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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찬 Apr 17. 2024

<6부> 전북에서 중등교사로

#1. 전북에서 중등교사로

할머니의 덕이었을까? 1984년 3월 1일 도간 이동이 되었다. 1983년 12월 31일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10시쯤 친구들이 친구의 양복점에 모여서 점심과 새꼬막을 사서 먹기 위한 약속이 되어 있었다. 막 나가려는 찰나 구례농업고등학교의 교무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에게 딱 맞는 도간 이동 서류가 왔다고 전화 연락을 받았다. 천우일회의 기회였다. 조금 일찍 나갔든지 늦게 전화가 왔으면 천우일회의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부리나케 옷을 챙겨 입고 학교로 달려가 서류를 작성해서 연말이지만 전남도교육청으로 달려갔다. 5시 전까지 가져오라고 했다. 그렇게도 도간 이동을 통하여 전북으로 오고 싶어 했는데 기회가 온 것이었다.


서류를 제출하고서는 문교부에 아는 사람을 소개받아 갔다. 세 번이나 찾아갔다. 전북으로 가고 안 가고는 상관하지 않겠다. 다만, 전북 인사담당자인 공 아무개가 나의 인사 서류에 손만 대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또 부탁했다. 2년 전에 어렵사리 1:1 도간 이동할 정읍중학교 여선생님과 이야기가 굳게 되어 있었다. 정읍중학교로 모든 서류를 가져다주고 왔었는데, 그 여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와 그 여선생님의 서류를 전북도교육청으로 올리지 못하게 그 공 아무개 인사담당자가 교장 선생님께 전화해서 못 올리겠다고 했다. 서류는 학기 말에 제출하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와의 1:1 교류의 건을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 주기 위해서 준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 낌새를 알고 같이 근무하던 정 아무개 교련 선생님과 전북도교육청에 갔다. 그 공 아무개 인사 담당 장학사에게 도와달라고 간청했다. 장학사와 같이 간 정 선생님께서 세 번에 걸쳐서 이야기하고 했는데 나에게 그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그 이유(?) 독자들의 생각에 맡기겠다.


후에 왜 세 번이나 만나는지 그리고 무엇을 요구했는지 말해주어서 알았다. 역시 그것은 돈이었다. 그것이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것을 내가 알 리가 있었겠는가? 내 몫을 가로채어 다른 이 아무개로 바꿔치기한 그 공 아무개 장학사 놈. 남의 속을 쓰리게 하고서 받은 돈은 오래가지도 못하고 부자로 살지도 못할 것인데.


그 후로는 공 아무개 장학사만 생각하면 땀이 죽죽 흐르고 먼 산을 쳐다보면서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한숨만 지었다. 물론 남원에서 15분 이상 공 아무개와 전화 통화하고 내가 선생이니 교육계의 추태를 보이지 않겠다고 하였다. 지금도 그 생각하면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참 나쁜 인사 담당 장학사였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할머니의 유택 사초에 대한 복이 있었는지 1984년 3월 1일 자로 순창중학교로 발령이 났다. 구례농업고등학교에서의 어려움을 청산하고서, 아니 그보다도 아침저녁으로 섬진강 물줄기 따라 3년간 통근한 추억을 뒤로 하고 순창중학교로 도간 이동하였다. 공 아무개 인사 담당 장학사의 뒤통수를 치듯이.


구례에 근무하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철 따라 변화하는 섬진강의 물줄기를 곡성에서부터 구례역까지 마음껏 즐겼다. 여름에는 은어 낚시하는 사람들의 모습, 가을이면 아침 일찍 참게 잡는 사람들의 모습, 섬진강을 작은 나룻배로 건너는 모습을 3년 동안 보고 즐겼던 추억이 아른거린다.




#2. 순창중학교의 추억

순창중학교로 옮기자마자 전북대학교 교육대학원에 적을 두었다. 교육행정학을 전공하였다. 지도교수는 교육대학교에서 교육학을 가르치셨던 곽영우 교수님이셨다. 전라남도의 완도여자중학교로 간 지 5년 만에 고향으로 왔으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이었다.


1984년 3월 1일은 나에게 무척 뜻깊은 날이다. 공 아무개 인사 담당 장학사에게 보란 듯이 떳떳하게 왔다. 남원에서 출퇴근했다. 물론 구례농업고등학교도 3년간 출퇴근했다. 이젠 집에 조금 일찍 가게 되었다고 했지만, 여기서 또 다른 일이 있었다. 또 3학년 담임이고 영어 과목이었다. 그리고 다름 아닌 테니스를 치기 시작했다. 테니스부가 있어서 아무 때라도 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테니스 코치도 있었다.


자연스럽게 운동하게 되었고, 운동이 끝나면 터미널 근방에서 술 한 잔 마시니 구례로 통근할 때보다도 집에 오는 시간이 더 늦었다. 터미널 옆에는 장 아무개가 운영하는 미미사진관이 있었다. 순창중학교 앨범을 맡아서 하는 사진관이었다.


그래서 퇴근 시간에는 자연히 차를 기다리면서 참새 방앗간 들리듯이 들리게 되었다. 100원짜리 고스톱을 치고는 했다. 술 한 잔 마시기 위해서였다. 고인이 된 장우규 사장은 참으로 좋은 사람이었다. 나보다 한 살 위였지만 장난을 잘 치곤 했다. 형이라고 부르면서도 짓궂게 장난을 쳤다. 그는 낚시질도 잘했고 고기도 잘 잡았다. 그물이며 낚시며 못 하는 게 없었다. 아이들이 많았다. 모두가 아버지, 어머니를 닮아서 착하고 공부도 잘했다.


세월이 자꾸 흘러가면서 세대도 변했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은 더 쌓여만 갔다. 좋은 선생님들 만나 재미있고 열심히 가르치고 공부도 했다. 그 순창중학교에서 이명교 체육 선생님은 잊을 수가 없다. 그 선생님처럼 형제애가 두터운 사람은 없다. 형이 사업에 실패하자 부모님과 조카들을 도맡아 봉양하고 가르쳤다. 순창중학교가 모교인지라 열정을 쏟고 있었다. 앞선 교장 선생님이 동창회로부터 신뢰성을 읽어버렸으니, 힘이 들었다. 더 이상 동창회에 손을 벌리지 말자고 했었다.


