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인식, 망각곡선이 필요할 때
SNS로 부자되는 법의 저자이며 사업가 게리 바이너척이 그의 SNS에 올린 영상이 한때 화제가 됐다.
그 영상에서는 한 여자가 그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지칠때마다 강력한 위로가 될 말을 딱 세마디로 전해주세요"
이 말에 게리가 무엇이라 말했을까? 그 대답이 이 글의 제목이다.
당신은 언제가 죽습니다.
그는 '지금의 고통이 씨앗이다.' '언젠가 반드시 이겨낸다' '실패의 합이 성공이다' 등의
뻔한 위로를 집어던졌다. 그러게. '당신은 언제가 죽습니다.' 맞다. 나는 언젠가 죽는다.
죽음이라는 이 거대한 진실앞에 그 어떤 가치가 그 얼마나 크게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이 단순한 사실을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이 사실을 우린 얼마나 자주 잊어버리고 사는지 모른다. 어제 하루종일 한번이라고 기억했을까? 아니 최근 일주일 사이에 죽음을 생각할 일이 있었나?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을 똑똑히 구별하면서 너만의 한걸음 한걸음을 걸으라는 불경의 한 구절도 함께 떠오른다. 우리는 우주라는 이 광활하고도 가늠할 수 없이 넓은 세상에 티끌조차 안 되는 작은 존재라 한다. 이 사실이 나를 허망하게도, 나를 끝없이 자유롭게도 한다고 했던 홍정욱의 문구도 '아침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라는 김영민교수가 쓴 책 제목까지, 고구마줄기처럼 줄줄이 내 뇌에 출연한다.
내가 삶의 우선순위를 정할때 기준은 바로 이 '죽음'이었다. 나의 장례식장을 떠올리고 나를 애도하는 그들의 마음을 내가 전지적시점에서 모두 보고 느낄 수 있다 했을때 나는 어떻게 그들의 마음에 남고 싶은지.
첫째가 누군가가 책으로 써주고 싶을 만큼 열정적이고 진실된 삶을 살다간 '쓰는 사람'이고 싶었고 그 다음은 내가 세상에 내어놓은 자식들이 이런 부모의 영향을 받아 인류에 큰 쓰임이 있는 아이들로 성장해있는 모습, 그 아이들이 진심으로 엄마와 다시 우주 어딘가에서 만날것을 염원하는 그런 마음이길 바랬다.
그런데 살면서 자꾸만 잊어버린다. 잊지 않으려고 어제 브런치글에도 '망각이 최대의 적입니다'라고 글을 써놓고 짧은 하루안에도 얼마나 많은 망각곡선을 그리고 살았는지 모른다. 복습과 학습을 이야기할때 거의 대명사처럼 등판하는 '에빙의 망각곡선'은 인생이라는 과목을 복습하는데 더 유용히 써야 할 것 같다.
나는 참 에너지가 많은 사람이다. 그만큼 욕심도 많고 지는것도 싫어한다. 그 에너지는 때론 성취동력이 되고 또 때론 자폭의 근원지가 된다. 크게 욕망하고 크게 저지르며 또 크게 좌절하니까.
자식을 키우는데도 이 성향은 마찬가지다. 나는 내 배로 낳은 내 자식이지만 한번도 '나보다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네 아이를 차례대로 한명씩 내 눈앞에 두고 이 아이를 위해 죽어줄 수 있느냐?고 물으면 망설이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할거다. 아니 실제로 대신 죽을거다. 그리고 누가 내 새끼한테 총뿌리라도 겨눈다면 기꺼이 그 총뿌리를 내 머리에 가슴팍에 대신 꽂게 할 것이다. 사는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런데 대신 죽을수도 있는 아이가 내 삶보다 중요하다라고 말할 수 없다. 나는 내가 제일 중요하고 나만큼 중요한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 남편뿐이다. 미안하지만 자식들은 그 카테고리까지 들어올 수 없다.
