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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찬 Apr 17. 2024

<2부> 고생은 추억이 되어

#1. 중학생이 되어

12월이 다가와서 남원의 집으로 왔다.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중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지가 2년이 지났는데 합격할 수가 있을까 하고 아버지, 어머니는 걱정하셨다. 동생들도 걱정을 많이 했다. 경쟁률이 2대 1일이었는데 다행스럽게 합격했다. 아마도 꼴찌로 합격했을 것이다.


아무튼 노력의 결과였을 것이고 그때부터 ‘하면 된다’라는 신념을 가지게 되었다.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영광을 안았다. 입학해야 하는데 교복이 없었다. 모자도 없었다. 눈물겹도록 가난하였기에 더욱 그랬다. 어머니와 함께 장날 남원시장으로 나갔다. 군복을 한 벌 샀다. 양잿물과 검정 물감도 샀다. 집에서 물을 드렸다. 말려서 다림질도 했다. 그런데 군복은 후크를 달 수 있는 카라가 없었다. 와이셔츠형이기 때문에 카라를 접어서 만들었다. 후크는 가느다란 철사를 오려서 고리를 만들어서 끼워 넣었다. 얼마나 잘 만들었을까 마는 그래도 중학생이 되어서 마냥 즐거웠다.


열심히 공부했다. 영어는 쉬웠다. 야학에서 배웠으니까. 국어도 쉬웠다. 서당을 2년이나 다녔으니까. 국어는 국한문 혼용이므로 읽을 사람이 거의 없었다. 국어책 읽는 것은 거의 나의 독차지였다. 시험은 말할 것도 없이 영어와 국어는 거의 백 점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뻐하실 수밖에 없었다.


수학이 어려웠다. 그렇지만 풀고 또 풀고 반복하니 자연스럽게 문제가 풀리곤 했다. 어깨에 공이가 박히도록 일하면서도 자식이 많은지라 항상 가난에 쪼들릴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아버지였다. 수험료를 내지 못해서 집으로 쫓겨 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님은 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마냥 졸라댈 수도 없었다. 집안 형편이 어렵다는 것을 아는지라. 점심도 거의 굶었다. 도시락을 못 싸니 학교 옆이 집이라서 개구멍으로 집에 와서 찬물 한 사발 마시고 남원산성을 바라보면서 ‘나는 공부를 해야 한다’라고 다짐했다. ‘나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죽는다’라고 생각했다. 기어코 공부해서 선생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공책을 살 돈이 없는지라 백지를 사서 4선지를 그려서 영어 숙제를 했다. 연필로 한 번 쓰고 난 뒤에는 잉크로 다시 쓰고 하면서 쓰기를 반복했다. 누가 말을 했는가? “가난은 죄가 아니다”라고. 그러면서도 공부는 열심히 했다. 그때에는 매월 월말고사를 보았다. 1등은 아니어도 상위권에 항상 속해 있었다.


한번은 아버지께서 내 돈을 쓰고도 기분 좋은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셨다. 모두 모르겠다고 했다. 말씀하시기를 그것은 자식이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들을 때라고 했다. 맞는 말씀이었다. 그것보다 더 기분 좋은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힘들게 일하시고서도 몇 푼 받은 간조(일당)로 함께 일하던 분들에게 막걸리를 사곤 하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눈물이 난다. 가엾고 불쌍한 나의 아버지! 하늘나라에서라도 편하고 행복을 누리면서 즐겁게 사시고 계시는지… 그토록 흰 쌀밥에 쇠고깃국을 자시고 싶다시던 우리 아버지! 꿈속에서라도 한번 보고 싶다. 아버지라고 목청껏 불러보고 싶다.




#2. 아이스케이크 장사

1학년 4월 초파일에 동네 형들이 아이스케키(일명 하드)를 팔러 간단다. 나도 따라나섰다. 그런데 돈이 없으니, 외상으로 주지를 않는다. 형들이 말해서 아이스케키 통에다가 아이스케키를 가득 넣고서 첫발을 내딛고 나섰다.


“아이스케키, 얼음과자!” 큰 소리로 외쳐야 했다. 그런데 그 소리가 나오지를 않았다. 부끄럽고 떨리기도 하고 모든 사람이 나만 쳐다보는 것 같았다. 처음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형들 뒤에 따라가면서 ‘나도…’라고 모기소리 만하게 내었다. 형들에게 혼났다. “따라오지 마라. 너는 너대로 다른 곳으로 가서 팔아라.”


죽든지 살든지 해야 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겨우 ‘아이스케키, 얼음과자!’를 외쳤다. 반복해서 해보니 모기소리만 하게 나오던 ‘아이스케기, 얼음과자’ 소리가 점점 크게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는 크게 소리가 나왔다. 이것이 아이스케이크 장사의 시작이었다.


얼마를 벌었는지는 자세히 모른다. 아이스케키 하나를 먹고 싶어도 먹지 않았다. ‘하나에 얼마인데’라는 생각에서다. 몇 개를 팔아야 하나 값이다. 한 통을 팔고 다시 물건을 받으러 오면 그때 하나씩 준다. 그것을 내가 먹을 때도 있었지만, 먹지 않고 보태서 팔기도 했다. 적지만, 그 당시로는 학용품을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처음으로 돈을 벌어본 경험이었다.