황호병 교장 선생님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명교 선생님과 나는 주도적으로 학교에 봉사했었다. 학교가 높이 지어졌기 때문에 비만 오면 난리였다. 언덕을 마사토(석별)로 만들었으니, 죽처럼 흘러내렸다. 마사토는 물이 들어가면 죽처럼 되고, 마르면 돌처럼 단단해지는 것이 특징이었다. 그러니 30m 이상 되는 언덕이 여름 장마철만 되면 난리였다. 젊은 선생님들과 함께 흙을 가져다가 덮는데 정신이 없었다. 남선생님들은 팬티 바람으로 나갔다. 부끄러움이 어디 있었겠는가. 언덕이 많이 무너지면 더 많은 흙으로 메워야 하니 덜 무너지게 하기 위해서는 비를 맞고서라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선생님들 모두는 불평 한마디 없이 해내었다. 요즈음이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인터넷 띄우기에 정신없을 것이다. 교실로 들어오면 여선생님은 따뜻한 커피 한 잔씩 끓여주곤 했다. 해마다 반복된 일이었다.


한번은 아이들을 데리고 언덕에 흙을 수레로 옮겨와 메우고 있는데 언덕 공사를 했던 박 아무개라는 사장이 왔었다. 나는 내 성격대로 가만히 있지 않고 한소리를 했다. 당신이 공사를 튼튼하게 했으면 이렇게 무너지지 않고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고생하지 않을 것 아니냐고 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가관이었다. 이렇게 자꾸 무너져야 내가 할 일이 있고 돈을 벌지 않겠느냐였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가 헷갈리는 말이었다. 양심적인 사장인지(?) 아니면 양심이 없는 사장인지(?) 생각하게 했다.


학교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내 아들을 챙기지 못했다. 남의 자녀 가르치는 데는 열과 성을 다했는데, 내 아들에게는 그저 남의 자식 쳐다보듯 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큰 녀석을 한 번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못했다. 날마다 저녁이면 끼고 가르쳐주었더라면 요사이 집사람에게 공방하는 소리를 듣지 않았을 것이다.


한 번은 초등학교의 운동회 날이었다. 큰아들이 2학년 되었을 때였다. 학교에 출근했던 집사람이 조퇴하고 부지런히 점심시간에 맞춰서 왔었단다. 그러나, 임실 삼계초등학교였으니, 삼계에서 오수까지 차를 타고 오고, 오수에서 다시 남원까지 와서 학교까지 걸어가야 했다.


다른 아이들은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 것 없이 모여 앉아 점심을 먹는데, 큰아들은 찾아도 없었단다. 누가 점심을 주는 사람도 없었단다. 이리저리 땀을 흘리고 찾아다녔는데 강당 뒤에서 혼자 제기를 차고 있었단다. 그것을 본 집사람이 마음은 어떻겠는가? 그런 줄도 모르고 나는 학교에만 열정적이었으니, 지금은 가슴이 저미는 하나의 추억이지만 집사람과 아들에게 무척 미안하고 뉘우쳐 보지만 그것은 흘러간 시간이었다.


그 조그마한 체구에 어디서 힘이 날까? 모성적인 본능이었고, 한국의 여성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가정은 잘 꾸려져 갔으며, 한데 모여서 밥을 먹곤 했다. 집에서는 어머니와 동생들도 잘 살아 주었다. 모두가 열심이었고, 나의 말을 아버지의 말처럼 따라주었으니 나의 복이었다. 큰 사고도 없었고, 아프거나 병치레도 하지 않았으니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외숙과 당숙이 하시던 말씀처럼 집안이 일어나고 있었다.




#3. 천사 같은 집사람

둘째 동생은 택시 운전을 하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정비공으로 들어간 남원택시였다. 그런데 남원택시를 개인택시로 분양한다고 했다. 초등학교 졸업 때부터 택시 정비를 했던 동생이 운전 면허를 따서 택시 운전을 하고 있던 때라 분양을 받아주려고 했는데 당장 현금을 챙길 수가 없었다. 또 집사람이 나섰다. 결혼 때 해주었던 팔찌와 반지를 잡히고 돈을 빌려 그날 저녁까지 계약금을 마련하여 갖다주었다. 택시 한 대를 분양받았다. 잔금도 이리저리 융통해서 주었다. 이렇게 해주는 집사람이 고마웠다. 온갖 궂은일은 집사람의 몫이 되었다. 나중에 돈을 챙겨서 갚는 데 어려움이 컸다.


둘째 동생 친구의 부모인데도 어려움이 많았다. 지나치게 높은 이자였기에 그랬지만, 그래도 슬기롭게 처리했다. 열심히 동생은 일했다. 분양받을 때의 돈을 갚기 위해서였고, 자기 차가 생겼으니 그랬다. 동생은 형수에 대한 고마움을 갖고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열심히 운전했으나, 문제가 발생했다. 세상은 모든 일은 여자에 의해서 일어난다. 그것도 복이라고 그랬다. 동생 일이니 더 기술하는 것은 생략한다.




#4. 보람이 있었던 순창중학교 시절

순창중학교에서 6년간의 실적이랄까 마는 많은 일을 했다. 나는 대학원도 졸업하였으며, 교육행정학 석사도 취득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영어와 관련된 경시대회가 많이 있었다. 영어 말하기 대회가 있었고, 영어 시험 경시대회도 있었다.


순창중학교에서는 그렇다 할 실력을 내지 못하던 때라 내가 한번 해보겠다고 나섰다. 1년의 노력이 필요했다. 일단은 군 영어 경시대회부터 준비했다. 영어 경시대회에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군 대표로 도 대회도 출전했다. 8명이 1차 경시대회에 참가했는데, 순창중학교 학생 5명, 타 중학교 학생 3명 총 8명이 참가했다.


1차 시험에 5명이 통과되었는데 4명이 순창중학교 학생이고, 다른 한 명이 다른 중학교 학생이었다. 5명이 2차 영어 경시대회로 참가했다. 당당히 14개 시 군에서 2위였다. 대회의 방법은 시험을 보고 난 후 묻고 답하기의 일문일답 방식의 시험이었다. 대단한 성과였다. 그 결과로 교육감의 지도 교사상도 받았다.


영어 말하기대회도 준비했다. 영어 말하기대회도 그 해전까지는 항상 쌍치중학교의 독차지였다. 나는 ‘하면 된다.’라는 급훈이자 나의 신념처럼 열심히 해보았다. 도전이 없으면 아무것도 손에 쥐어지는 것이 없다.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기 위해서 네 명을 데리고 군산 해망동으로 달려갔다.


군산 해망동에는 군산 미군 비행장에 근무하는 미군 병사가 쇼핑하기 위해서 돌아다닌다는 곳이었다. 수업을 당겨서 오전수업하고 오후에 군산으로 가기를 대여섯 번 했다. 처음에는 미군과 마주치면 겨우 인사 정도 하고 되돌아오곤 했다. 아예 접근해서 말도 걸지 못하던 학생들을 자꾸 쫓아 보내 말하기를 시키다 보니 대화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배우는 학생들이라 말하는 실력이 일취월장했다. 말하기 대회는 영어로 간단하게 연극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연극을 한 내용을 여러 심사 위원이 영어로 일문일답으로 심사하였다. 연극과 일문일답의 점수를 합해서 등수를 매기는 것인데 순창 촌놈들이 당당히 장려상을 받았다.


