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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찬 Apr 17. 2024

<9부> 학교 경영에 발을 내딛다

#1. 전주 전일중학교 교감으로

2003년 3월 1일 자로 전주 시내에 있는 남녀공학의 중학교인 전일중학교에 교감으로 발령받아 근무하게 되었다. 그냥 도교육청에 장학사로 근무하다가 교장으로 가겠다고 국장님께 말씀드렸었다. 혼났다. 바보같은 소리를 한다고 야단맞았다. 학교 현장에서 학교 경영 수업해야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소식을 알고 전일중학교 교장 선생님께서 전일중학교로 오라고 했다. 그러겠다고 했다. 그래서 전일중학교로 발령받게 되었다. 학생 수는 엄청 많았다. 학부모님들은 생업에 종사하느라고 학생들에게 대부분 신경을 쓸 수 없는 가정환경이 대부분이었다. 학교 안팎이 쓰레기 천국이었다. 학생들은 여기저기 침을 뱉고, 낙서는 말할 수 없이 많았다. 내가 교감으로 근무하는 동안에 환경을 바꾸겠다고 하고서 날마다 아침 일찍 출근했다.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고 교문에서 학생 지도를 하기 시작했다. 복장에서부터 지각생 지도까지 지도하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마다 학교를 순회했다. 화장실에서 담배 피우는 학생들이 있어서 지도하기 시작했다. 적발되는 학생은 청소시켰다. 반성문을 쓰게 했다. 부모님께도 직접 전화하고 지도를 부탁했다. 교감이 직접 전화하니 학부모님들도 미안하게 생각했다. 질서가 잡혀가는 듯했다.


학생들의 생활지도는 혼자만의 힘으로 되지 않는다. 아침 조회 시간마다 훈화를 요청했다. 선생님들과 하나가 되었다. ‘교육은 때가 있다. 이때를 놓치면 다시는 이 시간으로 돌아와 가르칠 수도 없고 배울 수도 없다. 이렇게 해도 시간은 가고 저렇게 해도 시간은 간다. 이왕이면 조금만 학생들에게 투자하자’라는 것이 나의 교육에 대한 지론이자 철학이다.


선생님들에게 ‘우리의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 만큼만 가르치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우리의 아이만큼 생각해 보자’라고 했다. 호응이 대단했고 나 스스로도 본을 보였다. 효과가 있었고, 학교 안팎은 깨끗해지기 시작했다. 낙서도 지우고 난 자리에는 다시 쓰는 일이 없어졌다. 휴지도 점차 버리는 것이 줄어들었다. 그사이 학교의 중정에 있는 조그마한 연못을 주사님들과 함께 깨끗하게 치웠다. 고기가 이리저리 헤엄쳐 다니는 모습도 보였으니, 학생들도 좋아했다.


보도블록은 껌이며 각종 오물로 더럽혀져 있었다. 주사님들을 붙들고 사정했다. 나와 같이 소방호스를 끌어 내려 청소하자고 했다. 흔쾌히 따라나섰다. 하이타이와 솔을 샀다. 물 뿌리고 하이타이를 뿌리고 솔질하면서 깨끗하게 닦기 시작했다. 오전 내내하고 있었으니, 학생들이 보고 난리였다. 학생들 마음속에 교감 선생님이 저렇게 스스로 청소하는 모습을 보고 무엇을 생각했을까? 학생들 마음을 자극하는 것이 큰 효과를 노리는 것이었다. 끝나고 점심은 풍족하게 중국 음식과 고량주도 시켜서 함께 먹었다.


그 후로는 학생들도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교육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본을 보이는 교육이어야 한다. 학생들에게 감동을 주는 교육이어야 참다운 교육이다. 선생님들은 그냥 하자고 하면 아니 된다. 학교에는 매실나무가 몇 그루가 있었다. 그 이전까지는 이리저리 시나브로 없어졌단다. 아저씨들과 함께 땄다. 많은 양이었다. 깨끗하게 씻었다. 절반은 매실 엑기스로 담았다. 절반은 매실주를 담았다.


