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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찬 Apr 17. 2024

<3부> 대한민국 군인

#1. 군대 생활의 시작

따뜻해지는 사월이 되었다. 우연히 남원 시내를 걷다가 큰 외숙을 만났는데 영장이 나왔단다. 나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1학기에 신체검사를 받았고, 같은 집에서 셋집을 살고 있는 병무청 다니는 분에게 부탁하여 예비보충역으로 편성되게 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느닷없이 4월 5일 영장을 받았다.


4월 9일에 35사단으로 입영하라는 통지였다. 자취생활도 청산하고 휴학 처리했다. 입대하지 않고 기피할 생각도 해보았다. 그러나 법은 법이고, 법을 어겨서는 살 수가 없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은 갖지 말자. 비록 교육대생에게는 학군단이 곧 생길지 모르지만, 군대에는 반드시 가야 한다고 생각을 굳혔다. 1969년 4월 9일 35사단으로 입영했다. 지방사단이기에 보병은 아니고 특과 병과라고 했다. 훈련이 시작된 지 2주 만에 법으로 교육대학생에게는 학군단이 생기게 되었다.


군대에 가지 않고 일 년에 한 번 2년에 걸쳐서 두 번의 35사단 입영교육과 5년의 의무 기한을 채우기 위해서 교사로 근무해야 한다. 의무연한을 채우고 사표를 내고 다른 직장에 가도 되었다.


4월 11일부터 훈련이 시작되었다. 사람이 새롭게 태어난다는 군대에서의 교육이었다. 6주간의 교육은 그야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제식훈련, 총검술, 태권도, 구보, 사격 등이 훈련의 기본이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이 35사단 옆의 오리 방죽이었다. 그 오리 방죽 제방에 가면 으레 M1 소총을 거꾸로 들고 꽥꽥하고 무릎 걸음걸이는 기본이었다. 그곳에 오갈 때는 오리걸음이 기본이었다. 햇살이 내리쬐는 봄날이다. 배는 허기지고 땀은 나고 몸은 천근만근이나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도 시간은 가고 6주간의 훈련이 끝났다.


훈련을 마치고 퇴소하기 전, 오전에 초포의 시냇가로 가서 목욕도 했다. 빵이며 도넛이며 각종 물건을 파는 아주머니들이 있었다. 남원의 친구와 셋이 함께 도넛을 사 먹었다. 그런데 배탈이 나는 일이 벌어졌다. 속이 부글부글 끓고, 설사는 나고, 땀은 죽죽 흘러내렸다. 퇴소식이 끝나고 부모님들의 면회가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해오셨다. 닭도 한 마리 삶아 오셨다. 배탈이 너무 심해서 친구가 먹는 모습만 바라보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가지고 오신 것을 친구들이 먹고 나머지는 다시 챙겨서 전주역으로 가셨다.


그러한 아버지와 어머니의 자식 사랑을 무엇에 비길 것인가? 눈물 흘리시는 아버지와 어머니!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도 그랬다. 완전하게 휴전이 정착되지 않아서 군대 가면 죽는다는 말 때문이기도 하지만, 월남파병이 한창이던 때라 더욱더 그랬다.


전주에서 열차는 출발했다. 의정부의 101보충대로 간다고 말했다. 싸주신 음식은 하나도 먹지를 못하고, 오로지 고통의 연속으로 열차에 몸을 싣고서 갔던 그때는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보충대에 저녁이 훨씬 지나서 도착했다. 3일간을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몸을 추슬렀다.




#2. 통신교육대와 수색 중대

3일이 지나니 한 사람 한 사람 이곳저곳으로 배치를 받아나갔다. 나도 이름이 불려서 나가니 원주 통신학교라고 했다. 원주 통신교육대로 군용트럭에 몸을 싣고서 먼 길을 달리고 달려 도착했다. 더플 백을 메고 아주 먼 낯선 곳에 끌려온 노예처럼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둑어둑한 오후에 도착해서 내무반을 배치받고 저녁을 먹는데 학교라 그런지 식당이며 부식이며 괜찮았다.


교육은 집총훈련이 아닌 책을 놓고 이론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선풍기도 있고 학습하는 교육장도 좋았다. 지금도 지워지지 않은 기억이 있다. 화장실은 언제나 깨끗했다. 그 속에 들어가서 청소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3주간의 교육을 받으면서 한 번도 화장실 청소는 하지 않았다. 교관도 잘 대해주었다. 교육할 때마다 이해를 잘하니 그랬는가 보았다.


