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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찬 Apr 17. 2024

<1부> 꿈이 싹트는 고향, 뒷내

#1. 내 고향 후천리 뒷내

1948년 1월 11일(음력) 새벽 4시! 이날은 세상에 우렁찬 울음소리로 내가 태어남을 알리는 날이었다. 나는 가난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혈혈단신이나 다름이 없었단다. 조실부모하시고 큰아버지는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시고, 고모님은 수양딸로 보내졌다고 한다. 그랬으니 내가 태어난 것이 얼마나 기쁘셨을까?


아버지는 홀로 종손 집에서 깔 머슴을 시작으로 끼니를 연명하면서 살아오셨단다. 다행히 심성이 좋고 가문이 괜찮다는 생각을 가지신 외할아버지의 권유로 어머니와 결혼하셨단다. 어머니는 아버지보다 13살이 어렸다. 그래서일까? 결혼 후 몇 년 동안 태기가 없어 애를 태우다가 나를 낳으셨단다. 그때 아버지의 마음은 온 세상이 자기 것이었다고 하셨단다. 얼마나 귀하게 여겼으면 새벽같이 똥장군을 지고 나갈 때도 나를 안고서 일터에 나가셨을까?


내가 각별한 사랑을 받고 태어나 성장한 곳은 동네 가운데로 시내가 흐르고 있는 임실군 삼계면 후천리(뒷내) 마을이다. 나의 꿈이 서린 후천리 뒷내! 야생마와 같은 어린 소년의 마음의 고향! 나의 소박한 꿈을 안고 성장한 곳이다. 어린 시절의 소박한 꿈을 키울 수 있는 고향!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러한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곳은 흔치 않을 것이다. 


그곳은 사시사철 나의 꿈이 자라고 추억이 얽혀 있는 곳이다. 봄이면 나물 캐러 들로 나아가 밭 가장자리나 논두렁에 나 있는 나물을 캐고 하면서 칠레 순을 꺾어 먹고, 언덕배기에 가서 삐비도 뽑아 먹고, 산에 가서 칡도 캐어 먹고, 소나무 껍질로 개(벗겨서 속살을 먹는 일)도 잡아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모두가 무공해 생약을 먹은 바나 진배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큰 병 앓이를 하지 않고 살아왔는가 보다. 여름이면 동네 가운데로 흐르는 시내에서 미역 감고 물고기를 잡으며 감자를 모래에 묻어 삶아 먹기도 하였다.


비가 많이 오면 신난다. 큰물인 북정(황토물) 물이 엄청나게 흘러가면 정말로 재미있다. 고기를 잡는 일이다. 집에 있는 소쿠리나 산태미(싸리나무로 만든 것)를 들고 냇가로 간다. 물가인 언덕으로 훑어내린다. 여름의 쏠쏠한 재미이고 고기를 먹는 맛이다.


보리나 밀 타작해서 먹을 때면 얼굴에 검정 칠을 하면서 서로 얼굴 쳐다보면서 웃는 천진난만한 개구쟁이들의 모습! 그 시절, 우리는 마치 천국에서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천사의 아이들과 같았으리라. 여름은 가난한 아이들에게는 천국이 따로 없다.


가을에는 먹을거리가 온통 산야에 널려있어서 좋았다. 홍시 따먹기에다 알밤 주어먹기는 보통이었다. 산으로 올라가면 더욱더 맛있는 것들이 있었다. 설익은 명감이다. 검붉은 정금이다. 아그배(산에 있는 야생 배)다. 어쩌다가 찾게 되는 깨금이다. 그야말로 달고 고소한 먹을거리가 여기자기에 널려있다. 천국이 따로 없었다.


특히 알밤 줍기는 보물찾기다. 주인이 밤을 털어가고 난 뒤에 알밤 줍기는 보물찾기다. 높은 곳에 밤 한 공이라도 있으면 위험을 무릅쓰고 기어 올라가 기어이 따는 재미도 있다.


