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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하룻 Mar 25. 2024

탈(脫)직장과 자유의 귀환

그리고 권태

직장인으로 산다는 건 급여와 개인의 자유를 교환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직장의 기능을 ‘급여’라고 단순화하기에는 사람에 따라 소속감, 성취감 등 플러스알파(+a)적 의미가 더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에게 직장은 급여를 얻기 위한 경제적 기능이 크고 그것을 위해 인생 대부분의 시간과 자원을 저당 잡힌다.

이상적으로 하루 8시간 일을 한다고 해도 대부분이 출퇴근에 1-2시간을 소요하고 출퇴근을 준비하기 위해서도 1-2시간을 사용한다. 하루 절반의 시간을 직장을 다니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은 하루에서 제일 유용한 시간대, 즉 해가 뜬 아침부터 저녁까지이고, 개인 시간은 해가 뜨기 전이나 저문 후에나 주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갓생살기를 외치며 아침형 인간을 되는 방법을 모색하거나, 낮동안 소진된 에너지를 끌어올려 가족들과 화목한 저녁 시간을 보내며 ‘워라밸’을 찾는다. 

조금 더 확장하여 인생의 관점에서는 어떨까? 우리는 바람직한 사회인이 되기 위해서 어린아이 때부터 부지런히 교육받는다. 이후 가장 건강하고 빛나는, 이르자면 인생에서 가장 유용한 시기인 20대부터 50대에 직장인으로 산다. 정년을 채워 은퇴를 하면 여행도 하고 내 시간도 보내야지 하면 몸 이곳저곳이 고장 나있다. 여행을 가도 마음껏 걷고 뛰고 먹을 수도 없는 것이다.

8시간 일하고, 워라밸도 있고, 정년을 채워 은퇴한 후 여행 다니는 삶. 어쩌면 이 시대의 성공적인 삶을 묘사했다고 해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어딘가 잘못된 것 같지 않은가?




내게 퇴사는 자유의 귀환이었다. 돌아온 자유를 벅차게 실감한 건 생리날이었다. 아랫배부터 뭉근하게 시작해서 허리 뒤쪽까지 뻗쳐오르는 통증은 매 생리 첫날 내게 찾아오는 생리통 증상이다. 익숙하게 우먼스 타이레놀을 한알 까려다 멈췄다. 대신 온수매트를 켠 뒤 다시 침대 안으로 들어갔다. 포근한 이불속으로 따뜻한 기운이 들어차자 통증이 조금씩 나아지는 듯했다. 순간 굉장히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로소 '이게 자유구나!'하고 실감했다. 아픈 내 몸을 잠시 뉘어 쉬게 해 줄 수 있다는 것.

회사를 다닐 때는 생리통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 통증이 찾아올세라 진통제를 먹었기 때문이다. 처리할 일도 스트레스도 산더미인데 생리통까지 지켜봐 줄 여유가 없었다. 아프면 한알, 더 아프면 두 알을 먹었다. 몸이 무겁고 힘든 것 어쩔 수 없었지만 통증은 없어졌기 때문에 온전한 직장인으로서의 기능을 다할 수 있었다.


내 발도 자유를 찾았다. 회사를 다닐 때는 주로 높은 힐이 있는 구두를 신었고, 아니더라도 단화나 플랫슈즈를 신었다. 회사에 있는 시간이 워낙 길다 보니 다른 신발은 많지 않았다. 회사를 쉬게 되면서 등산을 다니기 위해 발이 편하다는 트레킹화를 구매했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신발이 걷는 것에 도움을 주는 물건이라는 걸 깨달았다. 회사에서 TPO를 지키고 나를 세련되게 포장하기 위해 선택했던 신발들은 언제나 내 발을 옥죄고 지치게 했었다. 나는 그 트레킹화를 같은 것으로 하나 더 구매하여 뒤꿈치가 닳도록 매일 신는다.

내 배도 비로소 숨 쉬고 있다. 회사를 다닐 때 나는 소화불량을 달고 살았다. 몸에 꼭 맞아 허리선을 잡아주는 옷은 전문적이고 단정한 느낌을 주었겠지만 자세를 늘 바르고 꼿꼿하게 해야 했다. 속이 더부룩하고 소화가 안 되는 건 체질이 바뀐 탓인가 했다. 회사를 쉬면서 편한 옷을 입으니 밥 한 그릇이 거뜬히 먹어지고 소화도 잘 되는 것이 새삼스레 신기했다.

직장생활을 잘, 무사히 하기 위해 우리는 불편한 옷과 구두를 당연스럽게 선택한다. 회사를 다닐 때 나는 그것이 내 취향이라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벗어나 보니 그것들은 나 스스로 나의 선택이라고 포장한 사회적 요구의 반영에 불과했다. 그 제약이 없어지자 망설임 없이 내 몸과 마음은 다른 방향을 선택했다.




그 외에도 보고 싶은 드라마나 영화를 유튜브 요약, 결말포함으로 보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내가 사는 도시의 인프라(쇼핑몰, 한강, 맛집)를 사람이 붐비지 않는 시간대에 나 홀로 즐길 때는 왜인지 부자가 된 기분도 들었다. 비 오고 추운 날은 온종일 귤 까먹으며 이불속에서 책을 읽었고 내가 좋아하고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만 만날 수 있어서 행복했다. 엄마가 갑작스레 수술로 입원하셨을 때 다른 걱정 않고 옆에서 간호할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이 모든 것들을 놓치고 있었던 시간이 아깝고 지금이라도 자유를 되찾아서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행복을 느끼는 순간이 쌓이자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고 문득 친절하고 싶은 마음이 불쑥불쑥 들어서 나 자신이 우스웠고 동시에 안도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회사를 다닐 때는 괜히 심통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들어 참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땐 내가 성악설에 부합하는 사람인가 생각했는데 그 반대 마음도 드는 걸 보니 적어도 중간은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하지만 행복의 강도도 서서히 옅어져 갔다. 불행하지는 않았지만 권태로웠다. 인생은 고통스럽거나 권태롭다는 쇼펜하우어의 말에 격렬히 공감했다. 회사를 다닐 때는 불행해하더니 회사를 그만두니 권태로워하는구나. 나라는 인간을 데리고 살기가 참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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