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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하룻 Mar 04. 2024

증상(symptom)_상실

뭐가 얼마나 잘못돼야 다 때려치울 수 있을까. (중)

요즘 대하사극 고려거란전쟁이 절찬리 방영 중이다. 드라마는 거란군이 고려 백성을 인간방패 삼아 흥화진성으로 돌격해 올 때 고려 최고의 장군 양규가 눈물을 흘리며 공격을 명하는 가슴 아픈 명장면을 연출한다.

여기서 잠깐, 내가 만약 이 시대로 돌아갔다면 나는 어떤 역할을 하고 있을까?

이런 허무맹랑한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증상과 진행

<자아의 상실>

출근 시간 여의도역 5번 출구는 항상 막힌다. 5번 출구로 통하는 하나뿐인 경로인 에스컬레이터로부터 9호선 개찰구까지는 과학책에서 본 인간의 소장과 대장 모양으로 구불구불 길고 빽빽한 줄이 매일 형성된다. 그날도 나는 그 줄의 일부를 구성하며 20m에 달하는 긴 에스컬레이터에 실려 올라가고 있었다. 비로소 파란 하늘과 양쪽으로 늘어선 초고층 빌딩이 보이던 그때,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저 높고 휘황찬란한 빌딩, 거침없이 분주한 금융시장, 번영하고 불온한 이 사회..
내가 동경하면서 증오하는 이 시스템 속에서 나의 역할은 무엇일까? 


인간의 역사는 인간 집단의 행동과 사건, 일상을 통해 구성되어 번영하고 쇠퇴한다. 어떤 인간은 자신의 주체적인 판단에 따라 행동하며 역사에 크고 작은 자국을 남기고, 어떤 인간은 큰 역사의 큰 기류 속에 휩쓸리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 시대에도 양규와 같이 눈물을 머금고 활시위를 당기는 자가 있다면, 거란군에 잡혀 인간방패가 되어 매달린 자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나는 양규나 이순신이 아니란 것을. 나는 조선시대라면 삼정의 문란에 세금 내느라 일생을 바쳤던 양민, 세계 7대 불가사의가 될 줄도 모르고 피라미드를 지은 노예! 역사를 공부하면서 불쌍하다, 이 시대에 태어나서 다행이라며 동정했던 바로 그 '원 오브 댐'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역사에 업적을 남기는 것과 같이 위대한 것이 아니다. 다만 지금 이 순간마저 인간 역사의 한 페이지라면 나라는 존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인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 내가 만드는 것이 바다인지, 괴물인지, 피라미드인지도 모르고 끔찍하거나 혹은 융성한 역사를 구성해내고 싶지 않다. 내 역할이 작던 크던, 그것이 옳건 그르건 간에, 나의 가치관을 가지고 내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내가 인간으로서 내게 기대하는 최소한의 소명이다. 




원래 나는 취향과 가치관이 뚜렷한 편이었다. 다만 직장 생활과 함께 나의 선택에 내 취향은 점차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사회에는 안 보이는 규칙이 많았다. 비즈니스~로 통칭되는 의상과 소품, 그들과 원활하게 소통하기 위해 향유해야 하는 음식과 취향, 스포츠까지 대부분 일률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드는 가치관이나 취향도 있었지만 나는 세상에서 내 자리를 얻고 싶었고 위화감 없이 그들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새로운 양식을 최대한 받아들이려 애썼다. 다만 새로 익힌 것들은 어딘가 모르게 어색하고 방금 익힌 티가 났고 쉬이 내 것이 되지 못했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내 것도 잃어버리고 어느 순간 방향성을 잃고 부유하게 되었다. 


퇴사를 결정하기 전 나와 동료는 우리 스스로를 '문화가 없는 인간'이라 칭하며 공감했다. 어떤 사회가 정치와 경제가 활발하게 돌아가도 문화가 없는 사회는 지속되기 힘들 것이다. 우리 역시 우리 스스로가 지속되기 힘들다고 느꼈다. 우리는 기쁨을 느끼고 슬픔과 좌절을 치유할 힘이 부족했다. 소명을 다하지 못한 인간의 겪는 자아의 상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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