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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하룻 Mar 11. 2024

증상(Symptom)_고장

뭐가 얼마나 잘못돼야 다 때려치울 수 있을까. (하)

'번아웃'이란 말이 흔히 들린다. 너무 흔해서 유행처럼 쓰인다고 생각했다. 나는 명백한 번아웃 증상으로 휴직과 퇴사의 과정을 거치면서도 스스로 '번아웃'이라고 명명하지 못했다. 인간의 의지와 정신력을 믿는 건실한 청년으로서 '의지만능론'은 인생의 대전제였다. 내면화된 노예근성은 스스로를 혹독하게 대하는데 익숙한 나머지 나의 능력과 의지를 의심할지언대전제만은 의심하지 못했다.


번아웃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엉망으로 고장 냈다. 몸의 고장도 이래저래 고달팠지만 나를 멈추게 했던 가장 큰 충격은 기억의 고장이었다.

 



증상과 진행

<기억의 고장>

말은 못 했지만 '나이 서른에 치매가 온 건가'하고 생각했다. 

이상하게 부엌이 훈훈해 둘러보다 몇 시간째 켜져 있는 가스레인지 불을 발견했다. 저녁에 라면을 끓여 먹고 여태 끄지 않은 것이다. 음식점이나 화장실에 휴대폰을 홀연히 두고 몸만 총총 오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엄마의 잔소리를 불러오던 아빠의 건망증을 떠올리며 열성 유전을 의심해봤다. 남들보다 뇌의 노화가 일찍 오는 건가 생각도 했다.

회사에서의 파장도 심상치 않았다. 매일 쏟아지는 수많은 업무와 정보들이 머릿속에서 축적되지 못하고, 밀물과 썰물처럼 쓸려 왔다 분주히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프로젝트의 메인 담당자로서 중요한 순간에 숫자가 갑자기 기억이 안 나거나, 매번 하던 업무 절차가 머릿속에서 감쪽같이 사라지곤 했다. 


일이 너무 많으니 마음이 급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차분히 하고 정신을 집중하면 괜찮을 거라고. 하지만 안 괜찮았다.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반복되고 종종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더욱이 그런 나를 스스로가 용납하기 힘들었다. 




퇴사의 사유를 상사에게 어렵게 입을 뗐다.

나 : 처리해야 할 일이 동시에 쏟아지고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런지 어느 순간 기억이 잘 안 나기 시작했어요. 애써 쌓아 온 평판과 팀에 영향을 주기 전에 좀 쉬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상사 : 과장이 벌써 그러면 어떡하냐. 직급 올라가면 스트레스랑 신경 쓸건 더 많아지는데.. 쯧.

나의 어려운 고백을 상사는 나의 capacity 문제로 일축했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혔다. 



나의 번아웃은 그렇게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시작되고 끝났다. 사람들은 단순히 일이 많아서 번아웃이 온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니다. 번아웃은 '몰이해'에서 온다. 버거워도 버겁다고 말할 수 없는, 최선을 다해도 인정해주지 않는, 서로의 수고를 의심하고, 항상 평가하며 존재 가치를 따지는 사회에 소속되어 있다면 번아웃은 정해진 수순이다.


따라서 만약 당신이 번아웃을 의심하고 있다면, 스스로 먼저 이해해 주길 바란다. 당신은 너무 열심히, 잘 살았기 때문에 지친 것이다. 그럴만했다. 당신의 능력과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고 도닥여주자.


나의 집나갔던 기억력은 돌아왔다. 금세는 아니었고 1년 정도 쉬고 나니 어느새 돌아와 있었다. 그러니 그것 또한 걱정하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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