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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짧은일상

[짧은 일상] 잠시 머무는 것들

by 시은

우리 아파트 단지 앞에는 벚꽃나무도 몇 그루 있지만, 이름 모르는 꽃나무도 하나 있다. 벚꽃보다 조금 일찍 만개하는 하얀 꽃나무는 우리 아파트에서 내가 퍽 좋아하는 점들 중에 하나다. 꽃나무 주변에 작은 놀이터가 있어 아이들이 떠드는 모습을 구경할 수도 있고,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내가 요즘 자주 찾는 조용한 무인카페도 있으니 꽃나무를 중심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셈이다.


벚꽃처럼 화려하지는 않고, 이름도 모르는 한그루의 나무일뿐이지만 순백의 하얀 꽃이 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은 언제나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 나무를 지나칠 때면, 잠깐 멈춰 서서 꽃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을 눈에 담기도 하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 남기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 뜻밖의 비로 인해 꽃나무가 상처를 입었다. 내리는 비에 무슨 죄가 있으랴. 제 나름의 의무를 다해야 해서 내리는 비겠지만, 꽃이 피는 시기에는 때로 내리는 물방울에게 괜히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오늘도 예상치 못한 비에 우산을 챙겨 현관을 나서며 "아, 꽃이 지겠구나" 생각하니, 마치 누군가 내가 열심히 그린 그림 위에 무신경하게 물을 흘리기라도 한 것처럼 섭섭한 마음을 느껴버렸다.


빗줄기가 세지 않아 혹시나 잘 버텨주고 있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기대가 무색하게도 꽃나무는 비에 젖어 축 늘어져 있고, 꽃나무 아래 아스팔트에는 하얀 꽃잎들이 초라하게 쓰러져 있었다. 내일이 되어 다시 해가 비추어도 어제처럼 풍성한 아름다움을 빛내긴 어려울 게 분명했다. 한 번 스러진 아름다움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 빈자리가 마음 한구석을 허전하게 채웠다. 이름도 모르는 꽃나무가 지는 일이 이렇게 마음을 흔드는 이유는, 미처 채 즐기지 못한 올해의 봄이 떠나버린 것 같아서일까?


짧게 지나치고 말기에 아름답고, 그래서 아쉬운 존재들이 있다. 빠르게 지고 마는 꽃들, 다시 돌아오지 않는 어린 시절, 혹은 내가 사랑했던 어떤 순간과 인연들. 그 모든 순간들은 언젠가 비가 내리면 흔적만 남기고 흩어지고 만다. 다음 봄에도 이 나무가 다시 꽃을 피우겠지만, 새로운 인연도 나를 찾아오겠지만, 그래도 오늘만큼은 꽃이 졌음을 아쉬워하며 보내고 싶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존재들을 사랑하고, 그 빈자리를 오래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나약한 마음을 받아들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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