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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한 개시

마음의 불편한 씨앗은 인성의 숲에서 어떤 나무로 자랄까

by 이덕준

불쾌한 개시.


이상한 하루였다. 이상한 하루라고 하지만 사실은 재수 없는 하루다. 아침부터 아니 새벽부터 그랬다. 좋은 날이 있으면 가끔은 이렇게 재수 없는 날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려니 한다. 아니 그러지 못했다.


숨은 이야기


면세점의 숨은 이야기를 하나 해볼까요? 면세점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면세점에서 주의할 점을 모두 외우고 있을 필요는 없어요. 왜냐하면 직원들이 다 안내해 주거든요. 그러면 여러분은 몰랐던 것을 알아서 아 그렇군요 하고 넘어가면 될 일입니다. 그게 다예요.


드러난 이야기


한 손님이 매장에 들어왔다. 카트에 짐을 잔뜩 싣고서 들어왔다. 나이는 80쯤 되려나. 머리가 하얗게 세었고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할아버지였다. (사실 더 탱탱했는지 모르겠지만 이름도 모르는 그 사람을, 마음이 상한 작가는 제멋대로 수식해 본다.) 대뜸, 나무 상자에 들어있는 제품이 있느냐고 물었다. 애석하게도 나 같은 도급의 직원에게는 입점된 각각의 브랜드에서 따로 나와 제품 연수를 시켜주지 않는다. 알고 있는 것 + 적당한 눈치 + 비치된 제품 설명서로 도움을 드리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백 불짜리 나무상자에 담겨있는 그가 원하는 제품은 없었고, 그렇게 안내를 하자 갑자기 사진을 찍겠다고 했다. 부탁받은 사람에게 보내 물어보겠다고. 전화 통화는 어떠시냐고 물었더니 자고 있어서 사진을 찍겠단다. 사실 나는 아직도 그의 말이 다 이해되지는 않는다. 어쨌든 나는 죄송하지만 면세구역에서 사진 촬영이 불가하다고 안내를 했다. 그리고 그는 버럭 화를 냈다.(이건 팩트이다.)


군사 기밀 시설을 사진 찍어도 못 말리는데 여기가 뭐라고 사진을 못 찍게 하느냐고 말했다. 여기 사람들은 물건을 팔고 싶지 않나 보다고. 당연히, 내가 사장이라면 아무한테 아무 물건이나 팔고 싶지는 않다. 필요한 사람에게 원하는 제품을 합리적인 가격에 팔고 싶지만 이 과정에서 사장이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가격 책정도 아니고 더욱이 손님을 가려 가면서 받을 수 있는 선택도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필요한 제품을 찾아주고 친절하게 응대한 뒤 책정된 금액을 받고 정확하게 결재하는 것. 그뿐이다.


없는 제품을 없다고 했고 안 되는 행동을 안내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무례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이 상황을 지켜본 매장의 사람들은 모두 아니라고 할 것이다. 답이 없는 손님을 붙들고 싸우는 것도 답이 아니고 도움은 더 드릴 수가 없었다. 난처해서 그럼 카탈로그를 드릴 테니 카탈로그 사진을 찍으시는 게 어떠냐고 했다. 그러자 그는 다시 한번 난색을 표했다. 나도 눈물을 머금고 제품 사진만 찍어 달라고 했더니 나더러 대신 찍으라고 한다. 어째서? 권하기 싫은 일을 내가 저지르기는 더 싫었다. 등 뒤에서 따가운 불평과 비난의 말이 쏟아졌다. 내 등 뒤에는 두꺼운 살이 있지. 어쩔 수 없어 편하게 보시라고 자리를 떠났다. 짖고 싶은 개는 짖어야 직성이 풀리고 피할 수 있다면 사람이 피하는 편이 나으니까.


내가 떠난 뒤로 영업팀 직원이 다시 한번 사진 촬영 불가에 대한 안내를 했다. 필리핀으로 귀화했다던 그분은(결국 결재하지 않고 갔다.) 한국이 너무 싫다고 진저리 쳤다고 했다. 매장 사진을 꼼꼼히 다 찍어 가며. 졸지에 나는 필리핀으로 귀화한 할아버지가 한국을 더 싫게 만든 사람이 되었다.


이것이 오늘 아침 나의 시작이었다.


아침의 첫 손님이 이토록 불쾌한 사람이었다. 그에게도 내가 그랬을지 모르겠다. 꼬여버린 하루는 내내 뱅뱅 꼬이고 꼬여갔다.


시제가 안 맞아요. 한 번 봐주실래요?