겨울은? 그 당시엔 겨울이 왜 그리도 유난히 추웠는지도 모른다. 지금보다 훨씬 더 추웠던 것 같다. 온 들판이 하얀 눈으로 덮여있었다. 어디 그뿐이랴. 물이 있는 곳이면 얼음이 꽁꽁 얼어 있었다. 스케이트장이 따로 필요 없었다.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형들까지도 썰매를 들고나와 탔다. 앉아서 타는 아이, 쭈그리고 앉아 타는 아이… 각자가 좋아하는 스케이트를 스스로 만들어 탄다. 철사만 있으면 되었다. 재료는 각자가 구해서 만들었다. 요즈음 같은 스케이트는 없었다. 시골이고 돈이 풍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스케이트를 살 엄두를 내지 못한 때인지라 철사만 구해지면 만사형통이었다. 각자 스스로 만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나무를 깎아 발 스케이트도 만들어 두 발에 묶고 달렸다. 썰매보다 재미있고 빨랐다. 더 재미있는 것은 미나리꽝의 살얼음이다. 깨질 듯하면서도 깨지지 않는 곳이다. 바로 집 앞에 있으니 더욱더 좋은 곳이다.


어디 그뿐인가. 무를 뽑아낸 곳은 또 다른 놀이터였다. 동네 어귀에 있었다. 담벼락에 붙어있어서 좋았다. 담벼락은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도 했다. 그곳에서 진도리 놀이도 했다. 남의 영토에 들어가 표시물인 돌을 가지고 자기 영토로 돌아오면 이기는 놀이였다. 두 편이 겨루는데 공평하게 비슷한 아이들끼리 가위·바위·보로 편을 나누었다.


사각형과 기다란 뱀 모양의 진도리도 있었다. 눈 오는 날이면 토끼사냥도 나갔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면 토끼가 도망을 잘 못 간다. 협동 정신이 필요했다. 잡으면 어른들에게 팔았다. 얼마간의 돈을 받았다. 그 돈으로 과자나 눈깔사탕을 사서 공평하게 분배해서 나누어 먹었다.


수많은 추억이 서린 곳이 나의 고향, 산수 경치 수려한 후천리 뒷내다. 그곳에서의 어린 시절은 나에게는 마르지 않는 이야기의 소재거리다. 온종일 이야기해도 질리지 않는다. 요즈음 아이들에게 없는, 쥐어 줄 수 없는, 자연! 글의 소재가 널려있는 그곳 뒷내 후천리! 요즈음 아이들에게 그러한 놀이를 하게 한다면 엄청난 부작용을 불러올 것이었다. 부상 당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좋은 놀이인 것을!




#2. 보릿고개

그 당시의 보릿고개는 어느 마을이나 어느 집이나 있었다. 왜 그리 보릿고개가 심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토지는 그때나 지금이나 면적은 같았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고지(땅을 빌려 농사를 지어 수확 후 똑같이 나누는 방식)를 하거나 선자(땅을 일정 양의 쌀을 미리 지불하고 빌리는 방식)를 사서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해도 힘들었다. 쌀 소득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초근목피였던 때였다.


요즘 아이들은 초근목피라면 이해가 안 될 것이다. 목피는 소나무 껍질을 벗겨서 큰 항아리에 담아 우려내기를 십여 번 한다. 그리고 햇볕에 바짝 말린다. 먹을 때 물에 불려서 절구에 넣고서 찧는다. 그것을 가지고 오다가다 쌀이나 보리쌀이 보일 정도로 밥을 해서 먹는 것을 말한다.


초근이란? 봄에 쑥을 캐어다 비비고 문질러서 말린다. 취나물, 분취, 고사리 등을 꺾어다 말렸다. 주로 쑥을 밀가루에 버무려서 쪄먹기도 하고 쑥에 밀이나 보리를 갈아서 죽을 끓여 먹기도 했다. 그것이 바로 풀 때 죽이고 초근이라고 했다. 보리쌀을 확독(돌로 만든 절구)에 갈아서 버리는 뜨물을 모아서 가라앉은 것으로 사카린을 넣어 개떡을 만들어 쪄먹는다. 시큼하지만, 배고픔을 달래주는 양식이 되었다. 밀을 갈아 죽을 끓인다. 요즈음의 수제비와 같이 애호박에 끓여 먹기도 하지만, 그냥 갈아서 죽으로 쑤어 먹기도 했다.