얼마간의 이득금이 생기니 어머니 생각이 났다. 국수를 한 묶음 사서 집으로 왔다. 저녁에 삶아서 가족이 함께 먹었는데 가슴이 뿌듯했다. 그 후로는 일요일마다 아이스케키 한 통을 메고 약 7km 떨어진 금곡교(곡성과 금지 사이의 다리)까지 가서 팔면서 남원 쪽으로 올라왔다.


빈 비료 포대나 빈 병(콜라, 사이다, 정종병, 소주병 등)을 받으면 수입이 짭짤했다. 특히 큰 소주병 또는 백화수복의 정종병이 더 수입이 짭짤했다. 돈으로 받을 때보다 좋았다.


여름방학이면 비가 오지 않는 한 계속 ‘아이스케키, 얼음과자!’를 외치면서 아이스케키를 팔고는 했다. 동창들은 나를 보면 어떻게든 하나씩이라도 사 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동창들이었다. 오후 서너 시가 되면 다 팔고 돌아와 다시 조금 떼어서 시내 이 골목 저 골목을 돌아다니면서 ‘아이스케기, 얼음과자’를 외치면서 팔았다. 중학교 3년 동안 내내 아이스케키 장사로 학용품과 참고서를 사서 썼다. 아이스케키를 팔고 돌아올 때는 꼭 국수 한 묶음을 사서 가지고 오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날만은 어머니와 동생들이 맛있게 국수를 먹는 날이었다. 아버지는 고되게 일하고 오시기에 밥을 해드렸다. 배불리는 먹지 못해도 먹을 만큼은 먹었다. 아마도 어머니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내가 국수를 사서 가지고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린 동생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동생이 여럿이었으니 국수 한 묶음으로 먹어야 얼마나 많이 먹었겠는가? 지금도 그때의 습관이 남아있어 국수를 즐겨 먹는다. 때로는 마른국수뿐만 아니라 물국수(말리지 않은)를 사서 들고 왔다. 물국수는 콩국수를 만들어 먹는데 제격이어서 그랬다.


아마 그때의 경험이 지금도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성격이 되었는가 보다. 부끄러움보다는 좌절하지 않고 도전하는 정신이 몸에 배었는지도 모른다. ‘아이스케키’ 장사는 중학교 졸업과 동시에 끝이 났다.




#3. 확독(돌로 만든 절구)에 보리도 밀도 갈다

보리밥이라도, 아니 풀떼 죽이라도 마음껏 먹는 식사라면 그래도 배고픔을 모르고 자랐을 것이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확독에 보리를 갈고 밀을 갈고 하는 일은 내 차지였다. 보리를 곱게 갈아야 밥이 부드러웠다.


밀을 갈아서 개떡도 쪄 먹고, 풀떼 죽도 쑤어 먹었지만, 보리를 가는 것도 어머니를 도와주는 일이라 아침저녁으로 보리를 가는 일은 내 차지였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정호야! 뭐 떨어질라’ 하면서 웃기도 하였다. 여자들이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그랬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으시고 뼈가 으스러지도록 일하시는데 어디에서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어올 곳이 있었겠는가? 어머니는 항상 남의 밭에 나가서 밭 품팔이를 하는 데다 동생들이 다섯이나 되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절구질도 물론 내가 거의 다했다. 바로 밑의 동생이 나를 도와주기도 했다. 김치를 담을 때도 고추는 내가 갈아주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고추를 갈아주면 어머니는 거기에 간을 했던 배추나 무를 버무렸다. 고추를 갈다 보면 손이 매워서 후들거렸다. 여린 손이기에 그랬을 것이다. 모두가 뼛속 깊이 남아있는 추억이다.


딸이 어리고 여자라고는 어머니 한 분이었으니 내가 큰아들 역할, 딸 역할까지 했다.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렇게 고생하시면서도 유독 자식 사랑이 남다르셨다. 그 사랑 속에 우리는 건강하게 살고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하늘나라 어디에서 살고 계시는지 꿈에라도 모습을 보았으면 한이 없겠다.




#4. 잡일은 나의 몫

그때는 포장된 도로가 없었다. 포장된 도로라야 겨우 자갈을 깔아 도로였다. 그래서 아침 일찍 도로에 나가서 정해진 구역에 자갈을 모아 놓는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확인이 끝나면 모아 놓은 자갈을 또다시 깔아 놓는다.


그것이 도로 포장의 전부였다. 그것이 바로 신작로였고, 자갈길이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진 뒷밤터(율치) 마을 앞이었다. 도로 정비를 맡은 지역이 그곳이었고, 할당된 지역이었다. 거의 4km는 족히 되었다. 어디 그뿐이랴. 당시에는 사방공사라는 부역이 있었다. 홍수도 자주 났다. 큰비가 오면 으레 홍수가 났다. 우리 마을의 담당구역은 요천교 근방의 산이었다. 집에서 거의 6km 이상은 되었다. 배정받은 사방공사 구역을 끝마쳐야 집에 왔다.