어차피 친목 활동에는 술이 있어야 했기에 친목회비를 미리 당겨서 소주를 사고 설탕을 사서 담갔었다. 석 달 후에 엑기스를 걸러서 각 연구실로 한 병씩 보냈다. 선생님들 모두 좋아했다. 매실주는 걸러서 친목 행사 때마다 내어놓았다. 그냥 마시는 소주보다 좋아했다. 선생님들 모두 이해 해주어서 무척이나 고마웠다.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있었는데 화장실에서 불이 났었다. 기름걸레에 담배를 피운 학생이 담배꽁초를 버려서 불이 났다. 지나가는 주민에 의해서 신고 되어 소방차까지 출동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이튿날 아침에 출근하니 학교가 엉망이었다. 1층과 2층의 복도는 온통 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1층 화장실에서 발화했기에 1층은 아예 복도가 말이 아니었다. 화장실의 천장은 뜯어내고 고치기로 했다. 그리고 1층 복도는 페인트칠하기로 하고 2층은 닦아내기로 했다. 하루의 해가 어떻게 간지도 모르게 지나갔다. 모두가 한마음이 되었다. 뜯어내고 고치고 칠하고 닦아내고 하니 예전보다도 더 깨끗해졌다. 소방차까지 출동했는데 벌금은 30만 원이었다. 나는 기뻤다. 그 이유는 30만 원 이상이면 도교육청에 보고가 되고 징계받아야 했다. 그러면 나의 교장 발령은 끝이었다.


지역사회와 학교가 하나가 되어 있었고 모두가 열심히 하고 새롭게 태어나려고 노력하는 선생님들을 가상히 여겼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아무 일 없이 점점 한 해 가면서 선생님들의 1박2일 여행도 즐겁게 진행되었다. 매실주를 가져갔다. 잘 숙성되어 있어서 회와 곁들여서 한 잔씩 했다. 지나간 일을 모두 잊어버리면서 즐거움을 만끽했다.


12월로 다가서면서 3학년 학생들도 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진학성적도 전년도에 비해서 훨씬 좋았다. 선생님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어디에서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가르치던지 최선을 다하면 학생들도 따라온다. 학부모님들 이해해 주고 사소한 일도 지나쳐 준다. 학부모와 학생, 교사가 하나일 때 학생은 성장을 해가고 하나의 인간으로 만들어져 간다. 평범한 진리다.




#2. 순창제일고등학교 교장으로

2004년 3월 1일 순창제일고등학교에 교장으로 발령받았다. 문용주 교육감님께서 제일 먼저 챙기셨단다. 그 인연은 2002년 정부종합청사에서 청소년보호위원회로부터 대통령표장을 받을 때 30여 분간 로비에서 흉허물없이 대화한 것을 기억하고 계셨는가 보다.


문용주 교육감님의 심화증에 대해서 걱정하면서 대화했던 것을 기억했었는가 보다. 순창제일고등학교는 원래 순창농림고등학교였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농업관련학과는 없어지고, 인문과와 상업과, 그리고 자동차과가 있었다. 상업과를 점차 줄이면서 자동차과로 변경이 되어 가고 있을 때 부임하게 되었다.


첫날 부임 인사에서 선생님들께 학교 운영은 교장선생님인 내가 책임지고 운영하겠다. 선생님들께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열심히 따라 주면 좋겠다. 금전적으로 문제가 있다든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주면 좋겠다. 그러면 미련 없이 학교를 떠나겠다고 하고 책임경영을 약속했다.


학교는 부지가 워낙 넓어서 어떻게 일해야 할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무리 학생들을 데리고 청소하여도 지저분했다. 한쪽을 치우고 나면 또 다른 쪽이 어지러워지고 또 청소하면 또 어지러워지고 했다.