부모님은 주린 배를 물그스름한 죽 한 그릇으로 채우고 일하러 나가신다. 어머니는 동생이 있으면 업고 밭도 매고 벼도 심곤 했다. 얼마나 허기지고 허리가 아팠을까? 그래서 요즈음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의 구부정한 허리를 보면 ‘옛날에 고생을 많이도 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도 그랬으려니 생각하고 가슴에 아픔이 메이어 온다. 요즈음의 세상에서는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그 옛날 우리네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들의 세상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6.25전쟁이 끝났던 때라 더욱 그러했으리라.




#3. 어리지만 기억나는 6·25전쟁

어느 날 어른들이 전쟁이 일어났다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어린이들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는 일이었다. 그냥 싸움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총을 멘 군인들이 동네로 들어왔다. 동네 어귀에 세워놓은 총을 보니 무서웠다. 동네 엄마들이 총을 들었던 분들에게 밥을 해주곤 했다.


그러나 어른들은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도 걱정들을 하는 모습이 어린 눈에도 비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우리 어린이들은 전쟁놀이를 따라 했다. 편을 대원군과 빨치산으로 나누어 총과 칼싸움을 하곤 했다. 우리 동네에 군인들이 물어가니 인민군이 들어오고 죄 없는 사람도 잡아가곤 했다. 그런 와중에 두 사람의 인민군이 우리 아버지도 저녁에 끌려가서 죽임을 당할 뻔했단다. 다 알고 있는 후천리 사람이었단다. 한 사람은 죽이자고 하고 한 사람은 왜? 착한 사람을 죽이냐고 하다가 아버지를 돌려보냈단다.


한번은 어머니는 동생을 데리고 같은 마을 외갓집에 가시고 아버지와 나는 집에서 자는데 갑자기 추워서 아버지 추워요 하고 어둠 속에서 보니 아버지는 솜을 잡아당기고, 빨치산인지 인민군이지는 이불 배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지금도 그러한 일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가야 할 텐데 걱정이다.




#4. 초등학교 입학

아는 것이라곤 농사짓는 일뿐이던 부모님은 동네 형들에게 나를 데리고 가서 초등학교 입학을 시키라고 부탁하였다. 입학식 날 형들을 따라갔다. 입학하여 1학년이 되었다. 임실 삼계초등학교였다. 봄, 여름, 가을에는 그런대로 다닐 만했다. 그런데 겨울에는 왜 그렇게도 추웠었는지 모른다. 솜바지, 저고리에 버선을 신고서 학교에 갔다.               

타이어 검정 고무신을 바닥이 다 닳도록 신고 다녔다. 물이 들어온다. 찢어지면 꿰매서 신었다. 다 젖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추운 겨울에는 아버지들이 장작을 짊어지고 학교에 가져오셨다. 학생마다 의무적인 일이었다. 난로에 지필 연료는 자급자족이었다. 학부모의 몫이었다.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서였으리라.               

그렇게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식인 나는 공부를 잘하지 못하였다. 초등학교 3년 될 때까지도 국어책을 제대로 읽지를 못했으니 말이다. 공책이 풍부하지도 않았고, 왜 그리 연필심은 잘 부러지는지… 공책은 백지였다. 풍부하게 사서 썼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공책이나 연필 살 돈은 달걀이었다. 닭이 사소한 돈의 출처가 되었다. 책도 사야 하고, 월사금도 납부해야 하고, 기성회비도 납부해야 했는데, 가난한 집에서는 항상 돈 때문에 불평의 소리가 나고 사립문을 나서면서부터 조용한 날이 없었다. 울고불고 난리였다. 학교에서는 월사금을 내라 난리고 집에는 돈이 없어 내일로, 다시 내일로 미루었다.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부모님은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지금 내가 부모 된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죄송스럽기 그지없다.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린다.




#5. 남원으로 이사

부모님을 생각하면 뜨거운 눈물이 난다. 그렇게 한 해 두 해가 지나면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점심은 거의 거르고 하니 부모님께서도 항상 마음이 아팠으리라.


