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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찬 Apr 17. 2024

<8부> 전북도교육청에서 장학사로

2000년 9월 1일 자로 도 교육청으로 발령받았다. 도교육청 학교운영지원과 생활지도 담당이었다. 도교육청보다는 전주시교육청으로 가고 싶었는데 그것은 나의 바람일 뿐이었다. 도교육청 학교운영지원과에서 생활지도 팀이었고, 담당업무는 또다시 학교폭력과 성희롱·성폭력이었다.


바로 국정조사를 준비해야 했다. 도교육청은 나이가 많건 적건 간에 선임이 우선이었다. 나의 바로 위 선임은 고등학교 한참 최 아무개 후배였다. 군산교육청에서 본 업무였지만, 이제는 전북 전체를 담당하는 업무였고, 한 달에 한 번씩 학교폭력과 성희롱·성폭력에 관해서 교육부에 보고해야 했다. 무척 힘이 들었다. 초·중·고의 생활지도 실적을 받아 통계처리를 해야 하니 무척 힘이 들었다. 정시에 한 번도 퇴근하는 일이 없었다. 보통 11시가 넘어서야 퇴근이었다.


성격 탓에 아침 출근은 다른 사람보다 항상 일찍 출근하곤 하였다. 국정감사는 다른 시·도에서 질문한 것과 전년도 국정감사에서 질문했던 것을 중심으로 예상 질문을 만들고 그 질문에 맞는 답변을 쓰는 것이었다. 처음 해보는 것이라 힘든 것은 별로 없지만, 어떻게 써야 하는지 선임자에게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물어보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물어보니 후배지만 귀찮았음은 물론 일찍 퇴근해 버리니 나 혼자 통계자료를 근거로 해서 쓸 수밖에 없었다. 답변 자료를 만들면 장학관에게 결재를 맞는데 퇴짜를 맞았고, 다시 고쳐서 가면 장학관은 통과되지만, 과장한테 퇴짜를 맞았다. 다시 또 고쳤다. 결재를 다시 시작했다. 장학관을 거쳐 과장으로, 과장에서 국장으로 결재를 받아야만 했다. 또 국장이 고쳤다. 다시 처음부터 결재를 시작해야 했다.


마지막 부교육감의 결재가 떨어져야 드디어 답변 자료가 완성되었다. 얼마나 시간과 노력의 낭비였던가? 쓸데없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 쓸데없는 일이었지만 조직사회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배운 것도 물론 있었다. 업무에 온 힘을 다하여 쏟다 보니 내 업무에는 자신감이 생겼다. 막상 국정감사 날은 그렇게 준비한 것을 거의 물어보지도 않는다. 질문은 오전에 하고 오후에 교육감이 답변하면 되었다. 질문을 듣고 점심시간에 답변서를 만들면 되는 것을, 국정감사가 시작되면 온통 교육청이 난리 통이었다.


물론 심혈을 기울여 국회의원들이 지적한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면 되었다. 그런데 전 도교육청이 들썩이면서, 해마다 감사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어디 그뿐이었던가? 도의회는 어떠했는가? 말로는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자주성을 부르짖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도의회에 가서 다시 예산심의를 받아야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도 교육위원회가 있으니, 그곳에서 걸러지면 바로 도의회의 본회의에서 통과하면 되는 것을 그 당시에는 도의회 교육복지위원회와 예결위원회를 거쳐야 하니 도 교육청은 이래저래 고통의 연속이었다.


죽을 고생을 하는 것은 각과의 업무 담당자들이었다. 업무의 비효율성이었다. 지금도 교육의 자주성과 중립성을 인정한다면 교육상임위원회의 의견을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소수가 다수의 힘에 지배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힘의 논리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국정감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국무총리실의 생활지도 전반에 걸쳐 평가가 또 기다리고 있었다. 잘 받아야 했다. 예산과 직접 관련이 있었다.