그 당시의 영어 경시대회와 말하기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지금은 의사도, 교사도, 각 직장에서 모두가 잘하고 있다니 참으로 보람 있는 교직 생활이었다.




#5. 외국 연수가 태어나 처음으로 한 해외여행이라니

열심히 하다 보니 교육청에서 인정하는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 교육청에 관련된 일과 교육청의 일도 처리하고 도와주었다. 유기적인 일을 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다 보니 외국 연수의 기회를 부여받았다. 여행경비 일체는 국가에서 부담한 것이어서 나에게는 전혀 부담이 없었다.


1989년 중국과 국교가 정상화되지 않았을 때인데 중국 연수에 참여하는 행운을 안게 되었다. 12박 13일의 연수 여행코스이었다. 사전연수도 철저했다.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개방의 물결로 중국도 변해가고 있었다.


한국과도 수교는 맺지는 못했지만, 수교 국가나 마찬가지로 왕래와 투자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때이므로 여행이 가능해졌고, 국가에서도 중국 연수를 시켰다. 그때의 중국은 달러가 필요했으므로 우리나라의 관광객유치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나는 사전연수 시에 총무로 선정되었고 빈틈없이 준비했다. 연수 참가자는 각자 고추장 1통, 멸치조림, 김, 김치 등을 준비시켰다. 인솔자는 전주여고 교장이셨던 김 아무개님. 국가기관에서는 옥 아무개 과장이었다. 29명이 한 단원이 되어 9월 중순쯤에 김포에서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유는 국교 수교 전이라 직접 중국 땅에 우리 비행기가 갈 수가 없었다. 내 생전에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다. 군 수색 중대 근무할 당시 헬리콥터를 한번 타본 후로는 처음이었다. 그때까지 제주도도 가보지 못했다.

창피한 일이었지만 1999년 가을 도 교육청에 장학사로 근무할 당시에 제주도 한림고등학교의 연구 학교 발표회에 참가하기 위해서 처음으로 제주도에 발을 디뎠다. 그러니, 외국 여행이라니 얼마나 마음이 설레고 들떠 있었을지는 각자의 생각에 맡겨 본다.




#6. 홍콩으로

홍콩 공항에 발을 내딛는 순간 화려함에 놀랐다. 어둑어둑할 때 홍콩 공항의 주변은 휘황찬란한 불빛도 불빛이지만 높이 솟아있는 빌딩 숲은 과연 금융과 항구의 허브 지역처럼 대단했다. 외국의 호텔에서 자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중학교 동창이었던 강일석과 항상 같이 생활하고 같이 잤다.


둘째 날부터 홍콩 관광이 시작되었다. 총무이므로 항상 인원을 챙기고 사고 나지 않도록 뒷바라지해야 했다. 국가에서 준 공금 1인당 40$씩도 관리해야 했다.


나는 항상 맨 뒤에 물건을 사곤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동행자들이 봉을 쓰지 않게 흥정에 끼어들기도 하였다. 터무니없는 물건값을 요구했다. 사전교육에서 ‘무조건 반절부터 시작하라’라는 교육을 받았기에 그랬다. 가이드도 말을 그렇게 했다.


홍콩이 물건값을 터무니없이 부르고 왜 깎아주는지 모르겠다. 해외 경험이 없는 선생님들이라 하루 사이에 가져간 달러를 거의 절반 정도 써버린 사람들이 많았다. 중국 본토에 가서 사도 된다고 했지만, 마음들이 급했나 보다. 나는 충분히 돈을 가지고 갔기에 꼭 필요한 것만 샀다.


나는 좋은 것으로 녹용을 사고 싶었다. 그 큰 가게에서 제일 좋은 녹용으로 1냥에 90$씩 주고 샀다. 여행에서 돌아와 어머니께 보약을 해드렸다. 그렇게 수술 후유증으로 약해지셔서 겨울이면 감기에 시달리시던 어머니였는데, 그해 겨울엔 녹용 덕분이었는지,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겨울을 보내셨다.


그런데 짚고 넘어갈 일이 있었다. 우리를 안내했던 통 큰 가이드가 국가관이 아주 형편이 없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물건을 사도록 하는 데에만 정신이 있었다. 제대로의 관광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돌아와서 보고서에 썼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국내로 불려 와서 혼을 냈단다.




#7. 중국으로

비행기를 타고 가기로 했다. 그런데 펑크가 났다. 으레 그런다고 했다. 중국의 남쪽에 있는 광주로 가기로 했는데, 비행기를 탈 수 없으니, 큰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버스로 이동키로 했다. 홍콩에서의 가이드는 바뀌었다.


홍콩에서 중국으로 들어가는 세관을 통과해서 가는 길이 포장도로이지만 좋은 도로는 아니었다. 꾸불꾸불, 울퉁불퉁한 길을 달리고 달려서 갔다. 그날 우리는 관광을 멋지게 했다. 처음 보는 중국의 거대한 땅이 나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중국의 실생활을 보는듯했다. 우리의 60년대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광주로 가는 중에 몇 가지 먹을거리도 사서 먹었다. 버스는 최고급 리무진이었다. 10시가 넘어서 광주에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 호텔에서 방 배정을 받아 여장을 풀었다.


저녁은 가는 도중에 먹었다. 듣던 대로 중국 음식의 향내가 식욕을 떨어뜨렸다. 동료들 모두가 향료를 싫어했다. 이튿날부터 광주(광저우) 에서 관광이 시작되었다. 개방의 물결을 가장 일찍 받아들이고 있는 곳이었다. 홍콩과 대만이 가까워서 그런다는 가이드의 설명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고층 건물이 우후죽순처럼 올라가고 있었다. 선물용으로 특산품을 사기도 했다. 그렇게 양질의 물건은 아니라도 기념으로 한두 가지는 샀다.


모두에게 한두 가지의 선물만 사라고 계속 강조했다. 다음날 다시 광주에서 서안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서안 공항은 말이 아니었다. 개방의 물결이 그곳까지는 아직은 미치지 못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유적이 많은 곳이었다. 진시황 역사의 숨결이 서린 곳이니 개발의 물결을 타지는 안 했지만, 이곳저곳 유적의 천지였다. 한 가지 재미있었던 것은 어디를 가서든지 식사에 하던 향료는 넣지 말라고 시전에 연락을 취하였다. 그런데도 몇 가지의 향료는 들어있었다. 줄이고 줄이라고 해도 기본은 넣는다고 하였다.


