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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텔라 Sep 06. 2021

글쓰기가 필요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

본명 벗고 필명으로 사는 이유

어느 한 커플은 분위기 있는 무드등을 켜놓고, 라면을 호호불어 먹으면서 와인을 곁들인다. 그 한걸음 뒤쯤엔 차려입은 예쁜 아가씨 셋이서 피자와 음료등을 먹으며 함께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햇빛에 비쳐 물결이 갈치 비늘처럼 반짝반짝 눈을 반쯤 감은채 반짝임에  그 황홀경에 취해본다. 취한김에 내 책 표지모델 냥이를 한강배경에 대고 몇 컷 찍다보니 어느덧 반짝이는 강의 표면엔 붉은 꽃빛이 내렸다.

하늘속엔 파란과 붉음과 투명이 섞여 넋을 놓을수밖에 없는 오묘함이 만들어졌다.


윤슬. 최근에 알게 된 이 단어가 마음에 들어와 콕 박혀 나갈 줄을 모른다. 강이나 바다가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표면이 빛하는데 그것이 한 단어로 있다는게 너무 신기하다.

 바로 윤슬이라는 순수 고유어.


"오빠, 나 개명할까봐."

"뭘로? 이미 본명아니라 필명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잖아"

"그거 말고, 진짜 내 이름을 법적으로 바꾸는거요."

"뭘로요?"

"윤슬. 어때요? 손윤슬 이쁘지? 어? 여보? 오빠!!!아아`~ 안들려??"

"......"


막연한 바램같은거다. 세계여행이나 건물주나 100쇄 찍은 베스트작가같은 꿈. 꼭 이루고는 싶지만 당장  뭘 어째야 할 지는 모르겠는 막연한 꿈. 개명을 하고 싶지만 그 귀차니즘을 뚫어낼 만큼 절실한 바람인지.. 다시한번 생각해보란 남편 말에 다시한번 생각해보니 솔직히 귀찮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걸 보니 그만큼 절실한 사안은 아닌걸로. 그러게, 왠만큼의 절실함이 아니면 이뤄낼 수 없는 것이 저절로 되는 것보다 많음을 알아가는게 나이듦인가보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이름을 거꾸로 따라한 것 같아서 안된단다.

그냥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는 단어로 남겨야지 내 이름으로 만들어 소유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도 얻었다.





"스텔라라는 이름을 굳이 쓰시는 이유가 있으세요?"

"권귀헌 작가님과 함께 10주동안 글쓰기 모임을 했던 여성센터에서 에세이 집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에 그곳을 다녀왔다. 가을볕이 좋은 신나는 금요일. 간김에 수업을 함께 했던 윤주님과 만나 커피한잔을 하기로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녀가 물은 말이다. 그 물음엔 "아.  저는 제 본명을 별로 안 좋아해서요" 라고 얼버무리고 집에 오는길에 다시 한번 이 말을 꺼내 곱씹어본다.


그러게. 나 왜 출판사에서 작가님 본명으로 출판할까요, 필명으로 할까요 했을때 필명을 선택했을까.

낳아준 엄마, 키워준 부모님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나는 결혼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인것 같다. 29살 우리나라에 무사히 안착한 어른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혹은 포기당하고 한국을 떠나 미국을 갈때 그곳에서 쓸 이름에 엄청나게 신중하게 마음을 모았다. 돋보기로 햇빛을 모으듯 내가 아는 모든 미국여자 이름을 선별해놓고 하나하나 내리 쪼아봤다. 어떤 이름이 도깨비의 필적처럼 '이게 니 이름이다' 라고 시그널을 주며 도깨비의 필적처럼 타오를까.


이름을 신중하게 고르려다 보니 내 삶을 관통하는 주제는 뭘까? 나는 왜 태어났을까? 라는 원천적인 질문으로 다시 되돌아갔다.  나는 그저 나로서 빛나고 싶었고 가을바다에 큰 별이라는 사주풀이가 마음을 사로잡혀 '별'이란 어원이 든 스텔라로 이름을 정했다. 반짝이는 것이라면 사족을 못쓰고 좋아하던 오래된 습성에도 어떤 이유가 있었겠지 싶기도 했다.