2001년의 평가에 관해서 기술해 보겠다. 2000년의 국무총리실 산하 청소년보호위원회의 평가에서는 그다지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왕지사 평가받을 것이면 16개 시·도중에서 1등을 해보자 하고 달려들었다. 물론 과장과 장학관의 허락을 받은 것은 물론 선임자인 장학사에게도 허락받았다. 나는 한번 하려고 하면 끝을 보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봄부터 준비했다. 전년도의 평가 항목을 분석했다. 청소년보호위원회에도 방문했다. 마침 고등학교 동기 동창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평가의 방향과 평가 항목을 묻고 자료를 받았다. 평가위원이 있는 곳도 찾아다녔다. 그들의 평가 방향과 중점 평가 항목에 대해서 준비를 열심히 했다.


평가는 9월 지나면서 실시되었다. 분야별로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았다. 학교 폭력 분야, 성희롱·성폭력 분야, 진로 분야, 상담 분야 등 학생 관련된 모든 분야가 평가 항목에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보다 먼저 평가받은 시·도를 섭렵했다. 일종의 벤치 마킹이었다. 평가가 시작되었다. 하루 전에 도착하여 현장 방문을 먼저 실시했다. 분야별로 시·군별로 학교와 교육청을 평가하였다.


다음날은 도교육청의 평가를 하루 종일 실시했다. 모든 자료는 평가 항목에 맞게 파일북과 실적물들을 대조해 가면서 실시되었다. 결과는 전라북도교육청이 전국에서 최우수교육청으로 평가되었다. 선생님들의 도움과 관계 분야의 모든 분의 노력 결과였다. 문 교육감님께서 만족해하셨다. 나는 감독과 연출자였지 현장의 선생님들께서 도와주셨기에 가능했다. 그분들께 이 자리를 빌려서 감사를 드린다.


지금의 선생님들이라면 그렇게 헌신적으로 저녁 늦게까지 도와줄 선생님이 얼마나 있을까 의심스럽다. 불과 10여 년 전의 일이었다. 그 평가 결과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예산배정에 플러스 요인이 물론 있었다. 나도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내가 받은 상중에서 최고의 표창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분야별로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책자도 여러 권 발간했다. 그 당시의 선생님들은 어쩌면 그렇게 맡은 분야에서 열심히 도와주고, 열정적이었는지 모른다.


어디 그뿐이랴. 하나의 주제가 설정되면 그에 맞게 계획은 왜 그리 잘 세워내는지 대단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 하나만 소개하면 이러했다. 정읍, 부안, 고창을 중심으로 하는 ‘사부자 한마음’이라는 학교폭력, 성희롱·성폭력 예방프로그램의 사업이 있었다.


다른 시·군지역에도 학생들의 학교폭력과 성희롱·성폭력 예방프로그램을 도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서 학교 부적응 학생을 위한 프로그램도 필요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대안 학급’이었다. 지금도 실시되고 있다.


많은 예산이 필요하지만 겨우 학급당 200만 원을 가지고 1년간 운영되는 프로그램이었다. 계획서를 제출하면 심사해서 실시했다. 적은 돈으로 실시하는 프로그램이었지만 효과가 있었다. 결과는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부적응 학생들을 위해서 괜찮은 프로그램이었고, 계속 사업으로 이어져 지금도 실시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어려운 도교육청의 업무도 한 해가 가고 두 해가 가면서 점차 익숙해졌다.


학생이 교사를 폭행한 사건도 있었다. 이리 모 고등학교에서 학생이 수업 시간에 졸고 있는 학생을 교사가 출석부로 머리를 치면서 깨웠으며, 그 결과 학생이 여선생님을 폭행한 사건이었다.