우리가 가져간 고추장에 무조건 음식을 비벼서 먹었다. 멸치와 김은 식사 시간에 필수로 먹어야만 했다. 김치도 아는 듯 모르듯이 꺼내서 먹었다. 진시황릉에 가는 데에는 하루의 여행 코스였다. 진시황릉은 듣던 대로 산이었다. 남북으로 8km 동서로 7km라고 했다. 진시황릉은 열지를 못한다고 했다. 이유는 릉 속에 수은이 흐르고 있어서 그런다고 가이드가 말했다. 그리고, 어디서 독화살이 날아올지 모른다고도 했다. 더구나 현재의 기술로는 불능하단다. 일본이 개봉해서 이득을 취하려고 허가를 요청했는데 거절했다는 설명도 해주었다.


TV와 사진으로만 보아왔던 병마용으로 옮겨갔다. 대단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토록 많은 병사와 말의 모습이 하나도 같아 보이지 않았다. 모두 다 무엇인가 다르게 만들어져 있고 질서 정연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사진은 못 찍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가져간 VTR 카메라로 찍다가 걸렸다. 압수당했는데, 그곳을 벗어나면 끝이다. 돈이면 통하는 곳이었다. 재빠르게 호주머니에서 50$를 끄집어내어 호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들에게는 큰돈이다. 슬그머니 카메라를 놓아주었다.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버스 타는 곳에서는 어린아이들이 어디서 났는지 유물을 가지고 와서 5달러에서, 3달러로, 다시 1달러라고 하면서 따라붙었다. 진짜인지 모조품인지는 모른다. 하나 사고 싶었지만 가지고 나올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니 살 수가 없음은 물론 포장도 되지 않아서 가지고 다니기도 어려워서 사지 못했다.


또 하루의 해가 저물었다. 다음 날은 서안 성벽의 관광이 있는데 대단한 곳이었다. 과연 대국다운 중국이었다. 성벽 위가 어찌나 넓어 보이는지 버스 두 대가 다닐 수 있는 만큼 넓고 높았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성문을 열어 주고 얼마만큼의 적의 병사가 들어오면 닫아버리고 그곳에서 몰살시키곤 하였단다. 가두어 개 때려잡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장방형의 크기에 오지도 가지도 못하게 막아버리니 몰살당할 수밖에 없어 보였다. 특이하게 눈에 띄었다. 모든 성문에는 안쪽으로 그런 것이 만들어져 있었다. 서안에서의 재미있는 일이 또 있었다. 그렇게 커다란 호텔에 있는 Bar라는 곳이 생음악이 아닌 전축으로 분위기를 잡았다. 휘황찬란하다는 조명은 우리나라의 노래방 수준 정도도 아니었다.


하룻저녁 전세를 냈다. 그 호텔에 있는 직원들과 맥주를 마시면서 즐겁게 우리는 우리의 노래로, 중국 사람은 중국 노래로 불렀다. 디스코라면서 막춤도 추었다. 모두가 여독을 푸는 하루의 저녁이었고, 각자 각자가 아가씨들에게 팁도 주었다. 서빙하는 친구들에게도 물론 팁을 주었다. 큰돈 없이 즐거운 밤을 보냈다.




#8. 북경으로

서안에서의 관광을 마치고 북경을 향해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가 요동을 쳐서 멀미가 날뻔했다. 북경은 대단한 곳이었다. 중국의 수도다웠다. 개방의 물결이 밀려오는 듯했다. 참 돈 쓰는 재미도 대단했다. 그 당시에는 중국에는 돈이 인민 화폐와 외국인을 위한 외화폐가 있었다.


100$에 외 화폐는 360¥이고 인민 화폐는 450¥~650¥까지 비밀리에 바꿔 쓸 수 있었다. 그런데 인민 화폐로 바꾸다 걸리면 큰일이 벌어진다고 했다. 하지만 인민 화폐나 외화폐는 같은 값어치로 쓰였다. 돈의 값어치가 다른 것은 아니었다. 광주에서부터 그렇게 바꾸어 쓰니 돈 쓸 것이 있었다. 북경의 야경은 장관이었다.


밤에 보이는 천안문 경치는 어마어마했다. 개방의 물결이 파고 들어가니 그럴 수밖에 없었고, 여기저기에서 고층 건물이 들어서고 있었다.


다음 날은 만리장성의 성벽을 관광하는 날이었다. 버스를 타고 만리장성으로 향해 갔다. 주차장에서부터는 걸어가야만 했다. 외국의 관광객뿐만 아니라 중국인들의 관광객도 엄청나게 많았다. 걸어 올라가니 과연 신비스러움을 간직하고 있는 장성이었다. 저 큰 돌을 저렇게 높이까지 어떻게 쌓았을까를 생각하니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성벽 위는 넓기도 했다. 성벽 군데군데마다 성루도 있었다. 아니 그 당시 군사들이 제대로 지켰다면 감히 성을 넘어올 수 있었을까 생각할 만큼 높고 거대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만리장성이 제대로의 역할을 하였을까라고 안내원이 설명했다. 흉노족의 예쁜 아가씨들이 밤이면 밤마다 술과 고기를 가지고 와서 보초병들의 환심을 사고 가곤 했단다. 딱 한 번의 기회를 얻기 위해서였단다. 흉노족이 쳐들어올 때 성문을 열어 주는 것이 그 아가씨들의 행하는 목적이었단다.


그 만리장성이 성으로써 제대로 가치를 발휘했을 리는 없었을 것이란다. 지금은 케이블카로 올라가지만 그때는 가을이었음에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걸어서 올라갔다. 그날 하루의 관광은 처음 와보는 거대한 대륙 중국의 관광에서 우리는 우물 안의 개구리였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화원의 관광에서도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넓기도 하고 웅장하기도 했다. 땅덩어리가 넓으니 만들어 놓은 것마다 웅장했다. 지하 묘를 들어 가보았다. 왜 그리 깊은 곳에, 왜 그리 큰 석관에, 왜 그리 웅장하게 황제의 능을 만들었을까? 황제 자신을 위한 묘였는데, 지금은 중국의 관광명소가 되어 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히는 세태를 보는듯해서 씁쓸하다는 생각도 했다.


죽어서도 국가의 수익을 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지금도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돌배는 어떤가? 물 위에 떠있는 돌배다. 물론 노를 저어 갈 수 없는 배이지만 돌로 그렇게 큰 배를 만들어 놓고 돌배 위에서 풍류를 즐겼다는 것을 생각하니 가히 짐작이 간다. 서민들의 생활상을 상상케 하는 것이었다.


북경에서의 우스웠던 일을 써본다면 한번은 인솔자인 김 아무개 교장 선생님이 100$를 1$로 바꾸는 일이 있었다. 한국식당에서 식사하고 나오는데 먼저 식사하고 나가신 인솔단장님께서 애통하고 계셨다. 이유인즉 처음에는 100$로 600¥을 환전했단다.