아버지는 한 푼이라도 벌어야 우리 식구가 먹고살기 때문에 부역은 내 차지였다. 동생은 이모가 살고 계시는 삼계면 세심리에서 깔 머슴을 하며 살고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내 기억으로는 일요일마다 국토 사방공사장에 갔다. 그렇지 않으면 궐(요샛말로 벌금)을 내야 했다. 그러니 궐 낼 돈이 있으면 좋지만, 궐낼 돈이 없으니, 몸으로 때울 수밖에 없었다.


점심을 싸서 가지고 가야 했는데 반찬도 없고, 양식(쌀 또는 보리)도 없는 날에는 물국수 사다가 콩국수를 만들어서 아침밥으로 먹었다. 그리고 그것을 도시락에 싸서 가지고 풀숲에 다 숨겨 두었다가 먹었다. 점심시간이 되었을 때 그것이 어찌 되었을까 상상에 맡겨본다. 그러나 그것도 맛있었다. 허기진 배였으니 그렇다.


그러한 추억이 오늘의 나를 만들어 준 밑바탕이고 삶에 대한 원동력이 된 것은 아닌지를 되새겨본다. ‘가난은 죄가 아니다.’라는 말을 마음속 깊이 새기고는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말이 맞았다. ‘도둑질만 하지 말고 무슨 일을 하여서라도 살아가라’ 하던 어른들의 말씀이 맞았다. 어쩔 수 없는 형편인데 불평만 할 수는 없었다.




#5. 땔감 나무도 나의 몫

아이스케키를 팔 수 없는 여름이나 겨울이 되면 땔감을 준비하는 일은 내 몫으로 돌아왔다. 아침 일찍 동네 아주머니들을 따라나선다. 지게를 짊어지고 뒤에 따라갔다. 그런데 아주머니들이 데리고 가려고 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멀리 뒤에서 따라갔다.


남원에서 전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뒷 밤터의 고개까지 갔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이 나무를 하러 다녔기 때문에 나무가 없었다. 죽은 나뭇가지는 내 몫이고 솔잎은 아주머니들의 몫이었다. 나무를 하는 것은 오후 서너 시면 끝이 났다.


점심? 생각지도 못했다. 잘하면 고구마를 삶아서 가지고 오시는 아주머니들께서 한두 개 주어서 그것을 얻어먹었다. 그래도 꿀맛이었다. 산에서 나무를 해서 가지고 오면 산림계 직원이 지키고 있다. 밝은 낮에는 돌아오지 못한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면 비로소 산에서 내려왔다. 좋은 길로 오면 애쓰게 한 나무를 산림계 직원에게 빼앗기고 만다.


그래서 길을 돌고 돌아 집에 오면 밤 10시 가까이 된다. 때에 따라서는 고되게 노동일을 하고 오신 아버지께서 멀리까지 마중을 나오시기도 하셨다. 그때는 아버지 뒤를 따라오면서 정담도 나누고는 했다. 겨울방학에 나무를 한 것은 여름방학 때까지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여름방학에 한 나무는 겨울방학 때까지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어머니와 같이 갈 때도 있었다. 어머니는 솔잎을 긁어모았다. 팔기 위해서였다. 한 푼이라도 돈을 벌어야 하는 우리 집의 형편이었다.


재미있는 웃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 한 번은, 토요일 오후에 어머니와 둘이서 큰 묘가 있는 곳까지 가서 죽은 나뭇가지, 혹은 죽은 나무뿌리를 캐서 오다가 산림계 직원(별명이 꼬시리)에게 걸렸다. 보내달라고 사정사정했으나 헛수고였다. 점점 심통이 났다. 나도 커서 산림계 직원이 되어서 이곳으로 와야겠다고 했다. 큰소리를 치면서 어머니! 그냥 주고 가자고 했다. 불 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고 말았다. 아쉬운 것은 나였는데 겁이 없었다.


그러기를 한 시간쯤 지날 무렵 동네 친구 어머니가 나무를 머리에 이고 오다가 붙잡히게 되었다. 산림계 직원과는 아는 사이였고 좀 떨어진 마을 사람이었으니 우리 것만 빼앗고 그 아주머니만 보내줄 수가 없었던지 그냥 가지고 가라고 했다. 고맙다고 사과하고 집으로 오면서 웃었다.


이렇게 우리 집은 모두가 열심히 살았다. 동생은 초등학교 졸업하고 이모네 집에서 깔 머슴으로 일하면서 밥을 먹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고 아프다. 둘째 동생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택시업체의 정비공으로 갔다. 밥이라도 굶지 않고 살기 위해서였다.


나만 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니, 가슴이 아팠다. 모두가 배를 주리고 일하면서 모으고 또 모으고 한 돈으로 산골짜기 논도 서너 마지기 정도 샀다. 우리 논이 생겼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그 어렵사리 샀던 논과 내가 발령받아 모은 돈으로 샀던 논에 지은 집, 모두 동생에게 주고 우리는 시내로 셋방을 얻어 나갔다. 그래야 동생에게 십분의 일이라도 빚을 갚을 것 같아서였다. 그곳에서 어머니와 동생들이 살고 동생도 결혼시켜 주었다.