그 이후 난 스텔라로 살았고, 연애를 하고, 손지선으로 돌아와 결혼이라는 거대한 관문을 건너 텍사스에 스텔라 새댁으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나서는 쭉 스텔라로 살아온것 같다. 마치 손지선으로 살았던 때는 없었던 사람처럼, 신분을 세탁하고 제 2의 인생을 다시 사는 사람처럼.

내가 글을 쓰는 내용의 대부분은 스텔라시절에 고민하고, 애썼던 흔적이니 스텔라로 책을 냄이 마땅한것만 같았나보다. 그리고 그럴만한 이유까지도 없는데 결국 대면대면 거의 남인듯 살게 되어버린 아빠가 준 이름. 괜히 이 이름으로 사는게 불편하다. 나름 행복하고 의리있는 원가족이지만 난 끊임없이 그곳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꿈꾼다. 여전히 해결하지 못해 하루에도 몇번씩 마음의 롤러코스터를 탔다고 마음이 저 아래로 쿵 떨어지는 기분속에 헤매이고 있지만 언젠가 완전한 평온을 얻을 수 있으리라 오늘도 꿈꾼다.




주말내내 근거도 없이 시작해 또 도져버린 '기절적 우울증'과 싸우면서 네아이와 동거동락하면서 머리속으로 다시 원점질문을 나에게 해댔다.


 "내 삶을 관통하는 주제가 뭐고, 지금 그 주제에 맞게 잘 살고 있는거니?" 이놈의 자기검은렬 지겨울만도 한데 지치지도 않는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머리속은 하루종일 꿈을 그렸다가 지우고 꿈을 이루기 위해 할일을 적었다가 귀차니즘에 패배하고 만다. 내 자신이 해낼 수 있을까 의심하고 의심차 않으려 고개를 털고 그러다가 내 눈앞에 당장의 현실인 월요 새벽글 큐레이팅이 걱정된다. 일요일 밤이 되어서야 오래전 잊혀졌던 책을 하나 꺼내들었다.


제목이 내 눈을 확 사로잡았다.

김애리작가의 '글쓰기가 필요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


그래그래. 글쓰기가 필요하지 않는 인생은 없듯, 주제나 의미가 없는 인생도 있을리가 없다. 모두 저마다 별이고 그 별마다 지구별로 내려온 의미가 있는 사람들. 문득, 이 새벽마다 그 힘든 글 등산을 군말없이 해내는 글벗들이 감개무량하게 다가온다.  우린 모두 글을 쓰기로 결심했고 그것을 지켜나가는 것은 끝내 내가 주인공인 삶으로 바꿔내고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지는 글감옥 자발적감옥의 동료들이다. 다시 한번 그렇게 다진 우리의 이 의지만 있다면 못해낼 것이 없을꺼란 자신감이 문득 올라온다.


애정하는 글벗님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명사에 멈출 사람이 아니라고 '쓰는 사람'이라는 동사에 나를 다시 잘 갖다 놓기만 하면 모든 고민은 다시 제자리를 찾고 나는 다시 내 갈길을 잘 갈 수 있을꺼라고.

아... 힘들어도 글감옥 만들어 놓기를 얼마나 잘했는가. 이 죄수친구들이 얼마나 자주 교도관의 코끝을 찡하게 하는가 말이다. 내가 네 아이 낳은것 다음에 잘한 일이 책내는 일일줄 알았는데, 아니고 글감옥을 만들어 낸 일어었다는 것. 그리고 이 새벽글감옥의  들어갈 땐 매번 들어가기 싫어도 (특히 주말지난 월요일) 다녀오면 완전 대자유인이 된 기분으로 일상을 살 수 있다는 감사함이 마구 피어오른다.


출소하고 두부는 먹을 필요가 없다. 자발적으로 내일 새벽이면 다시 글등산을 자청할테니까.

또 글감옥에서 느낀 뻐근한 감동이 일상을 살게 하는 힘, 나의 모든 삶의 의미를 한 궤로 꿰어주는 역할을 한다는 직관이 나를 놓아주지 않을테니 말이다.

누구라도 이렇지 않을까.? 자신의 삶을 설명해줄 한 줄의 주제를 찾기 위해 서로를 독려하는 곳. 그 길로 가는 최고의 수단 글쓰기. 그렇게 연대된 글벗. 참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정말이지, 글쓰기가 필요하지 않은 인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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