잠시 후 그들이 다시 돌아와 환전하지 않겠다고 600¥을 달라고 하고는 100$라고 주고 쏜살같이 도망을 가는데 확인해 보니 1$였다. 하... 얼마나 애통한 일이었는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어디 그뿐이었을까? 한국 식당에서의 일이었다. 그래도 우리 동포이니 생각하고 예약 후 식사하기로 하고 들어가면서 제일 좋은 술값이 얼마냐고 물었는데 250¥이라고 해서 두 병을 시켜서 마셨다.


맛있고 즐겁고 흡족한 식사였었고, 교민의 식당에서 한국의 맛을 즐기는 식사였으니 가슴도 뿌듯했다. 그런데 그것도 잠시였다. 술값을 계산하는데 터무니없이 한 병당 500¥을 요구했다. 분명히 250¥이라고 했다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참으로 씁쓸했다. 그렇게 속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국땅에서 아무리 돈이 좋다고 속이면서 장사를 한다는 것은 앞이 훤하게 보였다. 북경에서의 여행은 즐거움도 맛보았고 씁쓸함도 맛보았다.




#9. 북경에서 항저우로

북경에서 항저우로 가는 길은 대단한 평야였다. 기차 여행이었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철길을 놓는 것을 보니 수로에서 흙을 파서 작은 보트에 싣고 그것을 다시 지게로 지어다 붙고 있었다. 어느 세월에 철길을 놓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구가 많다 보니 모든 것을 사람의 힘으로 하는 중국의 발전상을 보는듯했다. 그야말로 만만디였다. 그 넓은 들판과 수로는 가히 장관이었다. 몇 시간의 여행으로 항주에 도착했다.


유적들이 대단히 많았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탐이 엄청 높았다. 사람의 힘으로 그렇게 높이 쌓아 올렸다니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절이며 탑이며 관광하는 것은 참으로 재미가 있었다. 생각의 폭을 넓혀야겠다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다.


김우중 씨가 말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라는 말이 그냥 한 말은 아닌 것 같았다. 세월의 흐름이 이곳에서도 느껴졌다.




#10. 항저우에서 상해로

다시 상해로 갔다. 중국의 산업 중심지답게 웅장했다. 제일 활동적으로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도시도 활기로 넘쳐 있었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도 활기가 넘쳐흐르고 있었으며, 야경도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다. 역사가 서리어 있는 상해임시정부의 건물에도 들렀다. 김구 선생님께서 거처하시던 곳도 보았다. 힘이 약한 민족의 서글픔을 보는듯했다.


개인이나 국가나 힘이 있어야 한다. 국력을 키워야 남의 나라 지배를 받지 않는다. 관광 중에 귀한 분을 만났다. 동암고등학교 이사장님을 그곳에서 만났다. 집사람의 약을 몇 번 지어다가 먹어서 익히 알고 있었다. 참으로 반가웠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관광이었고 다음의 여행지인 일본 오사카로 가기 위해서 공항 내에 있는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그런데 상해의 중심가에서 마지막 쇼핑을 하면서 중국의 인민폐는 모두 써야 했다. 내가 총무로 공금을 관리하던 터인지라 잔돈이 제법 있었다. 기념으로 몇 개만 호주머니에 넣고 끄집어내니 한 주먹이 되었다. 어떻게 할까?


몇몇 선생님과 이야기하다가 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았다. 코너에 앉아서 몇 가지도 안 되는 물건을 놓고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일행과 함께 옆으로 가서 쥐고 있는 한 주먹의 잔돈을 할아버지의 손에 쥐어 주었다. 중국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 쳐다보고 있었다. 그 할아버지는 당황하면서도 연신 절을 했다. 고맙다고 중국말로 하는데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하여튼 중국 관광 연수 중에 제일 보람이 있었다.




#11. 상해에서 일본으로

다음 날 아침 일본으로 향했다. 중국은 우리나라와 국교 정상화가 되어 있지 않아서 직항 힝로가 안 되어 있어서 일본을 거쳐서 한국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로 직접 오는 비행기가 없으니 그랬다. 일본 오사카에 도착했다. 처음 와보는 일본이다. 말로만 듣던 일본의 제2의 도시답게 발달하여 있음은 물론 도시가 잘 정비되어 있었다.


하루의 관광이 시작되었다. 도착한 날 관광이 시작되었고, 이곳저곳 볼만한 곳을 돌아다녔다. 특히 오사카성이 눈에 띄었다. 가서 직접 보았다. 과연 목재로만 건축했는데도 웅장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숨결이 배어있는 듯했다.


성을 둘러싸고 있는 해자와 성벽은 가히 외부 세력의 공격을 막아내는 데 손색없을 정도의 성이었다. 황금색 빛깔로 대단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내부의 반란이 아니면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중국에 비해서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물건들의 질도 대단히 뛰어났다. 값도 너무 비쌌다. 쇼핑을 거의 하지 않았다.




#12.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다음날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이었다. 집이 그리웠다. 먹고 싶은 김치도 생각이 났다. 비행기는 2층으로 되어 있는 초대형 대한항공이었다. 승객으로 꽉 차 있었다. 그리운 내 땅, 내 고향 땅이 내려다보였다. 외국에 나가보아야 애국심이 생긴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김포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했다.


집에서 김포공항까지 차를 가지고 마중 나온 가족, 서울로 가는 사람, 기차를 타고 가는 사람을 제외하고 관광버스를 타고 전주로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빨리 가고 싶었다. 왜 그리 버스의 속도는 느리게 느껴지는지 몰랐다. 생각의 차이였으리라. 아이들과 집사람이 보고 싶었다. 선물도 많이 샀다. 처음으로 비행기도 타보았고 해외로 처음 나가는 관광이었으니, 보람찬 관광 연수였다.




#13. 특수학급 담당 시절

다시 학교로 돌아가 보자. 순창중학교에서 그동안 특수교육에 관심이 있었기에 특수교사 자격증 시험에 응시했다. 특수교사 언어영역(지적장애) 교사 자격증을 땄었다. 그다음부터는 특수학급도 맡았다. 특수학급을 맡으면서 영어 교사지만 사회과목도 가르쳤다. 초등학교의 경험을 살렸다. 영어는 다른 선생님들이 가르쳤다.


특수학급을 맡을 교사가 없으니, 자격증이 있는 내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지적장애 분야의 학생들은 순진하고 거짓말도 할 줄 모르고 오직 자기들의 선생님밖에 몰랐다. 목욕탕도 같이 갔다. 적성면 다리 밑으로 목욕도 할 겸해서 물놀이도 갔다.