춘궁기가 닥칠 때마다 허리띠를 졸라매시던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달리 살 궁리를 하셨던 모양이었다. 정든 고향을 떠나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었다. 학정리에 사시는 당숙님과 협의를 하신 듯했다. 그러나 실행으로 옮기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어느 겨울, 어머니께서 남원의 고모네 집에 가서 있다가 오라고 하여 추운 겨울에 두 분의 이모님께서 돌고개 재를 넘겨주었다. 이모님께서 해곡(바다실)이라는 곳까지 바래다주고 돌아가시고 난 후, 나 혼자 얼음 위를 걸어서 내를 건넜다. 하지만, 얼음이 깨지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물에 젖은 버선을 신고 내를 건넌 발이 어떠했을지 짐작해 보라. 고모네 집은 남원역 바로 옆에 있었다. 철길을 건너 물어물어 찾아갔다. 지금의 동충동 충렬사였다. 동네 앞에 큰 묘도 있었는데 다름 아닌 만인의총이었다. 고모네의 집은 바로 만인의총 앞에 있었다.


처음 찾아가 보는 고모네 집에 도착하였을 때는 발이 내 발이 아니었다. 버선을 신은 발이 꽁꽁 얼어 있었다. 고모님께서 콩으로 발을 싸매주시고 나는 미지근한 물에 발을 담가서 언 발을 녹여야 했다. 몇 날 며칠을 반복하면서 얼음을 빼내었다. 얼음이 발에 박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때의 일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배고픈 시절이라 며칠이라도 밥을 좀 얻어먹고 오라고 보냈다는 우리 어머니! 자기는 배를 주리면서도 자식을 사랑하시던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배려였다. 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자식을 사랑하는 우리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하늘만큼 땅만큼, 아니 그보다 더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신 부모님 마음을 그 누가 알리오. 시골 뒷내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신 부모님. 부모님은 비록 배우지는 못했지만, 생각은 깨어 있었다. 자식들 모두 까막눈을 만들지 않겠다고 생각하셨단다. 어떤 힘든 일을 해서라도 자식들을 배고프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셨단다. 남의 농사에 의지하던 부모님이었으니 이래도 고생 저래도 고생이니 도시로 나가서 노동일이라도 하여 자식을 가르치겠다고 결심하셨단다. 서울로 당숙과 함께 갈까? 남원에 계신 고모네 집 근처로 갈까? 당숙은 서울로 이사를 하셨다. 아버지는 남원으로 가기로 결정하셨다. 남원에는 고모님 한 분이 살고 계셨는데 먼저 아버지 혼자서 남원으로 가셨다. 남원역에 있는 마르보시(일본어)에서 노동일을 시작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던 때의 일이다.


금방 2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그런데 가족이 떨어져서 살고 있으니 불편한 것이 한둘이 아녔다. 내가 5학년 때이던 8월 15일 자로 전학 서류를 떼어 전 가족이 남원으로 향하는 이삿짐을 쌌다. 그 무더운 여름날, 아버지와 난 지게에 이삿짐을 지고 어머니는 머리에 이고 동생은 괴나리봇짐을 메고 또 다른 동생은 아장아장 걸으면서 돌고개 재를 넘어 바다실(해곡)의 내를 건너서 서도역으로 갔다. 아버지는 지게를 두 개나 지셨다. 저만큼 지어다 놓고 또 돌아가서 짊어지고 오셨다. 그러길 반복하셨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마치 피난민과 같은 모습이었으리라. 지금 생각하면 꽤 먼 거리였다. 줄잡아 6㎞는 더 될 것이다. 열차에 이삿짐을 싣고서 남원의 고모 집에 일단은 둥지를 틀었다.


3개월간 고모네 머리방에서 온 가족이 옹기종기 빠꿈살이처럼 살았다. 남원 용성초등학교에, 나는 5학년, 동생은 3학년으로 전학을 하였다. 담임선생님은 뒷내의 노씨 집안의 노형섭 선생님이었다. 어머니의 조카뻘 되시는데 뒤에 나올 주제인 교육위원에 출마하려고 할 때 제일 먼저 찾아가 인사하였다. 일종의 신고식이었다. 다시 향교동에 향교가 있는 어머니의 외갓집으로 셋방을 얻어 이사를 했다.