퇴소식이 있었고 부대 배치를 받았다. 포천 이동에 있는 열쇠부대인 5사단이라고 했다. 주위에서 너는 죽었다고 말했다. 공수사단이니 그렇게들 말했다. 훈련이 심하다는 등 귀동냥으로 들은 이야기를 해댔다. 운명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어디를 가든 3년을 채우면 되지 않은가? 제대하면 꿈인 교사의 길로 가야 하지 않는가?


군용트럭을 타고 먼 길을 달려 포천 이동 5사단 보충대에 더플 백을 메고 도착했다. 뜨거운 여름인 7월 초이지 않았나 싶다. 이틀쯤 지나니 하나둘씩 부대로 배치되어 나갔다. 김정호라는 이름이 불리었다. 쓰리쿼터를 타고 9명이 갔었다. 5사단 수색 중대였다. 모두가 개구리복을 입고 있었다.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이름을 부르고 군번을 확인하는데 이름은 맞는데 군번이 틀렸다.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김정호는 36연대로 갔다. 나를 그리 보내달라고 했었다. 너무나 분위기가 살벌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일당이 휴전선을 넘어 청와대로 진격하는 사건이 발생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사단 수색 중대였으니 당연히 그래야 했다. 그런데 중대 본부의 내무반장이 전주교대 선배라면서 36연대보다 여기 수색 중대가 나으니 여기 있으라 하면서 3소대로 배치해 주었다.


중대장 박 아무개는 정읍이 고향이었고, 부관 장 아무개는 남원 보절이었으며 내무반장이자 본부 서무는 전주교대 선배인 이 아무개이니 마음이 조금은 놓이었다. 15일간은 아무것도 시키지 않고 청소하고 훈련하는 모습을 참관만 하였다. 보초도 서지 않았다. 15일이 지나니 사단장 숙소의 보초를 서기 시작했다. 평지가 아닌 해발 200~300m의 고지에서 보초를 서야했다. 훈련은 오전 내내 총검술이고 오후 내내 태권도 등 한번 시작하는 훈련은 한나절씩이었다. 매주 수요일은 40km 행군이었고, 토요일마다 10km 구보였으니, 그야말로 명성을 날리는 5사단 수색 중대였다.


그 무덥고 기나긴 장마가 계속되던 어느 한여름 밤에 내가 보초를 서던 바로 밑에서 한방의 총소리가 들렸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참호 속에서 놀라 움직이지도 못하고 2시간 이상 꼬박 보초를 섰다. 교대하기 위해서 보초병이 왔다. 이튿날 아침에 들려오는 소리는 후임병이 보초를 서다가 자살했단다. 그 뒤로는 보초만 서고 있으면 오금이 저렸다. 꼭 그 자리에서만 서게 되었으니 더욱 더 그랬다. 그러면서도 점차 군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5사단 수색 중대라는 특성 때문에 다른 부대보다는 훈련의 강도가 셌던 것은 물론이려니와 부대 간의 시합에서 지는 것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소대 생활을 3개월여 청산하고 본부소대 병기계로 자리 이동을 하면서 뻬치카 당번을 맡게 되었다. 뻬치카는 요즈음 난방을 대신하는 거였다. 불이 꺼지면 내무반이 춥게 되고, 추우면 전우들이 냉골에 떨면서 자야 했다. 불이 꺼지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되었다. 석탄 가루에 황토 흙을 섞어서 뻬치카 안에 넣었다. 불꽃이 일단은 세게 타올라야 했다.


학창 시절에 자취할 때나 무를 해다가 부엌에서 불을 때던 경험 덕분에 항상 다른 소대의 뻬치카 보다는 불을 잘 지피고 잘 때게 되어 졸병이지만 항상 열외 취급을 받았다. 물론 부관의 당번도 맡았는데 그 부관은 남원 보절의 장 아무개였다. 그 당시의 군기는 말이 필요 없을 만큼 억세었으며, 줄 빠따가 심했는데, 나는 한 번도 맞지 않고 졸병 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그 추운 겨울도 끝나가면서 군 생활도 자리를 잡아갔다. 통신병 역할을 하게 되었고, 훈련도 잘 소화했다.