다슬기를 한 마리만 잡아도 선생님! 하면서 가져왔다. 고기를 한 마리만 잡으면 서로가 난리였다. 그들에게는 오직 우리 선생님뿐이었다.


적성면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목욕하러 갔다. 물장구도 치면서 같이 즐겼다. 그 아이들 속으로 빠져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교사이고, 특히 특수교사는 더 그렇게 해야만 되었다. 그들을 사랑으로 보듬지 않으면 누가 대신 하겠는가? 우리가 해야 할 일이었다. 학교에 온 이상은 모두가 사랑스러운 제자로 여겨야 하는 것이 교사의 사명이었다.


그동안의 실적을 인정받아 문교부장관상도 받았고, 중국 해외 연수 관광도 다녀왔으니, 교사는 학생들 가르치는 데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보상이 따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명교 선생님은 교감으로 승진하는 것을 포기하고 부산으로 갔다. 일 년에 한 번 있는 교직원의 연수를 부산으로 갔다. 이명교 선생님도 가자마자 형이 사준 모텔을 6개월째 운영한다고 했다. 저녁 식사는 형의 횟집에서 하라고 하면서 20만 원을 우리에게 주었다. 우리는 순창에서 가장 좋은 쌀 한 가마니를 가져갔을 뿐인데 그랬다. 형제간에 단돈 1원이라도 분명하게 계산한다고 하면서 먹고 나올 때 20만 원만 주라고 했다. 그런데 큰돈을 따지지 않고 모아서 서로 서로가 도와주고 있다고 하였다.


순창중학교로 간 지 6년째로서 학교를 옮겨야 했다. 1989년 가을에 남원에서 전주 금암동에 있는 광주 고속버스터미널 옆에 있는 비사벌아파트를 전세로 구해서 이사했다. 큰 녀석도 금암초등학교로 전학했다. 나는 버스로 순창중학교로 통근했다. 그러다가 차를 한 대 샀다. 차종은 대우 르망이었다. 1989년 9월 1일 자로 샀다. 교장 선생님과 몇몇 선생님을 모시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니면서도 나에게 주어지는 역할에는 충실했다. 모두가 순조롭게 풀려가고 있었다. 동생들도 각각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14. 전주동중학교로

1990년 3월 1일 전주동중학교로 발령받았다. 3학년을 원했으나 2학년이었다. 외진 곳으로 학구가 되어 있어서 아이들에게 신경을 더 써야 했다. 매달 보는 모의고사가 그 선생님의 능력을 평가했다. 모의고사 점수로 학급을 표창하기도 하고 180점 만점에 160점 이상 맞은 학생도 표창했다.


학년당 12학급이 있는 대규모 학교였다. 보충수업도 해야 했다. 영어, 수학, 국어 과목은 시수가 많았다. 아들도 동중학교로 배정받았다. 아침에는 같이 가고 저녁은 따로따로 왔다. 그때 다시 덕진 세원아파트로 이사를 한 때였다. 항상 이사도 집사람이 서둘러서 했으며, 이삿짐도 풀고 정리하고는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 자신만을 위한 삶이었다. 한 해가 갔다. 열심히 가르친 것을 인정했는지 다음 해부터는 3학년 담임이었다. 3학년은 고등학교 연합고사를 치러야 했다. 한 반에 50여 명 중에서 25명 전후로 연합고사에 합격하고 성적이 뒤쳐진 학생은 공고와 상고로 진학했다. 그리고 또 농고로 가고는 했다.


연합고사 합격 여부가 교사의 능력의 척도였으니, 선생님마다 열심히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동중학교로 옮기자마자 쪽지 시험을 보았다. 단어 시험은 매 단원이 끝나면 꼭 보았다. 결과에 따라 손바닥이나 종아리를 맞았다. 그리고 꼭 부모님의 확인 도장과 한두 마디라도 쓰게 하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은 말하기 중심인 의사소통 능력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연합고사가 치열했으므로 문법과 내용 파악, 이해 중심이었다. 그래서 가령 쪽지 시험으로 to-부정사란 무엇인지 설명하고 용법에 맞는 예문을 들게 했다. 물론 가르쳐주고 난 것을 다음 시간에 32절지의 백지에 쓰게 했다. 그러니 공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꼭 확인하고 부모의 확인도 받게 했다. 쪽지 시험이 30여 장 모이면 묶어서 집으로 보내 주었다.


그러니 내가 가르치는 학급의 영어시험 결과는 말로 하지 않아도 뻔했다. 3학년을 가르치면서도 그런 방법이었다. 지금의 교수 방법과는 판이한 구태의연한 교수 방법이고, 실력 없는 선생님으로 낙인찍히기 딱 좋은 교수법이었다. 왜 그리도 그 당시에는 경쟁 중심의 교육이었는지 모르겠다. 시대적인 영향이었다. 보충수업도 하루에 두 시간씩 하였다.


일반수업하랴, 보충 수업하랴 몸은 지치지만 그래도 실력 없는 선생님이라는 소리는 듣지 않아야 했다. 매일 학습지도 매일 매일 풀었다. 내가 풀어 주는 것이 아니었다. 과목마다 잘하는 학생에게 아침 8시 20분부터 나 대신 앞에 나가서 풀어 주게 했다. 물론 아이들은 집에서 풀어오게 했다. 나보다도 쉽게 설명을 잘해 주었다. 습관을 길러주니 반 학생들이 잘해 나갔다. 담임이 내가 없어도 잘했고 더 조용한 학급으로 인식되어 갔다.


학생 지도는 어떠했는지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다. 키도 조그마한 녀석이 완주 용진에서 다니는데 중간치기를 밥 먹듯이 했다. 물어물어 하이트 맥주 공장 옆 마을까지 찾아갔다. 집에서 잠을 자기도 하고, 학교에는 갔다고 하는데 오지를 않고는 했다. 오지 않으면 그때마다 집으로 갔다. 학생이 이기는지 내가 이기는지 나 자신과 내기를 했다. 나는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고야 만다. 부모님 앞에서 끌고 나와 기어이 학교로 데리고 왔다. 서서히 버릇이 잡혀서 그 후로는 학교를 잘 다녔다. 그 학생은 농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바로 담 너머이니 내가 보일 때마다 선생님하고 소리치면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후로 농고도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 그 학생은 군에서 제대했다. 결혼했다고 하면서 전화도 가끔 왔다.


이것이 교사의 보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교사는 자기가 가르치는 제자의 성장해 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살아간다’라고 하는 선배 선생님들의 말이 맞는가 보다.


