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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의 눈과 눈이 마주칠 때

일하며 우울해졌을 때, 나의 이야기

by 이덕준


어쩌다가 우울해져 버렸다. 사실은 거짓말이다. 어쩌다가 우울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작이 너무나 미약해서 우울의 시작이 정말 별일이 아니라서 어쩌다 가라는 말로 얼버무리고 만다.


사실은, 스케줄 표를 짜고 있는 팀장님께 머리가 아프실까 봐 휴무일을 대충 맞춰서 보냈다는 말을 했다. 그러나 돌아온 말은 너는 주말도 하루는 쉬어야 한다면서 휴무를 주말로 보내던지, 평일을 휴무일로 신청하면 그날도 빼줘야 하고 주말도 빼줘야 해서 골치가 아프다고. 그런 말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내가 한 그런 배려 따위는 집어치우라는 말. 나는 애초에 주말 중 하루는 쉬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런데 일을 하다 보니 느꼈다. 매주 주말 중 하루는 쉬는 그런 스케줄은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으며, 보이지 않는 질타를 감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감각이 본능적으로 들었었다. 주말에 쉬고 싶으면 주말에 쉬는 일을 하면 된다. 그런데 어떤? 어떤 일을 하며 이 정도의 보수를 받을 수 있을까? 이만한 보수라고 하기엔 너무 쥐꼬리이지만 나 같은 걸 어디서 써줄까. 나는 생각의 끝의 끝으로 끌려 내려갔다. 우울의 눈을 보았다. 꼼짝없이 여기까지 끌려왔구나 싶었다.


유독 사람이 많은 토요일이었다.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 건 정말 오랜만이라는 직원들의 이야기를 듣고서 확신했다. 정말 오랜만에 이렇게 바쁘다고. 그런데 나는 사람들을 응대할 기운이 없었다. 우울이 나를 계속 끌어내리고 있었다. 사람이 적당히 있으면 먼지를 털고 청소를 했고. 사람이 넘치면 응대를 했다. 다시 먼지떨이를 집어 들고, 다른 직원들이 말을 걸어와 답을 하고 있을 때 팀장님이 나를 큰 목소리로 불렀다. 나 밥 먹으러 가니까 사람들 많으면 계산 도와줘. 그 말이 나는 수다 떨지 말고 눈치껏 일해.라는 말로 들렸다. 아마도 맞을 것이다. 나이가 드니, 육감의 일부가 더 발달한다. 영어나 일어나 중국어는 못 알아먹지만 돌려 말하는 한국말은 직설적이게 귀에 꽂힌다. 이제는 알아먹어도 알지 못하는 척하는 게 더 곤혹스러워졌다. 예전엔 왜 이리 눈치가 없을까 생각했는데, 눈치도 눈칫밥을 먹다 보니 느는 거였다.


나는 엄마고, 89년 생이다. 나는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고 되고 싶은 것도 많지만 나는 엄마이다. 책임감이 나에 대한 희망을 자꾸 무력화한다. 시간이 흘렀다. 한 시간 반이 흐르고 퇴근을 했다. 이대로 집에 갈 수가 없어서 커피를 한잔할까 고민하려는 찰나에 커피가 필요한 친구를 만나서 커피 한 잔을 선물했다. 누군가에게 카페인을 쥐여주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든다. 우울할 땐 누군가에게 선물을 해봐야겠다고. 아메리카노를 목구멍 끝까지 깊게 마셔보았다. 담배를 깊이 빤다는 느낌도 이런 것일까.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 앉아있는 직원을 발견했다. 그냥 지나칠까 고민했지만 인사를 건네고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고는 나는 요청하지도 않은 말을 꺼내고는 눈물을 쏟아내고 말았다. 오늘 너무 힘들었어요.


내 이야기를 듣던 직원은 내가 내 이야기 하나 해줄까,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깊고 폭풍 같은 이야기라서 중간중간 몇 번이나 울컥하게 되는 이야기를. 그리고 바라게 됐다. 언젠가는 그녀처럼 내 이야기를 하며 누군가를 위로해 주는 날이 오기를. 지금은 수치와 고통이 뜨거워서 손도 대기 싫은 그 감정이 식게 되기를. 얼마나 지나면 될까. 아이들이 성인인이 되는 15년이 지나면, 조금 더 보태 20년이 지나면 나는 나만 생각하며 살 수 있을까. 나의 고생길은 내 것이었으니 너희는 그만 잊고 훨훨 살아라 하고 훌쩍 떠나버리고 싶다. 아니 나 같은 엄마는 필요하지 않을 세상으로 날려 보내주고 싶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이상하게 감사한 생각이 들었다. 내 형편이 더 나아서는 절대 아니다. 나는 그녀가 부러웠으니까. 다만 내 나이에, 나의 처지에 할만한 고민을 하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도했다랄까.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나처럼 적당히 젊으며 늙고 아이를 부양하고 있고 능력은 없는데 해주고 싶은 것은 많은 부모가 겪는 고통을 당연히 느끼고 있구나. 어쩌면 내 삶의 과정에서 순리와도 같은 고통이구나. 싶었다.


감사 기도의 끝은 단순하다. 내가 살아서 이런 고통을 느낄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결국은 그렇게 마무리가 된다. 그래서 오늘의 이야기는, 내가 나라서 이런 고통을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남편이 왜 늦느냐고 물어서 대략적인 이야기를 하며 울었다. 남편은 내가 왜 늦었는지 그 이유를 확인하고 알았다고 했다. 그 순간 나는 또 퍽 외롭고 퍽 슬퍼졌다. 가까스로 벗어났던 순리의 고통에 퐁당, 다시 빠져버렸다.


번뜩, 우울의 눈과 다시 눈이 마주쳤다. 감으려 하지 않은, 황색의 빛나는 눈을 바라본다. 이럴 땐 자고 봐야 한다. 저쪽이 눈을 감지 않으면 내가 감아버리면 된다. 눈물로도 대화로도 공감으로도 토로로도 해결이 안 될 때는 쓰면서 토해내고 속 시원하게 자야 한다. 오늘 하루 잘 아팠으니, 내일 또 잘 아파보자. 새로운 고통의 하루로. 새로운 순리의 날을 향해. 굿나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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