학교에서는 전학을 가던지, 그렇지 않으면 퇴학을 시킨다고 해서 도교육청으로 부모와 학생이 찾아온 사건이었다. 원래 내 생각은 퇴학시키는 것만이 생활지도에 있어서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학교란 무엇을 하는 곳인가? 선생님은 왜 있는가? 교사는 학생이 있어야 존재한다는 생각이었다. 학생들을 교사는 최선을 다하여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갖고 있던 나였다. 학생은 환경을 바꾸어 주고, 교화시키면 따라오게 되어 있다. 잠깐의 실수로 앞길을 막는 일은 없어야 했다. 물론 그 학생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과 학생은 끝까지 대수롭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싸움을 잘하면 권투도장으로 가서 나와 대련하자고 해보기도 했고, 기자를 부르기도 하겠다고 했다. 그 학교를 떠나라고 권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그러면 퇴학시키라고 전화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다른 공업고등학교로 전학하는 길을 마련해주겠다고 했다. 학생과 학부모가 받아들여서 그 학교에 전화해서 마무리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의 생각이다. 학생들은 다른 방향으로 물꼬를 만들어 주면 그곳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면서 하나의 인간으로 성장해 간다.


그뿐이랴. 재미있는 사건을 다 열거할 수 없지만 하나만 더 소개하겠다. 무주의 한 고등학교에서 교사와 여학생의 부모님과 뺨을 치고 패는 사건이 터졌다. 기자로부터 제보받았다. 오전 11시경이었다. 난리가 아닐 수 없었다. 얼마나 큰 사건인가? 기자에게 오늘 중으로 해결하겠으니, 기사화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만약 처리하지 못하면 다음 날 기사화해도 좋다고 했다.


학교에 전화해서 상황 파악을 했다. 전날 여학생이 늦게 등교하기에 교문에서 생활지도를 하다가 뺨을 한 대 때렸단다. 여학생인데 아마 불손한 행동에 대해서 선생님이 화가 났는지 뺨을 한 대 때렸다고 했다.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 선생님과 여학생은 전년도의 담임과 제자 사이였고, 지나친 관심과 사랑이 넘쳐서 그랬단다. 그래도 여학생인 것을 망각하고 손으로 뺨을 때렸으니, 학부모가 화가 났을 법도 했다. 아버지도 계시지 않으니, 어머니로서는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교장 선생님과 그 선생님에게 직접 바로 학생 집으로 가서 잘못했다고 사과하라고 했다. 그런데 소용이 없었다. 최초로 제보를 한 기자에게 사정했다. 선생님과 같이 가서 이해를 촉구하는 말을 해달라고 했다. 시간은 자꾸 갔다. 학교운영위원장에게 전화했다. 무주로 내가 갈 테니 같이 가서 학부모님을 설득하자고 요청했다. 무주까지 올 필요 없다고 했다. 훌륭하신 학교운영위원장님이셨다. 최선을 다해서 해결하겠다고 했다. 교장 선생님과 같이 가서 해결을 해보겠다고 했다.


선생님도 선생님 나름대로 할 말이 많겠지만,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보는 교무실에서 서로 간에 뺨을 때리고 했으니, 약한 쪽은 선생님이었다. 학부모님과 전화도 했다. 학부형은 분이 풀리지 않았다. 내가 무주로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오지 말라고 막무가내였다. 해결의 실마리는 바로 학생에게 있었다.


학생을 학교에 계속 보내고 싶은지 아니면 전학을 시킬 것인지를 물었다. 전학을 보내려면 하시고 싶으신 대로 하시고, 학교에 계속 다니게 하시고 싶으시면 내 말대로 해주시면 좋겠다. 교장 선생님과 선생님을 보내서 사과토록 하겠다고 했다. 저녁에 식사하면서 선생님이 사과하면서 풀어보라고 했다.


다행스럽게도 음식점을 하는 집이었다. 교장 선생님, 운영위원장님과 선생님을 저녁에 그 집에서 식사하면서 설득하라고 했다. 무주로 오지도 못하게 하니 답답했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설득이 주효했다. 학생이 학교에 계속 다니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해 달라고 요구하면서 없었던 일로 하겠다는 전화를 받았다.


또 하나의 복잡한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니 안심이었다. 여러 가지 사례를 들었듯이 2년 반 동안 생활지도 업무를 맡았음에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고, 신문이나 방송에 크게 오르내리지도 않고 도 교육청의 장학사 임무를 마친 것을 나의 큰 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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