솔직히 말하면 시골에서 무슨 꿈이 있었겠는가? 겨우 국어책을 읽을 정도였으니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난다. 지지리도 공부도 못하던 시골뜨기였다.               




#6. 가난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가난을 탓할 수가 있겠는가. ‘가난은 죄가 아니다.’라고 누가 말했는가? 어머니는 밭 품팔이를 하고 나는 토요일, 일요일이면 나무를 하러 다녔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시간이 나면 죽은 나무 캐기, 죽은 가지 꺾어오기로 나무를 하였다.


그러니 공부할 시간이 있었겠는가? 우리 가족은 다시 충렬사로 이사하였다. 6학년 1학기였다. 백씨네 집으로 이사를 했다. 쥐 소리도 못 냈다. 백씨네는 어찌나 방을 가지고 위세를 떨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다시 지금 동생이 살고있는 향교동 장승다리의 오두막집을 사서 이사를 했다.


그때 아버님께서 이제 실컷 떠들고 뛰어놀라고 하셨다. 얼마나 셋방 살면서 유난히도 주눅이 든 아이들에 대한 한이 있었으면 그랬을까? 아들 욕심이 많으신 아버지께서 한이 얼마나 맺혔으면 그러셨을까? 그러나 방에서 뛰면 천장에 머리가 닿으니 마음 놓고 뛰어놀 수가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 마음 놓고 떠들 수 있어서 좋았다. 비록 초가집 오두막이지만, 우리 집이 아닌가!




#7. 신문 배달

초등학교 6학년 가을엔 신문 배달도 3개월 동안 하였다. 동네 형들을 따라서 남원역에서 새벽 네 시에 열차에서 신문 뭉치를 받아서 접고 또 접고, 끼우고 또 끼우고 하기를 한 시간 남짓하였다. 다섯 시부터 신문뭉치를 옆에 끼고 어두운 새벽길을 달려갔다. 내가 신문을 배달하던 곳은 도통동에서 월락초등학교가 있는 곳까지였다. 눈이 하얗게 쌓인 논길을 달려가기도 했다.


옛날에는 유난히도 겨울이 추웠다. 토끼털로 만든 귀 싸개로 귀를 감싸고 목은 실로 뜨개질해서 만든 목도리로 칭칭 감쌌다. 손은 멍청이 실장갑을 끼고, 발은 버선을 신었다. 단단히 중무장하고 그 추운 겨울에 새벽같이 일어나 세 시간 이상씩 3개월이나 신문을 돌렸건만, 신문 돌린 대금은 절반도 받지 못했다. 받으려고 여러 번 찾아갔지만 안 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었다. 그 사람은 그 돈으로 잘 먹고 잘 살았을까?               

그러나 그것이 나에게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친구들은 중학교로 진학하는데 나는 가지 못했다. 돈이 없었다. 수험료를 납부해야 하는데 아버지의 노동으로는 힘든 일이었다. 중학교 가는 것을 포기했다.


그 시절, 추억에 서려 있는 재미나는 이야기가 한 토막 있다. 6학년 가을의 어느 날, 일요일이었다. 그 당시에 남원산성에 금을 캐다가 만 금광이 있었다. 그곳은 얼마 전까지 금을 캐던 곳이었다. 동네 아이들과 같이 금광으로 가서 금을 줍자고 하여 몇몇 아이들이 산성으로 올라갔다. 남은 금이 틀림없이 있을 거라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의견을 모았다. 그래서 그 금광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고 역사가 서려 있는 남원산성을 향해서 씩씩하게 올라갔다. 남원산성에는 정유재란 때의 성터가 있는 곳이다. 역사의 숨결이 살아서 숨 쉬는 곳이다. 그곳을 지나 땀을 뻘뻘 흘리면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철없는 아이들!


가시덩굴, 칡덩굴, 아까시나무와 소나무 사이를 헤치면서 올라가는 겁 없는 아이들 속에 내가 있었다. 금광의 굴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멀리 남원 시내가 내려다보였다. 금을 캐던 이 굴 저 굴을 정신없이 돌아다녔다.


