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블리안 Mar 15. 2023

내 인생의 자전거

H에게

기억나니 그때?

삼십 중반을 살아오면서 부모님을 제외하고

미안한 한 사람이 있다.


난 사실 인생에서 행복했던 장면이나,

생각만 해도 두고두고 곱씹을 설레는 명장면이 없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렇다고 내가 인생에 고난이 있어 주구장창 어렵게

살아왔다거나, 큰 사건 사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를 무척 사랑해주는 부모님과 무뚝뚝하지만 착한 오빠 곁에서 학비 걱정없이 공부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아무리 떠올려도 '행복한' 인생의 명장면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쯤 되니 도대체 나는 당췌 감흥이라고는 없는

인간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도-인생의 자전거-는 있다.


나에게는 아주 오래 만난 남자친구가 있었다.

살면서 누군가와 만나고 연애하면서

그가 나를 정말 애정하고 사랑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이, 사랑이 몇이나 있는가?

난 그가 나를 정말 사랑했다고 확신했다.

그렇다면 나도 그를 정말 애정하고 사랑했다고

확신 할 수 있는가? 그건 모르겠다.

단언할 수 있는건 나는 그의 사랑에 한편 부채감을

느꼈고 결코 어떤 방식으로든 그를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

또 그가 정말로, 정말로

나보다 잘살기를 바랬다.


그와 처음 만나던 때를 기억한다.

그는 어느 선배와 친구여서 우리과 술자리에 나왔었다.

검은 뿔테와 감색 야상을 입고.

그는 술자리 내내 묘하게 단정했고, 의젓했다.

함부로 누군가를 대하지도 않았고

일하시는 아주머니에게도 내내 친절했다.

술집 문 앞에서 담배를 피고는, 남들은 아무렇게나

밟아 짓뭉게는데 그는 쓰레기통을 찾아

얌전히 버렸다.


그와 연애하면서 그의 집안형편이 갑자기 나빠졌다.

그는 고된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게 되었다.

그때의 나는 너무나 이기적이고 못된 계집애여서

바빠진 그에 대해, 데이트다운 데이트도 하지 못하게

 우리의 상황에 대해 많이 투정했다.

그러면 그는 아무말없이 그 투정을 받아주었다.

그건 남자가 연애  여자와 한 번 어떻게 해보고

싶어 무조건 져주는 그런 능글맞은 굽힘이 아니었다.

그는 나를 포용했고, 연민했으며,

사랑해서 미안해했다.


그렇게 투정할때면 그는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그 먼거리를 자전거를 타고 왔다.

한시간 남짓 열심히 자전거 페달을 밟고 밟아,

다리 아래 하천가를 지나고 차들이 쌩쌩지나는 찻길을

따라 왔을 것이다.

아버지의 낡은 검은색 자전거를 타고.


언젠가 겨울이였나.

그렇게 새벽에 열심히 자전거를 타고 오면

그는 한참을 하얀 숨을 쌕쌕 골랐다.

그렇게 집 근처 편의점 앞에 자전거를 대충 세워두고

따뜻한 커피나 핫초코 따위를 마시면서 

내일이면 전혀 기억나지 않을 이야기들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자전거를 끌며

나를 집앞에 데려다 주고 자기 집으로 갔다.

그는 을 한 백번쯤은 했을 것이다.


연애기간이 오래되면서 그는 졸업을 하고 

취업해 수원으로 떠났다.

우린 누구도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서로가 서로를 가늠해 짐작했다.



번은 그를 만나러 그의 수원 자취방에 간적이 있다.

그것도 오로지 나만을 위한 일이었다.

그와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먹었다.

그는 낯선 도시, 낯선 직장에 힘들어했고 나는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따뜻했다.

오랫만의 만남, 술, 이야기, 아무도 없는 방, 외로움, 겨울 밤, 켜놓은 노트북에서 흘러나오는 영화.

섹스를 해야할 구실은 차고도 넘쳤지만

섹스를 하진 않았다.

그는 바닥에 자고 나에게 온갖 이불을 끌어다 주었다.


그의 출근길을 배웅하고 나는 다시 그의 방으로

들어와 오랫동안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언제 그가 볼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의 다이어리

마지막쯤에 편지를 하나 써놓았다.


다시 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우리의 마지막에 대해.

위안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오랫동안 너로 인해

힘들어 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그후로 그를 우연이라도 한번도 본적이 없다.

그런데 그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때의 다짐 그대로 너의 잔상이 오랫동안

남아 힘들어했다고.

때때로 네가 자전거를 타고 내게 왔던 길을

내내 곱씹는다고.

그리고 명장면이라고는 없는 내 인생에

근사한 자전거를 선물해줘서 고맙다고.




작가의 이전글 매일매일이 부끄럽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