시재금이 맞지 않는다며 환히 님이 나를 찾았다. 다시 확인을 해달라고. 아니나 다를까 돈 통에서 1만 원이 남았다. 혹시 몰라 서랍을 확인해 보니, 서랍에서 만 원이 비었다. 맞아요. 하고 그녀를 달래고 그날 하루를 보냈다. 아니 보내고 있었다. 점심 식사 후에 매장에 들어가니 오후 조 직원이 시제가 맞지 않는다고 했다. 서랍에 만 원이 남는다고. 그 이야기를 들은 환희 님은, 그럼 처음이 맞나 봐요.라고 했다.


시제를 두 번이나 했는데 맞았다고 말을 했음에도 이야기의 결론은 내가 실수를 한 사람이 되어있었다. 처음에 돈이 남았어도 결재 실수는 그녀의 몫인 거고, 시재금을 확인한 후에 돈이 남았다면 그것도 그녀의 실수가 아닐까. (그 사이 결재한 사람이 그녀뿐이라.) 뭐랄까 나의 호의가 돌아와 돌이 된 느낌이었다. 뒤통수가 꽤나 맵고 따가웠다. 특히나 나는 잘 못하는 게 유독 싫은 사람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무엇이든 잘하고 싶은 사람인데 누군가의 실수가 은연중 나의 것이 되는 상황, 정말 불편해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니까 나의 실수였을 수 있다. 나는 늘 그렇게 생각해서 잘못이 있으면 죄송하다고 먼저 말하고 다시 확인했다. 실수를 피하지는 않았다. 물론, 너무 피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일에서 피한다고 실수가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빨리 시인하고 해결책을 찾아 처리하는 것이다. 만약 그녀가 자신이 시재금을 맞추고 그 과정에 실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했거나, 오전에 결재 실수 건이 있었다고 했다면 내가 그녀를 바라보는 마음이 이렇게 불편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마음이 상하는 건, 근데 그건 아니지 않아요?라고 직접 말을 하지 못하는 나에게 있다. 이미 나는 마음이 상해버렸다. 감정의 문제가 발생했다. 그리고 그다음 문제가 또 생겼다.


퇴근 전 팀장님과 선배님과 업무 공유를 하고 있는데 그녀가 쭈뼛거리며 나에게 왔다.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뭐예요?


아 제가 출근을 못할 것 같아서 토요일 근무를 바꿔주실 수 있을까요?


그녀가 평소와 같았다면 나는 어땠을까. 아니 나의 마음이 그녀를 어여쁘게 보던 그 마음 그대로였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했을까. 아마도, 무슨 일 있어요? 언제 필요하다고요? 가서 스케줄표 봐볼까요?라고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고 결국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었겠지만 내가 선택한 답변은 이랬다.


아, 곤란한데요.


팀장님과 이야기를 나눈 그녀는 내일 쉬기로 했고, 그제야 흙빛이 된 그녀의 얼굴을 보며, 걱정과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괜히 무슨 일이냐 괜찮냐. 잘 쉬고 와라 등 별 도움도 안 되는 몇 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잘 못한 것은 없는데, 그런 말을 하는 내가 구차해 보였다. 그녀는 어째서 하루에도 여러 번 나를 이런 기분 나쁜 감정에 휩싸이게 하는지. 그렇지만, 감정의 발화는 어쩔 수 없다지만 나는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했었어야 했다. 후회해도 늦었다. 이미 내가 뱉은 말은 흘러 그녀에게 가닿았다.


그녀가 종종 스스로에게 하는 말, 그 말을 나에게 해야 할까.


어쩔 수 없지 뭐.


하지만 그렇게 끝날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게 끝날 마음이 아니다. 그게 진짜 문제이다.


오전에도 그렇고 오후에도 그렇다. 불편한 사람들, 불편한 상황들. 나는 이 불쾌감을 어떻게 말로 전달하면 좋을까. 일을 하는 사람은 을이라서 어떤 비난에도 두터운 등딱지를 들이대고 고개는 꺾어 웃으며 응수하면 되는 걸까. 자신의 실수를 은연중에 타인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악의 없는 기술이 있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말을 해주면 좋을까.


오전의 그분도, 오후의 직원도 싫지 않다. 밉지 않다.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생기고 좋은 사람과도 다툰다. 다만 나는 내가 조금 더 성숙했더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든다. 기분이 상해도 조금 더 이성적이거나, 직업의식을 더 발휘해 보면 좋았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들은 떠났다. 그리고 아직 나는 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오늘의 일들이, 이 불편한 씨앗들이 다음날엔 조금 더 나은 인성의 숲을 가꿀 수 있는 나무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뱅뱅 꼬인 하루가 끝났다. 꼬인 채로 매듭을 지었다. 오늘을 기억하자고. 나무가 되어 만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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