드디어 번쩍번쩍 빛나는 금(?)을 발견했다. 그 금덩어리(?)는 깊은 굴속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다. 우리 모두 금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다. 본 적이 없었으므로 빛나는 것은 금이라고 생각했다. 조심조심 조금씩 발길을 옮기면서 내려갔다. 물이 있는 황토 흙에 발이 푹푹 빠졌지만, 번쩍거리는 금덩어리 쪽으로 내려갔다. 금은 물속에 잠겨있었다. 번쩍번쩍하는 금덩어리를 집어 들었다. 아뿔싸! 금이라고 잠시나마 꿈이 부풀었던 우리는 그만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그것은 은박지 종이였다. 물속에서 반짝거리면서 빛났던 것은 다름 아닌 ‘백양’이라는 담뱃갑 속에 들어있는 은박지였다. 그러나 꿈 많았던 천진난만한 아이들은 한바탕 웃으면서 내려왔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절로 나온다.




#8. 다시 뒷내 후천리로

다시 고향 마을 시골로 갔다. 혼자서 갔다. 이유는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중학교는 못 가더라도 공부해야 하니 서당을 다니라는 것이었다. 양글(영어)보다 한문을 배우라고 하셨지만, 아마 돈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뒷내(후천리)로 가서 서당을 다니기 위해서 전에 살고 있던 우리 집의 머리방에서 혼자 자취를 시작했다. 서당에 입문했다. 학채는 1년에 쌀 한 가마니다. 처음으로 <사자소학>을 배우기 시작했다. 큰방에 사시는 분은 같은 집안 간인 진두네가 살았다. 도움을 많이 받았다.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시작하였다. ‘부생아신 하고 모국오신이로다.’ 하는 <사자소학>으로 시작하였다. 혼자서 땔감도 준비했다. 6km가 넘는 월둥산으로 갔다. 6·25 때 빨치산의 거점이었던 월둥산이었다. 불에 탄 나무를 톱으로 베어 지게에 짊어지고 온다. 가지고 온 나무는 톱으로 썰고 도끼로 장작을 쪼개곤 하였다. 밥도 혼자서 해 먹어야 했다 간단한 빨래도 혼자서 해야 하는 나 김정호는, 초등학교 친구들이 교복에 모자를 쓰고 토요일마다 오는 것을 볼 때면 '언제 나는 중학교에 가보나.' 하고 부러워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요원한 꿈이었다.


서당! 나의 꿈을 영글게 했던 곳이다. 글을 배운다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낮에는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하고, 밤에는 야학당에서 영어와 주산을 배웠다. 동네의 형들이 야학당을 열었다. 나처럼 중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을 위해서 서당 옆의 노 아무개 집의 2칸 방에서 하루에 두 시간씩 영어와 주산을 가르쳐 주었다. 바로 이것이 나에게 꿈을 심어주는 계기를 마련하여 주었다.


그야말로 심훈의 <상록수> 같은 야학당에서 공부를 가르쳐주는 형들을 보고 비로소 ‘나도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자!’라는 꿈을 갖게 되었다. 어른들이 말씀하시길 늦게 틔는 아이들도 있다고 하였다. 어른은 박절하게 할지언정 자라나는 아이들은 박절하게 하지 말라는 말도 있었다.


아이들은 열 번 스무 번 된다고 하였다. 빈말이 아닌 맞는 말인 것 같다. 내가 바로 그 경우이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제대로 된 공부를 하지 못했던 내가 아니었던가. 야학당이 나에게 꿈을 꾸게 해주고 길을 열어주었다. 유혹도 따랐다. 서울로 야반도주하자는 아이들의 꼬임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거절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실망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나는 <사자소학>을 끝마치고 <학어집>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학어집>도 추석 무렵에 끝마쳤다. 다른 친구보다도 진도가 빨랐다. 공부에 취미가 붙으니, 재미가 있었다. 부지런히 한문을 외우고 쓰고 하기를 반복했다. 12월의 겨울 어느 날인가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어에 남는 날. 남원의 집에서 뒷내로 가기 위해서 5시경 열차를 타고 서도역에 내리니 해는 서산 노적봉( 혼불의 최명희 문학관 뒤의 산)에 걸쳐있었다.