지금도 바로 아래 동생은 그 집에서 살고 있다. 향교동 장승리에서 맨 앞쪽에 있는 집이 바로 꿈이 잔뜩 배어 있는 집이다.




#6. 전주로 고등학교를

그렇게 어려운 환경이지만, 공부에는 소홀하지 않았다. 첫째는 고된 노동일을 하시는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서였고, 두 번째로는 꿈이었던 교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남원에서는 경쟁이 치열했던 전주교육대학교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잘해야 1년에 한두 명이 들어가던 시대였다. 남원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해서는 꿈을 이룰 수 없다고 들었다. 부모님을 졸라서 장학생으로 다니겠다고 하면서 전주신흥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처음에는 3개월은 열차로 통학하였다. 전주 남부시장에 가서 어렵사리 장만한 헌 교복을 입고 가방 대신 책보에 책을 싸서 들고 전주역에서 내려 걸어가곤 했다. 부지런히 걸어가야 했다. 우리 집에는 시계가 없었다. 그래서 별을 보고 시간을 알아보았다.


그 시절에는 북두칠성의 위치를 보고 대강의 시간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았다. 나 때문에 부모님은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새벽 5시 20분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야 했기 때문이었다. 집에서 역전까지는 논길로 가도 거의 1.3km는 족히 되었다. 기적이 울리면 기차가 출발한다는 예비 신호였다. 그러면 가다가 죽기 살기로 뛰었다. 그 열차를 놓치면 8시 30분에 출발하는 열차를 타고 가야 했다. 그러면 오전 수업은 끝나야 겨우 학교에 도착했다.


한 번은 이러한 추억도 있었다. 집에서 나오자마자 기적이 울렸다. 역으로 뛰어가면 절대로 타지 못한다는 생각에 남원농업고등학교 쪽으로 뛰었다. 기차가 기적을 울리고 칙폭 칙칙폭폭 하면서 출발했다. 출발하자마자 오르막이어서 기차는 힘이 없어 잘 못 올라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죽어라 논길을 가로질러 뛰고 또 뛰었다. 기관사 아저씨가 달려오는 나를 보았는지 속도를 줄여주었다. 그리고 차장 아저씨가 나를 잡기 위해서 손을 내밀었다. 차장 아저씨의 손을 잡고 올라탔다. 그 아저씨들이 너무도 고마웠다. 기관사 아저씨와 차장 아저씨가 그렇게 고마울 데가 없었다.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고, 잊히지 않는다. 열차는 내가 올라타면서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기관사 아저씨, 차장 아저씨와 나. 삼박자가 맞아 그날도 지각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3년 동안 결석을 하지 않고 졸업했지만, 열차 통학을 하여서는 도저히 공부할 시간이 나질 않았다.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9시 열차를 타고 집에 오면 거의 11시가 되었다. 다음 날 아침, 또다시 5시 20분에 출발하는 열차를 타야 했다.


어떨 때는 새벽 3시 20분에 출발하는 열차를 탈 때도 있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북두칠성의 별자리를 볼 수 없는 구름 낀 밤에는 대강 시간을 계산하고 깨웠다. 그리고 이불속에 묻어둔 밥을 먹고 기차를 타러 가야만 했다. 물론 어머니와 아버지는 잠을 제대로 주무실 리 없었다.


자다가 나가서 별자리를 보고 또 보고 대강 지레짐작으로 시간을 알아서 나를 깨우고는 했으니 잠을 편히 주무실 날이 없었다. 독자들께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지만 전설 같은 사실이었다.




#7. 점심 도시락?

나는 학교에 다니면서 점심의 도시락은 생각지도 못했다. 김치 외에는 반찬이 없었다. 어쩌다 도시락을 싸주실 때도 있었다. 김치 냄새가 책상 속에서 어렴풋이 날 때면 주위를 돌아보고는 했다. 그때는 커피 병에다 김치를 넣어 가지고 오는 학생이 부러웠다. 집에서는 어머니와 동생들이 점심을 굶는데 나 혼자서 점심 싸서 가지고 와 먹는다는 것은 큰 죄를 지은 것 같은 생각이 들곤 했다. 김치 냄새를 핑계 삼아 점심을 가지고 가기 싫다고 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절식한다고 밥을 일부러 적게 먹거나 절식하는데 절약도 절약이려니와 양식이 풍부하지도 않아서 먹지를 못했다, 그때에는 비단 우리 집만 그러는 것은 아니어서 덜 창피했다. 지금 생각해도 배곯는 데는 이골이 나 있었다. 새벽 다섯 시에 이불속에서 꺼낸 밥 한 그릇을 먹었다. 집에 와서 다시 밥 먹는 시간은 이르면 저녁 8시였다. 9시 열차를 타고 오는 날은 11시쯤 먹었다. 점심을 굶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굶는 데는 익숙하다.