또 다른 학생이 있었다. 주 아무개 학생이었다. 어머니는 병환중이었고, 아버지는 전국으로 돌아다니면서 노동일을 했는데, 알고보니 학생의 집은 이혼가정이었다. 동중학교인데도 팔복동의 고량동 마을에서 다니고 있었다. 너무 결석을 많이 했다. 그냥 있을 수 없어서 주소를 적은 쪽지를 들고서 찾아가 보기로 했다. 빈 시간을 이용하여 찾아갔다. 골목골목을 찾아 들어갔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자고 있었다. 형제 둘이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어쩌다 아버지가 보내 준 돈으로 생활한다니 그 생활상을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데리고 오기를 반복했고, 그때마다 짜장면을 사서 먹여주고는 했다. 일단 배가 불러야 무엇을 하든지 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학생은 학교에 다니면서 설상가상으로 불량학생과 어울려 군산에서 오토바이 절도사건으로 소년원의 신세를 지게 되었다. 자연적으로 자퇴를 하게 됐다. 그 해가 지나갔다. 모든 학생이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또다시 3학년을 맡게 되었다. 학생이 전학을 오거나 복학하게 되면 오는 순서대로 학급 배정을 했다.


그 주 아무개라는 학생도 복학하려고 왔다. 어머니의 병도 호전되었고, 다시 아버지와 합쳤다고 하면서 열심히 다니겠다고 해서 우리 반의 차례가 아닌데도 우리 반으로 반을 편성해 달라고 했다. 1학년 후배들을 잘 이끌어 가면서 공부도 열심히 했다. 물론 졸업도 했다. 그리고 상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보람찬 일이었다.


최 아무개라는 학생의 이야기도 해보겠다. 반은 편성이 되었는데 학생은 없었다. 이유는 전년도 12월에 서울대학교의 병원에 류머티즘성 관절염으로 입원해 있다고 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관절의 류머티즈가 아니고, 뱃속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거라고 했다.


그러니 치료가 무척 힘이 들었고 회복이 더디었다고 부모님이 오셔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5월 중순쯤에 학교로 왔다. 너무나 좋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던 학생이었다. 매일 매일 잘하는 학생의 공책을 빌려 가서 베끼고 돌려주고는 하였다. 그러면서 수업 시간에 관찰해보면 선생님과의 눈동자를 맞추고 있었다. 한 달 후인 6월 말경에 모의고사를 보았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반에서 2등을 하였다. 3, 4, 5월에 공부도 하지 않은 그 학생이 반에서 2등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들이 말하기를 얼마 안 있으면 1등을 맡아 놓고 할 것이라고 했다. 역시 그랬다. 그때 당시 IQ가 150이 넘었다고 했다. 고등학교는 상산고등학교로 갔다. 입학 고사가 만점이었다. 남성고등학교로 진학한 장 모 학생과 1, 2 등을 다투더니 똑같이 만점이었다. 그 결과 나는 교장 선생님으로부터 10만 원의 포상금도 받았다.

두 학생 모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법대에 나란히 합격했다. 같이 기숙사에서 친구가 되어 잘 다니고 있었다. 소식이 가끔 왔다. 훌륭한 법관이 되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하느님도 무심하게 3학년 늦가을에 하늘나라로 갔다는 연락을 받았다. 꽃바구니를 보냈다. 갑작스러운 류머티즘성 관절염이 재발하여 대처할 시간도 없이 하늘나라로 갔다고 어머니한테서 새벽에 전화가 왔었다. 아까운 인재가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기대했던 인재였다. 


또, 모래내의 순댓집은 잊을 수가 없다. 조그마한 순댓집이었지만 부부가 직접 만들어 팔고 있었다. 하루의 피곤함을 잊기 위해서 따뜻한 순대 한 접시에 순댓국에 막걸리를 마신 기억이 나서 지금도 가끔 그 순댓집에 간다. 3학년 선생님들은 보충수업이 끝나면 모여서 자주 들르곤 했다. 만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먹는 그 순대 맛은 여느 시골 장터의 순대 맛과는 달랐다.


장사가 되기 시작하더니 점점 가게를 키워나가고 줄을 설 정도로 장사가 잘되어 갔다. 우리 동중학교 선생님들이 가면 양도 많이 주고 먹기도 좋고 맛도 좋은 것으로 듬뿍듬뿍 주기도 했다. 하루의 피곤함도 막걸리와 순대로 웃게 해주곤 했던 그 모래내 순댓집은 지금도 장사를 잘하고 있었다.




#15. 전주동중학교에서 무주 안성중학교로

멀리 농어촌학교로 가기 위해서 차를 무쏘로 바꾸었다. 거금을 들여서 샀다. 그 당시 인후동 주공아파트 한 채 가격이었다. 휘발유가 아닌 경유 차였다. 기름값도 별로 들지 않으면서 튼튼한 차였기에 장거리용으로 샀다.


1990년 3월 1일에 무주 안성중학교로 발령받았다. 원래는 순창을 원했었고, 다음으로 남원을 원했었는데, 밀려서 무주로 발령받게 되었다. 무주에서 제일 먼 무풍중학교를 원했지만, 또 미끄러졌다. 대신 안성중학교의 영어 선생님이 무풍으로 갔다.


그 자리에 내가 발령받았다. 또 고학년인 3학년이었다. 왜 나는 가는 곳마다 고학년을 맡아야만 하느냐며 불평 아닌 불평도 해보았다. 전주동중학교 첫해를 제외하곤 고학년을 담당할 운명이었을까?


하여튼 전주동중학교에서 3학년을 5년 동안 가르쳤으니, 머릿속에 다 들어있어서 가르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면서 특수학급 학생도 몇 시간 가르쳤다. 승진에 가산점이 있었다. 물론 자격증이 있기도 했지만, 남학생도 있었기에 여선생님(대구 출신)이 다 담당하기에는 벅찬 수업이었고, 보좌하는 교사가 있어야 했다.


교장 선생님, 교감 선생님, 교무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나보다 어린 신규 선생님들이었다. 그러니 안백옥 교장 선생님이 무척 힘들어하셨다. 그 당시에 참교육을 부르짖는 전교조 선생님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전교조 선생님들은 참교육하는 선생님들이었지만, 학교 운영은 교장 선생님의 철학으로 이끌어가야 하는데 그것이 그들에게는 뜻을 함께할 수가 없는 부분도 있었다. 보다 못한 나는 어느 날, 직원 조회 시간에 일어나 선생님이라고 같은 선생님이 아니다. 일반 공무원들은 직급이 있지만 교사 집단은 그렇지 않다. 교육경력도 있고 나이도 있으니, 우리가 대우해야 하고 존경해 주지 않으면 누가 존경하여 주겠는지 일장 연설을 했다. 지금처럼 했던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겠다고 했다.