뒷내까지는 6km가 넘는데 벌써 해가 저리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남원으로 가려고 해도 열차가 없다. 마음을 다잡고서 뛰기 시작했다. 삼계성 모퉁이를 돌아 삼은리 앞에 오니 어둑어둑했다. 어린 나이기에 무서웠다. 뛰고 또 죽기 살기로 뛰었다. 바다실(해곡) 앞에 이르러 갈등이 생겼다. 돌고개 재를 넘느냐? 아니면 동산리를 거쳐 산수리를 거쳐 광제정으로 가느냐? 삼계면 소재지로 가느냐?


결국, 조금 가까우면서도 덜 무서운 삼계면 소재지를 거쳐 홍곡리을 지나기로 했다. 완전히 어두운 밤이 되고야 말았다. 인적이라고 보이지 않았다. 뒷내에 도착해서 큰 외숙 집으로 갔다. 외숙모도 외숙도 깜짝 놀라셨다. 그제야 휴 안심이 되었다.




#9. 명심보감

서당에서도 방학이 있었다. 추석 방학이 끝나고 사람의 도리를 알려주는 <명심보감>을 배우기 시작했다. <명심보감>은 인의예지와 충효를 가르치는 책 중의 책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명심보감>은 인륜지대사를 근본으로 하는 책이다.


섣달그믐이 다가오면서 <명심보감>을 끝냈다. 그리고 서당 공부도 끝났다. 그리고 남원의 집으로 갔다. 즐거운 마음으로 갔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허전함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의 후배도, 동창들도, 다들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돈, 돈이 없어서 중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형편이 되지 않는 집에서 억지로 중학교에 간다는 것은 무리였다. 어머님의 밭 품팔이와 아버지의 노동일은, 어린 나이인 나에게 가슴 아픈 일이었다. 나는 동네 친구나 형들처럼 자동차정비공장에 다니겠다고 부모님께 말했다. 아버지께 되게 혼났다. 공부하라고 하시면서 눈물 흘리시던 아버지와 어머니… 아마도 중학교에 보내지 못한 것에 대한 한의 눈물, 아니 가난에 대한 한의 눈물이었으리라.


설이 지나고 다시 뒷내(후천리)로 갔다. 그때에는 정월대보름까지는 모두가 쉬었다. 다시 두 번째로 <명심보감>을 읽기 시작하였다. 훈장 선생님께 효를 실천하기 위해서 다시 읽겠다고 했다. 열심히 하여 두 달 만에 끝냈다. 그때부터 외우는 데는 소질이 있었나 보다. 외우고 쓰고 하기를 반복했다. 비로소 붓글씨의 초서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필로 책을 만들기를 시도했다. 그때 만들었던 몇 권의 책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서투르지만 쓰고 싶었다. 또 써보라고 형들이 말해서 쓰기 시작했다.


물론 야학당에 또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늘 허전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중학생들의 교복과 모자가 눈에 아른거렸다. 3개월이 지나고 남원에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졸랐다. 중학교에 보내주면 수험료를 벌어서 다니겠다고 말씀드렸다. 겨우 허락을 받았다. 단, 시험을 보아서 떨어지면 다시는 중학교에 간다고 말하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중학 입시>라는 책을 서점에서 구매하여 뒷내로 왔다. 열심히 책을 보며 중학교 갈 준비를 하였다.


서당에서는 철저한 개별학습이 이루어졌다. 훈장님 앞에서 전날 배운 글을 아침에 강독한다. 배운 것을 글씨로 써서 보여 드린다. 또 얼마간의 학습할 것을 배운다. 각자의 능력에 따라서 배운다. 철저하게 능력 차이를 고려한 개별학습이었다. 전날 연습하고 또 연습하여 정성스레 신문지에 쓴 것을 선생님께 보여 드리고, 다시 한 줄을 사사 받는다. 그리고 외울 때까지 글을 수없이 반복해서 읽는다. 한동안 글을 읽다가 멈추면, 농사를 짓는 시골 어르신들께서는 새참을 먹는다.