우리 부모님은 왜 그리도 자식을 위해서 헌신하셨는지 모르겠다. 자신들의 고생을 물려주지 않겠다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마음을 누가 알겠는가.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머리를 뽑아 신발을 만들어 드려도 은혜는 다 못 갚을 것이다. 하늘보다 바다보다 더 높고 더 깊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은혜. 아! 하늘나라에 계시는 아버지! 어머니! 불러도 불러보아도 대답이 없으신 우리 아버지! 어머니!




#8. 자취를 시작하다

고등학교 입학한 지 3개월이 지나면서 전주 고등학교에 다니는 중학교 동창 박 아무개와 함께 아중리 방죽 밑에 있는 오두막집에 200원짜리 방을 얻어 자취를 시작했다. 흙집이고 벽에 벽지도 바르지 않은 작은 방이었다. 부엌은 비가 오면 비를 맞아야 하는 집이었다. 그 집도 우리 집만큼이나 가난하여서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고 있었다. 그 집 식구들은 잡동사니 일하러 다니고 있었다. 아저씨는 계시지 않았다. 아주머니, 아들들, 며느리와 손자가 좁은 방에서 함께 사는 집이었다. 원래는 우리가 자취하는 방에서 큰아들과 며느리가 자고 생활했는데 워낙 가난해서 우리에게 월세를 준 것 같았다. 여름 내내 아중리에서 신흥고등학교까지 걸어서 다녔다. 등교할 때는 비가 오지 않다가 하교할 때 비가 오면 비가 그치기 시작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왔다. 그래도 비에 젖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공부하는 데는 소홀하지 않았다. 호롱불이지만 감지덕지하면서 형설지공은 아니더라도 호롱불에 불편이 없이 공부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여름을 보냈다.


방학 때도 나 혼자 남아서 학교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아무러면 어쩌나, 된장국과 밥 한 그릇이면 족한 것을. 감자 아니면 양파와 된장만 있으면 국을 끓였다. 어쩌다 어머니의 정성 어린 김치가 있으면 맛있는 반찬이고 진수성찬이 되었다. 가끔은 멸치조림도 해주실 때가 있었다. 아중리에서 신흥고등학교까지는 너무 멀었다. 거의 한 시간 이상을 걸어 다녀야 했다. 그러던 중, 가을이 지날 무렵 1년 선배인 전 아무개와 중화산동 미나리꽝 옆에 있는 조그마한 집에 방을 얻어 가게 되어 아중리 방죽 밑의 자취생활을 청산하게 되었다. 전주고등학교에 다니는 박 아무개와 헤어지게 되었다. 그는 하숙집으로 옮겨갔다.


새로 얻은 방은 부엌방이었고, 불을 때도 온기가 없는 온돌방이었다. 부엌도 주인과 같이 사용했다. 아주머니는 밭 품팔이를 하고 아저씨도 막노동하는 집이었다. 큰딸은 팔복동의 섬유공장에 다녔다. 아주머니는 가끔 반찬도 주시곤 했다.


나무는 집에서 정성스럽게 장작을 조그마하게 잘라서 쪼개고 또 쪼개고 해서 망태(집으로 만들어 물건을 넣는 것)에 담아주면 일요일에 오후 5시 열차를 타고 왔다. 지금의 시청 자리에서부터 짊어지고 시내를 거쳐 자취 집으로 갔다. 사람들이 쳐다보았지만, 창피 따위는 전주천 물에 흘려보내 버렸다.


도둑질만 아니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장작이면 2~3주는 밥을 해 먹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덧 2학년이 되었다. 형편이 나아져서 도시락도 가끔 쌌다.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자취방에서 하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성적은 물론 상위권이었다. 하는 놈한테는 어쩔 수 없지 않은가?




#9. 자유세계와 프리월드

그렇게 공부하는 시간이 가고 있었다. 당시에 진 아무개가 1학년에서부터 3학년 교실까지 다니면서 팔고 있었던 ⪕'자유세계'와 '프리월드'⪖라는 잡지가 있었다.


하루는 진 아무개에게 만약 다른 사람에게 넘길 거면 나한테 넘겨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던 중 1학년 2학기 중반쯤에 그가 나에게 넘겨주었다. 적지만 용돈이 생겼다. 한 달에 한 번 나오는 월간이었고, 한 권당 50원하는 것으로 이익은 한 권당 5원씩 남았다. 200부 이상 나누어주고 1주일 후에 돈을 받기 시작했다.


신흥고교의 동문들은 그리스도교의 신앙심이었는지 돈도 잘 주었다. 얼마간의 돈이 있으니 자취하는 데도 보탬이 되고, 책을 사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그때부터는 남부시장에서 닥나무대(한지를 만들기 위해서 껍질을 버끼고 난 속 대)를 사다 때기 시작했다. 전 아무개와 물론 반반이었다. 아버지께서 장만해 주시는 장작을 망태에 메고 오지 않아도 되었다.