우선 자동차 실습장부터 정리했다. 폐차된 자동차와 사용하지 못할 부품들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고물을 주워 파는 사람을 불렀다. 몇 푼만 받을 테니 어떻게 해서든지 자동차 실습장 주위를 깨끗이 치우라고 했다. 20여 일 걸려서 깨끗하게 정리 정돈이 되었다. 학교에 있는 실습용 부지를 학교 소유의 굴착기를 동원해서 정리했다. 한 구석 한구석 정리를 해나갔다.


운동장은 너무나 넓었다. 아마도 전북 모든 학교에서 면적 대결을 하자면 서러워할 만큼 아주 큰 운동장이었으리라. 운동장은 정구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김종환 기자에게 부탁해서 지게차에 기다란 H빔을 매달아 평평하게 잡풀 하나 없이 정리해 주었다. 학생들이 축구하는데 좋아했다. 운동장 가장자리의 공터에 있는 쓰레기가 산더미 같았다. 치우고 태우고 했다. 한 번에 다 태울 수가 없었다. 조금씩 조금씩 태우고 언덕 밑으로 밀어 넣어서 묻기도 했다. 그곳에 호박을 심든지 고추를 심든지 하자고 하였다. 몇몇 선생님은 꽃도 심고 허브를 사다가 심어 가을 축제에 내놓기도 했다.


다음으로 달려든 곳이 실습장이었다. 8,000평은 족히 되었다. 온통 갈대와 돼지 감자밭이었다. 그동안은 조금씩 몇 군데 선생님들께서 일구어 채소를 심은 흔적이 있었다. 8천여 평을 더하기에는 힘에 부쳤다. 우선 조금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에 고추를 심기로 했다. 소를 키우는 학부모 집에 가서 거름을 달라고 했다. 덤프트럭으로 다섯 차 이상 실어 왔다. 소를 키우는 목장은 학교 실습지를 임대해서 사용하고 있는 집이었으므로 이야기가 통해서 구했다.


물론 학교 굴착기를 끌고 3km 이상을 갔다. 위험한 일이었지만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학생을 시켜서 했다. 중장비가 있으니 쉽게 할 수 있었다. 고추 농사도 그런대로 되었다.


다음 해에는 학부모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밭을 좀 갈아 달라고 했다. 밭에 옥수수를 심어 장학금을 만들겠다고 했다. 흔쾌히 트랙터를 학생이 자기 집에서 가져왔다. 내가 요청하는 대로 갈아 주었고 밭이랑도 만들어 주었다. 내가 손수 나서서 하니 학교 주사님들도 어쩔 수 없이 따라 했다. 그렇지만 불평도 많이 했지만 달래가면서 했다. 징계받은 학생들을 데리고 밭이랑을 고르기도 하고 씨앗을 심기도 했다. 일단 땅을 일구기 쉬운 곳부터 했다. 옥수수 심는 일은 사람의 손으로 해야 했다. 호박도 심었다. 오이도 심었다. 고추도 심었다. 열리는 족족 따다가 선생님들께 드렸다.


그러면서도 선생님들께 하나가 되어 가르치는 데 최선을 다하자고 했다. 눈물겹도록 열심히 따라 주었고 열심히 해주었다. 동창회장님과 장학회 회장님도 찾아다녔다. 순창지역의 동창회도 활성화해 달라고 했다. 호응이 좋았다. 우선 내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인정해 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순창제일고등학교의 전체 부지를 엄청나게 많이 기부해 학교가 설립될 수 있도록 해주신 지산 김영무 선생님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묘지는 학교 동산에 있었고 학교에서 해마다 벌초는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손은 전혀 와보지를 않는다고 했다. 순창제일고등학교의 총동문회는 순창중학교, 순창여자고등학교, 순창농림고등학교의 출신들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동창님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서 정신적 지주이신 지산 김영무 선생님의 묘사제를 지내기로 했다. 4월 한식날을 잡아서 묘사제를 지내기로 하고 동창회에도 알렸다.