수요일이면 40km 행군 아니면 포천 이동 국망봉 수색 정찰이었다. 정상까지 갔다가 내려온다. 올라갈 때나 내려 올때엔 으레 삐라를 주워 온다. 북한에서 날린 삐라와 책자가 바람에 날려서 그곳까지 날려온다. 읽어 보면 허무맹랑한 말도 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어느 누구도 제대로 된 사람이며 믿을 수가 없는 글이었다.


책자도 있었다. 내려와 계곡에 앉아 항고에다가 밥과 국을 끓여서 먹는 것은 그야말로 신나는 소풍이었다. 사격이 아주 재미있었다. 격동 후의 사격은 500m 언덕을 뛰어 올라가서 사격하는 것이었는데 내가 항상 1등이었다. 물론 하향 사격, 상향사격, 엎드려 사격 등 거리마다의 표적 사격은 물론 이동 표적 사격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물론 포상휴가도 받았다. 아! 그 포상휴가? 휴가증이 나왔고 준비하는 중에 천안 성환에 사는 도 아무개 상병의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전보가 왔다. 도 상병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나는 나의 포상휴가증을 도 상병에게 주면서 먼저 가라고 했다. 휴가증이 내 이름으로 되어 있어서 이름표부터 바꾸어 달고 집으로 가는 도 아무개 상병. 그 당시 부모가 돌아가셨다는 전보가 오면 바로 휴가를 보내주는 것이 아니었고, 휴가증이 나와야 가게 되는데 이틀 정도 소요되었다. 나의 10일간의 포상휴가였지만 부친이 돌아가신 도 상병의 마음이 아프고 쓰라림을 그냥 볼 수가 없었다. 같은 사병으로써 돕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나는 2일을 손해 보는데도 도 상병이 마지막 가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게 해드리고 싶어서였다.


이틀 후, 그 친구의 휴가증을 가지고 천안역에서 구두닦이에게 물어보다가 헌병한테 걸렸다. 결국 초상을 치렀던 집까지 가서 확인하고 그 헌병은 여비를 챙겨갔다. 지금도 군대에 대한 이야기 할 때면 그 헌병 이야기를 한다. 친구 사병을 돕다가 고생하고 천안역 헌병대의 근무실에서 있었던 일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3. 전방에서의 군 생활

1970년 5월 부대이동이 있었다. 전방 오성산 밑에 있는 어느 고지를 지키기 위해서 부대가 이동하여 배속받았고 근무했다. 가끔 한탄강의 녹슨 철교가 TV에 나오면 그 옆에서 근무하던 추억이 새롭게 느껴진다.


고요한 밤에 철책을 지키는 소대원들, 조그마한 소리에도 토끼 귀처럼 쫑긋쫑긋이 세워야 하는 철책을 지키는 병사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나는 무전병이어서 매복 나간 전우들의 무전 연락을 받기 위해 잠을 자서는 절대 안 되는 생활이었다. 말로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간단한 신호로 서로의 안전을 확인하는 방법이었으므로 수화기에서 귀를 뗄 수가 없었다.


그곳에서의 추억도 많았다. 한탄강에서 목욕하다가 중대장한테 걸려서 팬티 바람으로 포복 기압을 받던 일, 꿩 잡아먹다가 전체가 연병장에서 저녁 내내 팬티차림으로 기합받았던 일, 무전 못 받고 졸다가 걸려서 매복 나가면서 고생하던 일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6개월 20여 일의 전방 생활은 그야말로 긴장과 재미의 연속이었다. 빠뜨릴 수 없는 철책선 안에서 교전 소식도 이었다. 전우애를 실감케 하는 경험이었다.


7월 어느 날 새벽녘이었다. 우리 소대의 한 분대가 있는 철책선 안에서 북한군이 내려오다가 교전이 일어났다. 중대장은 분대원들의 생명이 달린 급한 일인지라 무전병인 나를 태울 겨를도 없이 차를 타고 가버렸다. 나는 장비를 챙겨 산등성이의 철책을 따라 근 1.5km를 뛰어서 교전하는 곳으로 달려서 갔다. 교전 중에 북쪽으로 도망가는 북한 병사를 쫓는 일과 우리 분대원을 구출하는 일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숲이든 가시덤불이든 마구 뛰어가서 중대장과 철책선 안에서 만났다. 그리고 겨우 적을 물리치고 오는 분대원과 소대원들과 함께 철책선을 빠져나왔다. 남북 군인의 대치는 긴장감이 항상 돌았고 북한 병사가 부상병을 끌어안고 멀리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철책선 밖으로 나오니 3사단장 이하 수많은 장교와 장병들이 환호성을 질러댔다.