전 아무개는 남원시 북부시장에서 형이 맥줏집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형이 함께 살고 있었다. 가끔 심부름하곤 했다. 그럭저럭 2학년 1학기도 마치게 되었다. 전 선배가 열심히 공부하니 나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열심히 했지만. 뒤지지 않기 위해서였다. 전 선배는 실제 나이는 나보다 한 살 아래였다. 하지만, 나는 그를 선배로 깍듯이 대해주었다. 여름이 다 갈 무렵, 같은 급우였던 최 아무개와 나, 전 선배가 의기투합해서 다시 자취방을 옮겼다. 중화산동 교회가 있는 곳으로 옮겼다. 기전여고 한문 선생님 집으로 이사를 했다. 기와집이고 마당도 제법 넓은 집이었다. 역시 부엌방이었지만, 깨끗하고 제법 방이 컸다. 그리고 땔감을 때지 않는 집이었다. 연탄을 때는 아궁이였다. 남부시장에서 땔감으로 닥나무(종이 만드는 나무속)를 사 오는 일이 또한 필요가 없었다. 연탄 부엌이니 자연히 연탄을 사 땔 수밖에 없었다. 밥을 하는데도 시간이 절약되었고, 셋이 함께 자취하고 있으니 각자 집에서 돌아가면서 김치도 담가오곤 하였다. 반찬거리도 넉넉했다. 왜 그리 연탄불을 자주 꺼트리는지 꺼질 때마다 다시 불을 붙이는데 연기를 뒤집어쓰고는 했다.


그때마다 후덕하신 사모님과 시누이가 연탄을 바꾸어 주곤 했다. 한두 번이 아니니 미안하기도 해서 숯과 나무를 넣어서 살리기도 했다. 요즈음 같은 번개탄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다. 신앙심이 두터운 집이라 가끔 맛있는 반찬을 만들면 주기도 하고 김치를 담그면 주기도 하는 등 인심이 후덕하신 집이었다. 중화산동이 개발되어 어디가 어딘지 알 길이 없는 게 아쉽다.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전할 길이 없다.




#10. 열차의 추억

칙칙폭폭! 칙칙폭폭! 열차에는 두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미카’인데 큰 바퀴가 네 개인 열차다. 다른 하나는 바퀴가 더 크지만, 세 개인 ‘터우’라고 하는 열차였다. 짐을 실은 열차는 ‘미카’ 몫이고, 급행열차와 특급열차는 ‘터우’의 몫이었다.


사람이 타는 열차는 거의 ‘터우’였고 ‘미카’는 화물차와 완행열차였다. 새벽에 사람을 태우고 익산역까지만 가는 열차는 순전히 통학생만을 위한 시간대에 맞춰있었다. 남원에서 출발하여 서도, 오수, 봉천, 오류, 임실, 관촌, 남관, 신리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이 주로 타고 다녔다.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리고 다시 올라타는 일은 아무나 하지 못했다. 차비가 없었다. 도둑차를 타야 했다. 차장이 차표 검사를 했다. 전주로 올라갈 때는 오류에서 임실 사이에서 차표 검사를 했다. 거의 날마다 그랬다.


이유는 오르막길을 오르느라 열차의 힘이 없어 속도가 느려서 한꺼번에 앞칸에서부터 뒷칸까지 차표 검사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차비가 없어 표를 사지 못할 때가 더러 있었다. 차장이 앞에서부터 검사를 해오면 맨 뒤로 가서 뛰어내렸다가 앞으로 뛰어갔다. 차장이 지나갔을 칸까지 뛰어가서 올라탔다. 물론 차장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모른 체 했을 것이다. 그 당시의 차장 아저씨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했다.


전주역에서는 역무원들께서 지키고 있었다. 역무원을 피해 개구멍으로 가야만 했다. 역에 들어설 때쯤이면 기차의 속도가 줄어든다는 것을 알고 역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뛰어내린다. 그렇지 않으면 출구로 가지 않고 철조망의 개구멍을 찾아서 나갔다. 하교 후에도 개구멍을 통해서 들어갔다. 아니면 멀리서부터 철길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 태연히 걸어갔다. 역무원님들께서도 알면서도 모른 척해주었다. 워낙 가난했던 시절이라 많은 학생이 그랬다. 내려올 때는 남관에서 관촌 사이에서 차표 검사를 했다. 역시 뛰어내렸다가 다시 탔다. 위험한 일인 줄 알면서도 차장 아저씨한테 걸려서 붙잡히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자취할 때도 도둑열차를 탔다. 집에서 주시는 돈으로 90원이나 하는 차표를 사버리면 생활비가 부족하여 힘이 들었다. 지금의 90원은 돈의 가치가 별로지만. 그때의 90원은 큰돈이었다. 그러니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차표를 사지 않고 개구멍을 통해서 들어가고 개구멍으로 빠져나오는 등 도둑열차를 탈 수밖에 없었다. 많은 학생이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무모한 짓이었는지. 가끔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아찔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내 가슴을 짓누르곤 한다. 그 당시의 차장 아저씨와 역무원 아저씨들께 이 자리를 빌려서 죄송하고 고마웠다고 인사드린다. 매우 감사하다는 말씀도 전해본다.