한참을 쉬고 글을 헌 신문지에 쓰는 연습을 한다. 새까맣게 될 때까지 쓰고 또 쓴다. 신문지 한 장도 귀한 때였다. 잘못 읽고 잘못 쓰면 형들이 가르쳐 주기도 했다. 선생님께서 지적하여 주시면 다시 고쳐 쓰며 연습을 계속하고, 다시 글을 읽었다. 글을 읽는 소리가 멀리도 갔다. 글을 읽다가 멈추면 또다시 점심시간이었다.


농촌에서의 점심은 집에 와서 먹기도 하고, 들에서 어머니와 며느리들이 광주리에 이고 가서 들에서 점심을 먹기도 한다. 시간을 절약하고 일을 많이 하기 위해서다. 그토록 열심히 일한 시골 사람들이 왜 그리도 먹고살기가 힘이 들었는지 모른다. 봉천지기(물을 멀리서 대어오거나 비가 와야 모를 심은 논을 일컫는다) 논 한 마지기를 부모님께서 모를 심어놓으시면 그때부터는 가꾸기는 내 차지였다.


풀도 뽑고 논에 물을 대는 것은 내 몫이었다. 비록 아버지가 노동일을 하고 있었지만,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 했다. 저녁 무렵에 가서 논에 물을 대고 온다. 아침에 또 간다. 물이 고여 있을 때도 있지만, 새어 나갈 때도 흔하게 있었다. 물이 두더지 구멍으로 새어버리기도 하였다. 두더지 때문에 생긴 구멍을 찾아서 메웠다. 논의 가장자리에 감나무 두 그루가 있었다. 어린아이의 주먹만 한 감이 떨어져 있으면 논 가장자리에 담가놓는다. 논물이 따듯하니 감이 우려진다.


이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다. 남들보다 책 읽기와 쓰기를 빨리 끝내고 틈이 나면 <중학 입시> 책으로 공부했다.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답을 보고 외워버렸다. 그러면서도 야학당에서의 저녁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영어는 내가 제일 잘했다. 그래서 훗날 내가 영어 교사가 되었는가 보다. 서당에서 동문수학하다가 6개월 후에 전주에 있는 중학교로 간 여자아이가 주산과 암산을 잘했다. 둘이서 영어 시간이냐, 주산과 암산 시간이냐에 따라서 주도하는 분위기가 달라지곤 했다(훗날 전주 전일중학교에서 그녀는 행정실장 나는 교감으로 함께 근무).


그때가 나는 비로소 공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그리고 장래에 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공부를 열심히 했다. 한문 공부도 하고, 야학당도 다니고 중학 입시 공부도 했다. 일요일은 서당은 쉬었다. 쉬는 날에는 어김없이 지게를 지고 ‘월둥산’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 일찍 일어나서 준비하고 출발해야 했다.


큰방의 아들과 같이 갔다. 지게와 톱만 있으면 되었다. 원통산에는 불에 탄 소나무가 널려있었다. 여기저기 온통 불에 탄 나무였다. 6·25 때 빨치산의 본거지여서 불을 질러 소탕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들었다.


그리고 해마다 불이 났다. 그러니 나무가 관솔화가 되어 있었다. 내 힘에 맞게 적당량을 짊어지고 갈 만큼 지게에 올려놓았다. 욕심을 내어 많이 짊어지면 거리가 멀기 때문에 오다가 중간에 버리기도 한다.


아침에는 가벼운 걸음으로 가지만, 올 때는 나무를 짊어지고 오니 힘이 이만저만 드는 게 아니었다. 오다가 시원한 계곡물이 흐르는 정자가 있는 곳 정자골에서 쉰다. 그곳은 아마 지금도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요란스럽게 바위를 휘돌아 굽이치는 곳에 아담하게 정자가 지어져 있었다. 쉴 만큼 쉬면 나무지게를 다시 짊어진 무리가 출발하면 다음 무리가 또 자리를 차지하고 쉬었다. 6km에 가까운 거리에서 땀을 흘려가면서 집에 오면 오후 서너 시쯤 되었다. 점심을 그때에야 먹었다. 잠시 쉬었다가 나무를 토막 내서 도끼로 쪼개어 쌓아 놓으면 하루 일과가 끝났다.


나 혼자 생활하면서 모든 것은 자급자족했다. 호롱불을 벗 삼았다. 등화가친이라는 말이 따로 필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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