결과는 완승이었다. 부상병 없이 얼굴과 손과 발에 가벼운 찰과상만 있었다. 중대 표창과 개인들의 표창도 받았고, 나 또한 연대장 표창도 받았다. 잊지 못할 추억이고 잊지 못할 이야깃거리이다.


여름을 보내고 겨울이 시작되면서 전방부대 배속에서 다시 5사단으로 원대 복귀했다. 다시 옛 부대 막사로 와서 두 번째 겨울을 맞이했다. 수색 중대라는 명예에 걸맞게 훈련은 계속되었다. 공수훈련과 유격훈련이 있었고, 계획표에 의해서 훈련은 계속되었다. 느닷없는 한밤중에 5분 대기조의 훈련은 단잠을 깨우는 짓궂은 훈련이었지만 그런대로 해볼 만한 훈련이었다. 그 추운 겨울에 총을 들고 빨래터 우물에 뛰어들었던 일은 또 다른 추억이다. 몸이 덜덜 떨리고 입술이 떨리고 새파랗게 되어 있어도 꼿꼿하게 서서 참아야 하는 인내심의 훈련은 수색 중대에서 만의 훈련이었다.


그 다음 해의 겨울에 뻬치카 당번은 면했고, 월남에 전쟁이 한창일 때 월남파병을 지원했다. 하지만, 나를 아끼던 중대장과 부관은 그때마다 들어주지 않았다. 솔직히 월남에 가서 돈을 벌려는 마음이었다. 학비를 벌어서 제대 후에 어려움을 겪지 않고 학교에 다니고 싶어서였다. 월남에서의 죽음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다.


운명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하고 두 번 시도했지만, 번번이 거절당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듬해 다시 부대이동으로 양평으로 갔다. 세월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곳에서도 추억이 있다. 나와 같은 동기들은 용문산 마의태자의 은행나무를 보고 싶었다. 그래서 어느 일요일, 전입 동기 9명이 중대장 몰래 중대장 차를 몰고 용문사가 있는 곳으로 갔다. 겁 없는 행동이었다. 들키게 되면 영창감이다.


그런데 주차장에서 운전사였던 전 아무개가 당황하여 뒤에 있는 차를 보지 못하고 충돌하여 사고를 냈다. 모른 체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했다. 차 주인을 찾자고 했다. 주차장에서 용문사까지 가면서 차 번호를 외치면서 주인을 찾아다녔다. 마침내 주인을 찾았다. 나는 솔직하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다. 자기 아들도 군인이라면서 차가 움직이면 되는데, 움직이지 못하면 양평까지 끌어다 달라고 했다. 그러겠다고 했다. 차는 앞부분만 부서졌다. 다행히도 차가 움직이었다. 보상도 바라지 않고, 미안해하지도 말고, 군 생활 열심히 하라면서 잘 가라고 하였다. 90도 각도로 모자를 벗고 9명이 절을 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기어이 큰 은행나무를 보았다. 마의태자의 운명이 깃들어 있는 듯이 여기저기 혹이나 있고 가지가 땅으로 박혀서 뿌리를 내린 모습을 보니 마치 나라 잃은 슬픔의 눈물이 고여 있는 것 같았다. 후회 없는 하루였다.


양평에서의 군 생활은 보급을 담당하였다. 우리 부대원의 사기를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나의 성격대로 완벽하게 해내었다. 하나도 밖으로 나가게 하는 일은 없이 성실하게 숫자와 물품을 관리했다. 제대를 몇 개월 앞두고 서무와 내무반장을 겸하면서 본부소대를 잘 이끌어 갔다.


그런데 제대가 다가오니 걱정이 태산같이 밀려왔다. 바로 학비 문제였다. 학교에 다니는 방법이 걱정이었다. 3월 11일에 35사단의 정문을 나서면서 군 생활을 청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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