#11. 수업료 내기 힘들어

세월은 빠르게 지나갔다. 분기마다 내어야 하는 수업료 때문에 항상 가슴을 졸였다. 우리 가정에서는 버거운 일이었다. 담임선생님께서 독촉하기 시작하셨다. 사립학교이다 보니 수업료는 학교 운영비와 선생님들의 봉급이었다. 수업료가 걷히지 않으면 학교에 어려움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1학년 때는 김 선생님, 2학년 때는 권 선생님, 3학년 때는 조 선생님이 담임선생님이셨다. 세 분 다 본받을 만한 훌륭한 선생님이셨다. 그 당시의 신흥고교의 선생님들은 모두가 신앙심이 두터운 선생님, 실력이 뛰어나신 선생님이셨다.


몇몇 선생님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학으로 옮기셨다. 졸업 후 몇 년 사이에 그러셨다. 참으로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난 것은 나의 행운이었고 복이었다. 그분들 중에서 김동학 교수님과 민병찬 교수님은 전주교육대학교에서 다시 스승님으로 만나게 되었다. 3학년이 되자 전 선배님은 졸업하고 전주교대로 입학하며 선생님이 되는 길을 택하였다. 전 선배와 마찬가지로 윤수만 선배, 박형권 선배는 잊히지 않는 고마운 선배님들이다.


지금도 만날 때가 가끔 있다. 윤수만 선배님은 전국 교장단 회의에서 두어 번 만났다. 경기도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셨다. 다정다감한 선배님들, 잊을 수 없는 선배들이다.


다시 방을 옮기게 되었다. 최성렬과도 헤어지고 새로운 파트너로 박좌순과 중학생인 박찬학과 함께 누님이 아는 집이 있는 용머리고개의 안행사 들어가는 골목으로 이사했다. 그 집은 농사를 짓는 집으로 보리타작을 전문으로 하는 집이었던지 보리를 싣고 들어오면 내려주곤 했다.




#12. 누님을 만나다

잠깐 여기서 누님을 만나게 된 사연을 여기에 글로 적어본다. 비 오는 어느 여름날이었다. 2학년 1학기였다. 그날은 남원에서 밤 3시 20분에 출발하는 열차를 탔다. 쌀을 짊어지고 자취하는 집에 갖다 놓고 학교에 가야 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빈자리가 많았다. 이른 새벽이고 남원에서 출발하여 서울까지 가는 열차이니 그랬다.


관촌에서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예쁘고 통통한 아가씨가 탔다. 빈자리를 놔두고 내 옆자리에 앉는다고 했다. 무심코 앉으라고 했다. 전주에 다 올 때까지 그저 희미한 불빛이지만 책만 보고 있었다.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데 인연은 묘한 것이다. 나에게 다정다감한 누님이 생기도록 하느님이 기회를 만들어 주셨던가 보다.


한벽루의 조그마한 굴속에서 두 연인이 열차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열차가 급정거했다. 내려서 사고가 난 곳으로 달려가서 보았다. 보고 와서 잘려 나간 살점과 허벅지를 보았다고 했다. 비가 내리기에 자살한 연인들의 한이 서린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옆에 있는 아가씨가 무척이나 무서웠나 보다. 전주역에서 내려서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물론 우산도 가져오지 않았나 보다. 나는 자취하는 곳에 짐을 가져다 놓고 학교에 가야 한다고 했다. 나를 따라가겠단다. 무서워서 혼자는 못 간단다.


여름이지만, 새벽 다섯 시쯤인지라 날이 완전히 밝아오지 않았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니 그럴 수밖에 없었나 보다. 중화산동 자취 집까지 갔다. 함께 우산을 받쳐 들고 짐을 내려놓고 바로 학교를 향해서 둘이 함께 걸어갔다. 신흥고 앞에서 우산을 주고 헤어지자고 했고 헤어졌다. 후일을 기약하는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 아가씨는 그렇게 갔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난 토요일 느닷없이 그 아가씨가 찾아왔다. 자취하는 집으로 점심시간에 왔다. 깜짝 놀라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반가웠다. 큰방 집에 창피하기도 하고 해서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다가공원으로 가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하다가 남부 시장 옆 버스터미널이 있는 빵집으로 가서 빵도 사줘서 먹었다. 맛있게 먹었다. 자취집으로 가져와서 나누어 먹기도 했다.


운암에서 양장점을 운영한단다. 나이도 나보다 한 살 많았다. 막내딸이라는 것도 그때 말해 주었다. 그리고 나를 동생으로 삼고 싶다고 했다. 나는 형도 누님도 없어서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누이와 동생으로 맺어지는 행운을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았다. 그 뒤로는 매주 토요일에 오든지 일요일에 오든지 하였다. 그때마다 나를 시내로 데리고 나가서 짜장면도, 빵도, 학용품도 사서 주고 갔다. 아무런 대가도 없었지만, 나를 친동생처럼 여겼다. 누님도 형도 없는 나는, 진심에서 우러나와 누님으로 생각하고 깍듯이 대했다. 그러면서 누님은 조카를 부탁하게 되었다. 그 조카가 바로 나와 함께 용머리고개에서 자취를 시작하고 함께 공부하게 된 박찬학이다. 운암으로 가서 누님의 어머니도 뵈었고 오빠들도 뵈었다. 참 좋은 분들이었다. 수몰지구여서 위쪽으로 이사를 했던 분들이었다. 교복 상의도 누님이 손수 만들어 주었다.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많은 도움을 받았다. 