어쩌면, 그 수많은 질문 '왜 그렇게 아이를 많이 낳았어요?' 내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의 답은 '그 카테고리가 명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식이 너무 중요하면 이 아이 키우기 어렵다는 시대에 둘만 낳고 겨우겨우 살았을나다. 목숨보다 사랑하지만 나보다는 중요하지 않기에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일궈가는데 좋은 본보기, 큰 힘이 되는 기둥이 되는 것을 나의 부모됨의 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뜨기 힘든 눈을 부벼 3시30분에 일어나 글을 쓴다. 글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매일 글쓰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가능하다. 100일동안 쓰겠다 했으면 100일을 다 채우는 엄마에너지가 당당함, 자신감으로 이어져 아이들은 그 에너지를 먹고 사는것이 아닐까?
어젠 훈련도 방학중이라 넘쳐나는 에너지를 주체 못해하는 둘째가 하루종일 눈에 거슬렸다. 이 아이의 속은 나를 많이 닮았기에 좋을때는 지구 끝까지 좋지만 안 좋을때는 스파크가 제일 많이 튄다. 누적된 나의 벼르고 있기는 저녁을 먹고나서 동생을 놀리던 상황에서 큰 불똥이 되어 그에게 던져졌다. 야구공을 들고 자꾸 던지듯이 동생을 위협하니, 싫다고 소리지르면서 표현하는 큰 목소리에 후크를 걸어 아이의 손목을 잡았다. 왜 자꾸 상대가 싫다는데 하는냐고, 그랬더니 이 녀석 힘이 부쩍 쎄진 자신을 믿었는지, 도발이 하고 싶었는지 잡힌 손목에 힘을 잔뜩 주며 나를 제압하려는 기세다. 이럴때 딱! 앉혀놓고 좋은 말로 '그렇게 하면 안 되는 이유'를 조곤조곤 얘기해줘야 하는 타임, 오은영박사님이 딱 떠오르는 타이밍이지만, 나란 엄마는 그게 도저히 잘 안된다.
그래서 서로 손목을 잡고 벌어진 이 힘싸움에서 순식간에 이 아이를 제압해 눕혀버리고 양손목을 결박했다. 그리고 눈을 똑바로 보면서 얘기했다. "내가 배려받고 싶은 대로 상대를 대해야 한다. 너의 즐거움을 위해 상대의 괴로움이 희생되어서는 안된다." 고.
말은 바른 말이었지만 그 말을 전달하는 우리 포즈는 세상에 없는 모자의 모습이다. 범인을 결박하거나 남녀의 로맨스의 극치일때나 나온다는 눕혀놓고 그 배위에 앉아 머리위로 팔을 올리고 양 손목 압박이라니.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후 아이를 다시 불렀다.
엄마가 순간 훈육이란 이름으로 물리적인 힘을 너무 쓴 것에 대해선 미안하다고 이 타이밍에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쉽사리 마음을 풀지 않는 아이에게 온갖 애교를 부리며 끌어안고 부비대는 우리를 보더니 남편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쇼도 이런 쇼가 없다면서.
그 와중에 아직은 아들에게 힘으로 밀리지 않은것에 안도한다. 이제 고학년이 되면서 더 본격적으로 야구선수 생활을 할 아이에게 힘이 붙는 일은 마흔이 넘고 생리불순이 시작된 엄마가 힘이 빠지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겠지. 하지만 버틸때까지 버텨볼거다. 매일 푸쉬업, 플랭크 새벽마다 하고 운동센터에 가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을것이다.
엄마가 이 세상에 없을때, 힘이 빠지던 어느날도 '아, 내가 중학교 졸업할때까지도 힘으로 이길 수 없던 엄마'를 떠올리며 누워서 손목결박당했다가 협상으로 12시까지 야구시합과 영화한편을 본 날들을 추억하며 다시 힘을 불끈 낼 수 있는 그런 존재로 남고 싶다.
오늘도 아이에게 이기고 싶거나, 쓸데없는 옹심이 올라오거나, 잘난체 하고 싶거나, 내 주장대로만 하고 싶거나, 괜히 이유없이 내 기분이 나쁜 태도로 변질되려고 할때 최대한 기억을 떠올리기를 도전한다.
"나는 언젠가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