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일상]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모르는 사람의 목소리가 귀에 들려왔다.
"저, 우산 같이 쓰고 가실래요?"
버스에서 내려 몇 걸음 걷자마자 비가 쏟아졌다. 평소엔 잘 타지도 않는 버스를 부러 탔는데 하필 날씨가 변덕이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비를 피할 곳은 보이지 않고, 빗줄기는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점점 거세졌다.
앞으로도 뒤로도 답이 없다면, 세탁기에서 막 꺼낸 빨래처럼 젖을 수밖에. 그저 느린 다리나마 재촉하고 있을 때 앳된 목소리가 나를 불러 세웠다. 뒤를 돌아보니 목소리에 어울리는 말간 얼굴의 여학생이 우산을 들고 있었다. 여학생은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얼른 나에게 와 우산을 씌워주었다.
"어머, 감사해요. 갑자기 비가 와서."
내게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가 낯선 일은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는 처음이었다. 바로 앞의 고등학교에 다닌다는 그녀는 전에도 이렇게 우산을 씌워준 적이 있다고 했다. 교복을 입은 학생이라 경계가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숨을 돌리자 이내 험악한 상상이 머리를 채웠다.
하지만 쑥스러운 듯 웃으며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그녀와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금세 그런 상상을 한 것이 민망해졌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지나 우리 집 현관까지 나를 데려다준 그녀에게 가방에 있던 간식을 건넸다. 친구가 집에 와 준 것이 고맙다고 챙겨준 간식이었다. 친구의 다정함 덕에 그녀의 다정함에 보답할 수 있었다. 역시 다정함에는 전염성이 있다.
물론 어떤 이는 그녀에게 오지랖이 넓다며, 다그칠지도 모른다. 좋은 소리 못 들을 수도 있는데 왜 나서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지랖이라면 일가견이 있는 나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다른 부서 사람들이 하는 소리는 기본, 심지어 엘리베이터에서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인다. 귀에 들려오는 이야기를 수집하고 보는 습관은 글을 쓰며 더 심해졌다.
이미 들어버린 이야기 속에 내가 도와줄 일이 있으면 입이 간질거린다. 꾹꾹 눌러 담은 봉투가 기어코 터지는 것처럼 입 안의 말이 결국 세상으로 나간다. 참지 못한 오지랖이 타인의 미소가 되어 돌아오는 순간, 그 순간 때문에 내 오지랖은 좁아지지 않는다. 대신 내 나름대로 원칙을 세웠다. 오지랖은 꼭 허락 맡고 부릴 것! 아무리 달콤한 간식이라도 먹고 싶지 않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오지랖은 한복에서 겉옷의 앞자락을 뜻하는 말이다. 오지랖이 넓으면 앞자락이 다른 자락을 많이 덮게 되는데, 이것을 흔히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범한다는 뜻으로 비유하곤 한다. 자기 자리를 넘어온 자락은 당연히 거슬리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그 거슬렸던 자락 때문에 한 겹 더 따듯해지는 날이 있다.
타인이 마냥 친절할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세상임을 안다. 때로는 예보 없이 내리는 비처럼 타인의 악의가 갑자기 나를 덮치기도 한다. 그렇기에 항상 날씨가 맑기를 바라며, 우산 없이 살아야 한다는 말을 쉽게 나오진 않는다.
그래도, 그래도 가끔은 우산 없이 집을 나서고 싶다. 갑작스러운 비를 막아준 우산에 담긴 뜻밖의 다정함이 너무나 달콤해서.
나처럼 우산 없이 걷는 이에게 우산을 씌워주고 싶다. 달콤한 다정의 맛을 그에게도 알려주고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