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든 생각

감사 일기

by 이덕준

1


어제 든 생각


일을 하면 낯 선 사람을 많이 만나게 된다. 나는 전생에 어떤 삶을 살았길래, 이렇게도 많은 사람들과 손끝이 스치는 일을 할까. 그래서 손님을 만날 때마다 괜히 반갑고 웃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 막상 만나는 사람들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심지어는 불쾌하기까지 한 경험을 종종 하게 된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렇다. 어떤 날에는 그게 너무 불쾌하고 속상해서 소위 말하는 현타가 오는 날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손님을 만난 날.


한 중년의 멀끔한 남자(나는 이런 사람들을 젠틀한 상놈이라고 부른다)가 담배를 두 보루 들고 왔다. 담배는 1인 1보루까지가 구매한도라, 해당 사항을 고지했다. 그러자 그 멀끔한 남자는 대뜸, 아씨, 멀리 있는데 언제 오라고 해서 결제를 해! 하고 버럭 했다. 그리고 내가 한 보루를 먼저 결제할 건지를 묻자 그 남성은

아씨, 뭔 결제를 해! 하며 나를 돌아보고 소리쳤다. 그 순간, 나는 말 못 할 수치심이 느껴져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고 몸을 돌려 바로 다른 일을 했다. 다행히 그 손님 뒤에 다른 손님은 없었고 내 뒤에는 정리를 기다리는 담배 박스가 쌓여 있었다.


잠시 뒤 그 손님은 다른 직원의 응대로 담배 두 보루를 결국 결제를 하는데, 나더러 저 이상한 여자는 자기한테 화낸 것도 아닌데 왜 저러냐고 말했다. 사람의 눈을 쳐다보며 하는 혼잣말이 있던가. 그리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이벤트는 꽤나 자주 발생하는 흔한 일인데 이런 일의 반복이 반복되면 될수록 나도 사람에 대한 정이나 신뢰가 떨어져서 사람들을 쳐다보지 않고 여권이나 카드의 이름만 보고 제품의 개수만 세며 결제를 마무리하게 된다. 기계처럼. 이렇게 일을 하고 있으면 기계가 된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사람들의 눈을 바라보고 일한다. 나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다. 누구보다도 나에게.


그러나 그런 일들은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겠다. 진짜 일은, 정말로 서글픈 일은 애정을 가지고 어느 정도 신뢰가 쌓인 대상에게서 수치심을 느낄 때가 아닐까. 아무리 내 상태가 어떤지 이야기를 해도 전혀 알고 싶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은 남편이나, 무심코 상처를 주는 지인들을 보면 이 낯선 사람들의 날 선 말은 상처받을 거리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감사 일기를 쓰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사실 감사할 만한 게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문득문득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들어버린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잦은 상처에 무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어제 있었던 일을 생각하며 오늘은 또 작은 교훈을 얻었다.



2


감사 일기 하나.


아침에 하다가 새벽같이 일어나 나를 배웅해 주었다. 이모를 데리러 가야 하지 않느냐며 엉엉 울던 하다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타주더니 기분이 풀렸고, 엄마 힘내! 하고 말했다. 오늘 아침을 떠올리니 눈물이 난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현관 앞까지 달려온 그 작은 아이는 엄마 없이 홀로 남겨지는 것은 자신인데도 나에게 말해주었다.


엄마 많이 많이 힘내!


이미 늦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다시 아이 앞으로 달려가 와락 껴안고 뽀뽀를 해주었다.


많이 많이 힘든 걸 어떻게 알고, 너는 많이 많이 힘내라고 하는 거야? 하지도 못할 말이 또 입안에 맴돌았다. 오늘 아침 새벽에 엄마 출근 준비를 방해해 줘서 고마워. 덕분에 엄마가 힘이 많이 많이 났어.


감사 일기, 둘.


늦었다. 늦었는데 앞차는 늦지 않았나 보다. 서두름이 없는 그 운전이 답답해 속도를 냈고 하마터면 나는 바닷속으로 풍덩 빠질 뻔했다. 바다 위에 커브길로 이어진 도로에서 한참을 휘청였다. 그러나 다행히도 다시 차는 안정적으로 굴러갔고 감사합니다! 하고 외쳤다. 역시 살아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감사한 일이다.


감사 일기, 셋


마음이 심란할 땐, 역시 청소가 답이다. 정리가 답이고. 이런 날 미션이 주어졌다. ‘뿔뿔이 흩어져 있는 담배를 한 곳으로 모아라!’ 서랍장을 비우고 담배들을 꺼내고 비워진 곳을 닦고 쓸고 쓰레기는 버리고 자리를 찾아주고 정리를 한다. 구슬땀이 흐른다. 채워진 것을 비우고 새로운 것으로 채우니 마음도 그런 것 같다. 갑자기 기분이 훨씬 좋아졌다. 딱 적절한 타이밍에 이 일을 하게 된 것에 감사합니다.


감사 일기, 넷


1로 갈음.




3


엄마는 무슨 일을 해?



하다는 오늘 아침의 일을 기억할 수 있을까? 엄마 내가 깜깜한 아침에 일어나 엄마한테 힘내라고 했잖아. 하고 기억할까? 화장을 하고 있으니 하다는 나를 쳐다보지 않고 물었다.


엄마는 무슨 일을 해?


엄마는 여행 가고 오는 사람들이 필요한 물건을 사는 걸 돕는 일을 해.


하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이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대충 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 엄마는 오늘 무슨 일을 했어? 하고 물었을 때, 엄마는 기계처럼 계산을 했어. 엄마는 무시를 당하며 일을 했어. 엄마는 오늘 물건의 먼지를 털고 청소를 했어. 이런 일이 아니라 조금 더 나은 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고. 어쨌거나 우리 아이들은 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는 오늘도 어떤 일이든 열심히 일하고 왔겠구나. 하는 느낌적인 느낌으로.


엄마의 노동의 가치가 보수로 환산되었을 땐 비록 형편없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일을 했고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보내왔다는 것을 언젠가는 알아주면 좋겠다.



이제 다시 일을 하러 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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