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의 시간
1
오늘 아침은 유독 일어나기 쉽지 않았다. 살아있다는 것은 욕구에 지배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반복하는 일이다. 사는 내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욕망들로부터 자신을 다잡으며 살아야 한다. 욕망 대로 살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사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욕망이 될 테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욕망을 삼켜내고 출근했다.
2
지해를 보면 가슴이 쿵쾅 거린다. 오늘은 가슴이 너무 많이 아팠다. 약을 먹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자꾸만 어지러웠다. 일하는 내내 몇 번이나 휘청거렸다. 다들 잘 살자고 하는 건데,라고 말을 한다. 그러나 나는 다만 사는 것도 힘들다는 것을 반복해서 느끼고 있다.
3
그는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러니 너도 그냥 살아. 아니 네 인생을 살아. 하고 말을 해주었다. 틀린 말은 아닌데, 그래야만 하는 건데 마음이 아픈 건 어떻게 해. 이미 상처가 났고 아직 아물지 않은걸. 이 상처 난 지금의 인생이 지금의 내 것인걸. 그러나 고맙다고 답을 해두었다. 살라고 하는 말에 죽겠다고 답을 할 수가 없어서.
4
- 그거 뭐였죠? 저번에 선배가 한 말. 노하우 인가? 되게 웃겼는데.
- 아 킥으로 쓸 말을 한 거? 그거?
- 네
- 아 기억나는데 말 안 해줄래. 이번에 알려주고 나면 그 단어 절대 못 잊을 거야. 그럼 나 볼 때마다 웃는 거 아니야?
그런데 나는 그렇게라도 웃는 그녀를 보는 것이 좋았다. 어제는 온종일 눈에 슬픔이 그렁그렁하더니, 오늘은 웃고 있는 그녀가 더 웃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그래, 알려줄게. 대신 그 단어 들으면 내 생각 오래오래 해. 치트키.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쓰러지듯이 웃었다. 온종일 슬펐던 그녀가 그렇게라도 웃어서 웃어줘서 나도 웃음이 났다. 그리고 이내 슬퍼졌다. 그녀는 얼마 전 내가 쓴 이 단어를 듣고서 하루 종일 나를 보면 쿡쿡하고 웃음을 참았었다. 나는 그게 민망스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해서, 별이 된 그녀에게 말했다.
- 아니... (생략) 요즘 정말 치트키라는 말 안 쓰는 거야? 나 정말 옛날 사람이야?
- 에이, 아니에요. 요즘도 많이 써요.
그렇게 매번 다정히도 나를 달래던, 공감해 주던, 위로해 주던 그녀가 또 생각나버리고 말았다. 가슴이 아파진다. 너무너무. 다들 어떻게 잊고 사는 걸까. 그 예쁜 애를. 어떻게. 나는 오늘도 그녀와 함께 일했다. 곳곳에 그녀가 있다.
5
잊는다는 건
여기로 이사를 온 지 이 년이 흘렀다. 순천에서의 생활도 사람들도 너무 좋아서 나는 한동안 정말 힘들었다. 뭘 해도 마음이 먹먹해지는 게, 더 잘 살아보자고 와놓고 이렇게 힘들어하는 게 스스로도 기가 차서 혼자서 꾹꾹 눌러가며 살았다. 다행히도 나에게는 세상의 전부 같은 아이들이 함께라서 그 시간을 또 버텼다. 매일 아이들이 하원하면 놀이터에 좌판을 편 시장 할머니처럼 하염없이 날리는 모래를 바라보곤 했다. 물론, 엉덩이가 붙어있을 새 없이 엄마를 찾는 아이들 덕에 몸은 바빴다. 아이들 덕에 살았다.
그리움이 너무 컸고, 내가 힘들어하면 그 모습을 아이가 보면 안 될 것 같아서 나는 더 씩씩한 척 연기를 했다. 더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고 더 그리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연락을 줄이고 사진을 보지 않았다. 언젠가 무뎌지면 그때 다시 보자고 하려고. 그러나 잊고 싶은 건 아니었다. 어느 날 내가 조금 괜찮아졌다는 느낌이 드는 날, 내가 너무 많이 잊어버렸나 싶어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더 서럽게 슬퍼졌다.