졸업할 무렵에 누님은 좋은 분을 만나 결혼하였다. 임실에서 결혼식을 하는데 내가 사회를 보았다. 그 후, 나는 교육대학으로 진학했다. 그리고 4월 9일 곧바로 군대에 입대하였다.




#13. 안행사 골목의 자취생활

다시 용머리고개 안행사 가는 골목에서의 자취생활로 돌아가 보자. 그때부터는 김치도 손수 담가 먹었다. 옛날의 추억을 더듬어서 해보았다. 어머니를 도와서 고추를 갈던 솜씨를 발휘했다. 배추와 소금, 고추와 마늘 몇 쪽만 있으면 되었다.


배추는 남부시장에서 사 왔다. 고추를 한참 갈다가 밥을 두어 숟갈 넣고 다시 곱게 갈았다. 다시 마늘과 소금을 넣고 갈기를 반복했다. 맛을 내는 미원도 넣었다. 싱싱한 김치이므로 맛이 있었다. 얼마나 맛이 있을까마는 그래도 박좌순, 박찬학과 나는 맛있게 먹었고, 도시락도 싸갔다.


일주일에 한 번이면 족하였다. 국을 빠짐없이 끓여 먹었다. 감자와 양파, 그리고 된장만 있으면 되었고, 맛을 내기 위해서 미원은 필수적이었다. 어떨 때는 아침에 도시락을 싸는 대신에 두 그릇의 밥을 한꺼번에 먹고 갔다. 그리고 저녁 늦게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오는 도중에 번데기를 십 원어치 사서 가지고 와 저녁을 먹곤 하였다. 방학 때는 주로 나 혼자여서 그랬다. 예수병원 입구에는 항상 번데기를 파는 아주머니가 계셨다. 박좌순도 집에 가고, 박찬학도 집에 가고 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전기는 마음대로 쓸 수가 없었다. 밤 열 시가 넘으면 꺼야 했다. 역시 호롱불이 최고다. 나 혼자 공부하니 방 전체가 밝을 필요는 없었다. 벽을 방바닥 삼아 기대고 공부했다. 누우면 잠을 자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교대에 갈 거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그랬다. 그래도 서울에 있는 일반대학에 가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한갓 꿈으로 끝이 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3학년 2학기 9월까지는 ⪕프리월드⪖와 ⪕자유세계⪖를 계속 팔았다. 그래야 모든 것을 해결할 수가 있었다. 비바람이 불어도 세월은 흘러 3학년 2학기가 되었다. 서서히 원서를 쓰기 시작했다.


없는 살림이었기에, 교대를 제외하고 다른 대학으로 가는 것은 분수에 맞지 않았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 다리가 찢어지고 마는 형국이 될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급우들은 서울로 간다, 4년제 대학이다, 전북대학교로 간다, 모두가 난리다. 하지만, 나는 교육대학교 가야만 했다. 그래도 망설여졌다. 아버지와 어머니께 대학에 가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니 빛을 내어서라도 교대 2년은 가르쳐 주시겠단다. 서울은 안 된단다. 무엇이 있어야 가능하지 않은가? 맞는 말씀이었다. 수학 감석기 선생님께서 3개월만 서울 가서 견디란다. 가장 친했던 정준조도 공주사범대학으로 같이 가자고 했다. 나는 수학교육과를, 친구는 생물교육과에 간다고 하면서 친구의 하숙비를 갖고 같이 자취하자고 했다.


그런데도 학비가 없었을뿐더러 4년을 다녀야 한다는 것은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으로는 불가능했다. 참으로 고맙고 좋은 친구였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당장 그 많은 등록금도 문제고, 동생들도 있어서 더욱 그랬다.


교육대학교로 원서를 써서 제출했다. 시험을 보아서 무난하게 상위 그룹으로 합격하였다. 부모님께서 어렵사리 등록금을 마련하여 주셨다. 그리고 용머리고개의 자취하는 집도 박좌순이가 떠나고, 찬학이만 남게 되어서 같이 자취하기로 했다. 3월이 되고 입학도 하였다.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다. 교복도 필요해서 남부시장의 헌 옷 가게에 가서 샀다. 그 당시에는 헌 옷 가게가 번창했다. 꿈에 그리던 교사가 되기 위해서 한 발 내딛는 교육대학생이 되었다.


전 선배도 윤 선배도 신 선배도 고등학교 1년 선배님들로부터 환영파티도 받았다. 그리고 서로서로 자기네들의 써클(동아리)에 들어오라고도 했다. 정신없이 3월이 가고 있었다. 학생회의 대의원에도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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