그다음부터는 직원 조회 시간에 조용히 운영됨은 물론이려니와 교장 선생님이 하시는 일에 딴지를 거는 일이 없어졌다. 교육열이 높은 안성중학교의 학부모들이었다. 그리고 부유한 면 소재지였다. 학교에 적극 협조적이었다.


안백옥 교장 선생님이 도교육청으로 9월 1일 자로 가시고, 최갑술 교장 선생님께서 오셨다. 학생, 학부모, 교사가 삼위일체가 되어 학교를 잘 이끌어 가고 있었다.


안성면의 축구대회도 있었다. 중학교 운동장과 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안성면의 행사가 이루어졌고, 우리 선생님들도 고등학교 선생님과 같이 한 팀이 되어 참여했다. 학교는 지역사회를 떠나서 살아갈 수가 없지 않은가? 친목 활동도 잘 이루어져 갔다. 학부모님들도 참여해서 즐기면서 삼겹살 고기도 구워서 먹고 부침개도 부쳐서 친목회 날의 하루를 즐기곤 했다.


처음에는 출퇴근했다. 빨리 달리면 한 시간 그렇지 않으면 한 시간 십 분이 소요되었지만, 습관대로 제일 먼저 내가 아니면 거기에 사시는 교감 선생님이 출근했다. 그러다가 너무 멀어 관사를 이야기해서 관사 생활을 했다. 오고 싶으면 오고, 있고 싶으면 거기에 있고는 했다.


점심은 학교에서 시켜다 먹었다. 저녁은 관사 생활을 하는 선생님들과 어울려 술 한잔 먹으면서 때우곤 했다. 한 학기가 가고 1년이 지나가면서 최갑술 교장 선생님이 장수중학교로 가시고 김진상 교장 선생님이 부임하셨다. 체육을 전공하신 교장 선생님답게 활동적이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순진하면서도 말썽부리는 학생이 없이 공부도 잘했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다시 고등학교로 이어지는 선후배와의 관계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지 않았다. 매주 친목회도 빠지지 않고 했고, 그때마다 칠연계곡, 덕곡저수지, 진안 동향, 장계 시장 등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회식하곤 했다.


그러는 사이에 영어 교사들은 전부 연수받도록 하는 계획이 시달되었다. 영어 말하기 연수였다. 마음이 심란했다. 걱정이 태산 같았다. 나는 문법과 읽기와 쓰기에는 잘했지만, 영어 회화에는 영 형편이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거절할 수는 없었다. 처음 1기, 2기까지는 데모도 하고 난리였단다. 나는 3기였다.


한데 교탁 바로 앞이 내 자리였다. 시간 시간마다 외국인 영어 선생님이 질문했다. 듣기는 하는데 영어로 말 못 하고 머뭇거리다가 창피만 당하니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여선생님 세 분을 내 차로 모시고 다니면서 올 때는 그날 배운 것을 복습하고는 했다. 날이 가고 시간이 가니 한마디씩 했다. 아침에 갈 때는 그날 배울 것을 물어보곤 했다.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했다. 읽고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잘했으니, 문제도 내어서 해보고 했다. 연수가 끝나면 시험을 보게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 사람 만나면 시골 할머니도 길을 안내하는데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길 안내도 못 한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외국인에 대한 공포증이다. 틀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외국인과 대화를 못 한다. 나는 연수 받는 과정을 우리말로 써서 번역했다. A4용지 앞뒤로 한 장 분량이었다. 그리고 외웠다. 말하기 시험이 끝나고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하고서 그렇게 준비한 것을 말하듯이 외웠다. 중간에 막혔다. 보고하라고 했다. 무사히 준비한 것을 마쳤다. 시험도 예습과 복습 그리고 스스로 문제를 내서 오고 가면서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것이 무척 도움이 되었다.


결과는 그렇게 잘한 선생님들을 제치고 만점으로 1등을 하였다. 노력을 가상히 여긴 외국어 선생님이 만점을 준 것 같았다. 해가 바뀌고 시간은 가면서 교무를 맡았다. 가던 다음 해부터 교무업무를 보았다. 그러면서도 담임은 꼭 맡았다. 담임을 해야 제자가 있다.


요즈음 서로 담임을 맡지 않으려고 하는 풍토라니 격세지감이다. 그것이 스승의 길인지 생각해 볼 문제다. 담임수당도 주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선생님의 길인지 생각해 볼 문제다. 중요과목이라면서 맡으면 좋겠다고 하니 맡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 관사가 떨어져 있었다. 그 당시의 손봉국 교육위원님께 말씀드려서 학교 안에 관사를 지어 달라고 해서 지었다. 학교의 모든 일을 챙겼다. 무주교육청의 일도 거의 내가 다니면서 처리했다. 선생님들에게도 교육부장관상이며 교육감상이며 해마다 한 분씩, 타도록 해드렸다.


물론 공적이 있어야 가능했다. 선생님들을 이끌어 나가려면 보상도 해주어야 했다. 윗사람이 해야 할 일이지만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을 제외하면 내가 제일 나이도, 교육경력도 많았으므로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학교는 큰 일없이 잘 이끌어져 갔다.


그러면서 1998년 대한민국의 역사상 가장 힘들었던 IMF가 터졌다. 이해찬 장관이 교육계에 찬물을 끼얹는 정년 단축을 3년이나 앞당겼다. 철퇴를 교육계에 내려친 것이다. 교육계에 새바람을 불어 넣기 위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갑작스럽게 당한 선생님들의 마음을 헤아리기나 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손해를 보면 이익을 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너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다’라는 말처럼 나에게도 행운이 왔다.


많은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들이 퇴임으로 나가게 되니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서 교감 차출이 엄청나게 많았다. 나도 1998년도에 차출되었고 1999년도에 교감 연수도 받았다. 그러면서 전문직 시험이 있었고, 전문직 공부를 해야 했다. 학원에 1주일에 세 번씩 두 번 다녔다. 전문직 시험에 합격했다. 전문직 공부를 거울삼아 교감 연수도 좋은 성적을 받았다.


즐거운 학교생활이었다. 특수학급을 담당하던 선생님은 대구로 갔고 그때부터 특수학습도 맡았다. 불쌍한 아이들이다. 매주 한 번씩 무주에 있는 목욕탕을 예약해 데리고 갔다. 몇 시에서 몇 시까지는 될 수 있으면 손님이 없었으면 하고 내 무쏘 자동차에 십여 명의 남녀 학생을 다 태우고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따로 오라고 할 수도 없었기에 그랬다. 여학생은 여자목욕탕으로 가고 나는 남학생들과 함께 목욕했다. 천진난만한 아이들과의 추억이었다. 순창중학교에서 했던 것처럼 했다. 정이 붙고 아이들도 씩씩해 보였고, 얼굴도 깨끗해져 갔다. 교육자들은 학생들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 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가 없듯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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