잊고 싶지 않아서 붙잡고 있다. 그녀를. 아무리 붙잡아도 옷자락 하나, 머리칼 한 올, 사진 한 장도 잡히지 않는 그녀를 잊고 싶지가 않은 그녀를 기억하려고 한다. 힘들다고 잊고 싶지는 않은데, 가슴이 너무 아파진다. 가슴이 없어진 것 같기도 하고 무거운 돌로 쿵쿵 내려 찧는 것 같기도 하다. 한숨이 푹푹 나올 때, 아이들 앞이라 아차 하고 삼켜본다. 아이들이 꿈나라로 가면 나의 눈물은 눈 밖을 나와 늦은 밤을 헤맨다.
낮 동안은 그저 버틴다. 일을 하니까 일하는 동안 울지 못하고 아이들의 모습에 웃기도 하며 하루를 버텼다. 그리고 나로 남는 순간에는 어김없이 그리움과 보고픔이 슬픔이라는 이름으로 찾아온다. 그러면 속절없이 나로 당하고 만다.
6
언제가 제일 힘드냐면, 출입증을 찍고 보안 밖의 경계로 나서서 아이들이나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혼자인 시간. 그대로 주저앉아 가슴을 움켜쥐고 싶은 시간. 다른 사람의 시선 따위는 아무래도 중요하지가 않아져서 아픈 가슴의 나와 떠난 너만 중요해진다.
내 삶을 살라고, 그만 생각하라지만 왜 아무 인연도 아닌 사람들이 탄 비행기가 추락했을 때도 며칠 내내, 몇 주 내내. 공항에 만국기는 사라지고 애도의 태극기가 걸렸다가 다시 만국기가 걸렸던 시간 동안보다 우린 더 오래 아팠는데, 살과 연이, 그렇게 생이 닿았던 사람을 그리워하는 시간이 어떻게 더 짧을 수 있을까.
7
아이가 자꾸 나를 뚱돼지라고 한다. 엄마 친구는 예쁘니까 하얗고 날씬한데 나는 뚱뚱하다. 직업도 별 볼일 없고. 언니들이 어린이날에 뭐 했냐고 하는데 아무 말을 못 했다. 길었던 연휴에 해외로도 국내로도 여행을 다녀오지 못했고, 선물도 딱히 준비하지 못했다. 해준 게 없으니 효도는 바라지 않고 건강히 커서 제 몫만 하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해준 게 뭐가 없냐고 언니들은 말하는데 나는 간신히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있으니 정말로 해준 건 없다. 하고 싶은 걸 해줄 수가 없는데 해준 게 없다는 말이 맞다. 최소한의 의무만 다하는 부모라서, 부모니까 효도해라란 말은 못 하겠다.
그래도 오늘 하다는 수십 번이나 엄마 싫어. 엄마 미워.라고 말했다. 그런 말에 자꾸만 상처가 덧난다. 뚱뚱한 엄마라 이제는 어린이집에도 학교 행사에도 참여하지 못할 것 같다. 하원하러 가면 늘 느끼지만, 다른 엄마들에 비해 많이 못난 엄마인 것 같다. 스스로가 부끄럽다. 매번. 그래서 싫은가. 내가 미운가. 싫고 미운 자격지심이 나를 더 부끄럽게 만든다. 아이가 부끄러워 울까 봐, 나도 내가 부끄러워서 사실은 그냥 꽁꽁 숨어있고 싶다.
그렇게 예쁘고 창창한 어린 친구가 아니라, 이미 망해버린 나 같은 사람이 죽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늘에서도 나 같은 건 별로 탐탁지 않은 모양인가. 억지로 발을 디디지는 말아야지. 어렵게 가놓고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있는 상상을 하니 아찔하다. 그런 경험은 현생에서 충분하다. 애도 양가에서 낳아달라고 애원할 때 낳을 걸 그랬다. 나는 애원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매일 버림받는 내 글처럼, 매일 외면받는 나라는 존재는 이번 생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