 태도.

부러우면서도 '어쩌면 나도..' 일면은 따라 해보고 싶은 마음도 든다. 따라하고 싶은 삶의 태도, 조금 더 나의 감정에 솔직해도 될 것 같은 용기를 얻는다. 평소에는 배울 수 없던 드라마에는 없는 그런 '살아있는 정신'과 '더 가까이 실존하는 생활인으로서의 선수'를 보는 재미 그게 쇼셜형 올림픽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올림픽 스피릿의 원형이 아닐런지.

지난 한일전에 역전승이라는 반전드라마로 감동을 준 여자배구국가대표 선수들의 8강전 시합이 곧 열린다. 골프도 곧 시작이다. 나는 어쩌자고 이렇게 스포츠 메니아일까. 


이들을 잔뜩 응원할 마음에 비장해지기까지 한다. 다행이다. 오늘 새벽에 이렇게 하고싶은일, 할 수 있는 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냈으니 낮에 편히(?) 사남매끼고 올림픽 즐감 할 수 있겠다. 

올림픽 극성팬 @100일간의 새벽글쓰기 글의새 칼럼니스트 스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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