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처럼 카페에 갔다 집에 들어오는데, 집 문고리에 작은 봉투가 걸려있었다. 내일부터 윗위층에 인테리어 공사가 예정되어 있어 양해를 구하는 메모였다. 엘리베이터에 붙어있는 안내문을 보기는 했지만, 직접 쓴 손글씨와 쓰레기봉투, 그리고 작은 간식을 보자 좋은 이웃이 이사 온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바로 아래층도 아닌데 이렇게 메모를 남기다니, 이사 준비에 고생이 많아 보였다. 손글씨에서 묻어나는 정성에 살짝 미소가 지어졌고, 사진으로 남기기도 했다.
기분 좋은 감동도 잠시, 다음 날 아침 ‘쿵, 쿵’ 소리와 함께 잠에서 깼다. 잠을 깨우긴 했지만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쿵 소리는 참을 만했다. '그래, 전체 인테리어라고 하니 저 정도 소음은 예상했어.' 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내 일에 몰입하려 했다. 원래 소음에 크게 신경 쓰는 편도 아니고, 이사 온 날부터 꾸준히 들려온 윗집의 생활소음도 그러려니 넘겨왔던 터였다. 그런데 한 시간쯤 지났을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드릴 소리가 ‘두두두’ 귀를 울려왔다. 집 안 어느 공간에서도 그 소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마치 우리 집에서 공사를 하는 것처럼 소리가 온 공간을 뒤흔들었다. 애써 텔레비전 소리를 키워봤지만, 화면 속 연예인들의 목소리가 오히려 그 소음에 묻혀 희미해졌다.
대피, 대피가 필요했다. 원래는 점심을 먹고 느긋하게 서너 시쯤 카페로 향할 일정이었지만, 헐레벌떡 집을 나서기로 했다. 화장실 철거가 진행 중인지 씻는 동안에도 소음은 나를 따라왔다. 물소리조차 드릴 소리에 삼켜질 것 같았다. 소리란 참 무서운 것이구나. 층간소음쯤 그냥 무던히 넘길 수 있다고 자부했건만, 막상 내 일이 되니 달랐다. 오만했던 과거의 나를 반성하며 아파트를 나서자, 고요함이 내게 평화를 주었다. 엘리베이터까지도 쫓아오던 소음은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드디어 나를 놔주었고, 쌓였던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사실 거리는 고요하지 않다. 차 소리, 사람들의 대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까지 여러 소리로 가득하다. 그렇지만 그 소리들은 조화롭다. 모든 것을 무섭게 집어삼키는 공사 소음과 달리, 자연의 소리와 사람의 소리는 사이사이 여유가 있다.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들어선 무인카페에는 손님이 한 명도 없었다. 평소에는 카페에 사람 소리가 들려오는 걸 좋아하는 편이지만, 오늘만큼은 이 정적을 잠시 즐겨보기로 했다. 내 몸 움직이는 소리와 키오스크의 안내음만이 귀를 채웠다. 커피 머신이 윙윙거리는 소리마저도 어쩐지 듣기 좋았다.
삼십 분쯤 지나자 이제 제법 얼굴이 익은 카페의 단골들과 지나가는 객들이 자리를 채웠다. 다시 카페는 말소리로 시끌시끌해졌지만, 나는 이미 평화를 찾았다. 때로는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던 고요함도 선물이 될 수 있구나, 깨달았다. 마치 내 등을 떠밀 듯 울려온 공사 소음 덕분에 오늘은 며칠간 붙잡고 있던 소설도 마무리하고, 이렇게 오늘에 대한 감상도 쓰게 되었다. 시끄러운 드릴 소리가 오히려 나를 밖으로 이끌어준 셈이다.
나쁘기만 한 일은 없다. 덕분에 평소보다 조금 더 오랜 시간 밖에 머무르며 미뤄왔던 일들을 모두 해치웠다. 물론 다음 주부터는 이 소음이 조금 줄어들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지만, 그래도 뜻하지 않은 오늘의 긴 외출은 내게 제법 괜찮은 하루를 만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