학생들도 모교 사랑 정신을 심어주기 위해서 참여시키기로 했다. 박근호 주사가 헌신적으로 나를 도와주었다. 순창중학교에서 같이 근무했던 인연이 컸었다. 어디 내놓아도 비록 기능직 사무원이었지만 손색이 없는 공무원이었다.


음식은 만들 수 있는 것은 가정 선생님께서 학생들을 데리고 하루 전날 만들었다. 어려운 것은 음식점에 주문했다. 제법 그럴듯하게 준비해서 한식날 묘사제를 지냈다. 동창회에서도 많이 참석하셨다. 학생들도 전원 참석시켰다. 충분히 참석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묘사제의 형식에 맞게 제를 지냈다. 전체 학생들에게도 나누어 줄 만큼 떡도 준비했다. 점심에는 특별히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도록 준비도 했다. 비록 묘사제이지만 하나의 작은 축제로 학생, 학교, 동창을 하나로 묶는 행사로 만들었다. 그 결과 동창회에서 학교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모두가 흡족하게 생각한 지산 김영무 선생님의 묘사제는 그렇게 끝났다.


순창읍에는 공립인 순창제일고등학교와 사립인 순창고등학교가 있었다. 인문과와 자동차과로 학년당 120명의 정원에 겨우 90~100여 명의 학생들밖에 모집이 안 되었다. 선생님들과의 관계를 이끌어 가는 데 마음을 열어주어야 했다. 내가 솔선수범하는 길이 최고였다. 이리저리 뛰면서 휴지도 줍고 학생 지도도 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습관으로 8시까지는 출근했다. 아침 보충수업이 있으니, 선생님들도 일찍 출근했다. 보충수업은 능력별로 했다. 요사이 말하는 수준별 수업으로 진행했다. 그리고 학생들의 희망도 고려했다. 학생들도 하나씩 하나씩 틀이 잡혀가고 있었다. 정보처리과의 여학생들도 점차 문란한 학교생활에서 질서를 잡아가고 있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는 말처럼 장시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일단 학교의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했다. 지역민 속으로 파고들어 실업계고등학교가 아닌 인문계 고등학교의 면모를 보여 주어야만 했다. 점점 인식이 바뀌어 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자동차과의 필요성도 인식시켰다. 공부에 취미가 없어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주어야 미래가 있다는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이야기했다. 그렇다. 자동차과는 꼭 필요한 학과였다.




#3. 학생 모집을 위하여

9월부터 학생을 모집하는데 학생들을 통해서 홍보하기 시작했다. 동창회원들을 통해서 학교의 발전해 가는 모습을 설명해 드리고, 홍보의 전면에 나서주실 것을 부탁드렸다. 학교 홍보 팸플릿도 만들었다.


각급 중학교 3학년 학생을 대상으로 학교의 좋은 점을 홍보했다. 그동안의 쌓은 인맥으로 교장 선생님들도 찾아다녔다. 점점 입시가 다가오면서 선생님들께 공부 잘하고 못 하고는 문제 삼지 말고 일단 학생 수부터 채우자. 공부를 못한다고 영원히 공부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학생을 정원만큼 채우자고 했다. 눈물겹도록 남선생님, 여선생님 할 것 없이 하나가 되어서 뛰고 또 뛰었다.


선생님들에게 각자 각자 역할 분담도 했다. 쌍치 골짝, 섬진 골짝, 복흥 골짝, 삼계 골짝뿐만 아니라, 중학교 3학년의 학생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갔다. 우리말로 이 잡듯이 찾아다녔다. 학교에서는 어떠어떠하게 가르치겠다. 장학 혜택은 어떻게 주겠다. 성적에 따라서 최고 100만 원에서부터 장학금을 주겠다고 약속도 했다. ‘생활이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수험료를 면제시켜 주겠다.’라고 하면서 설득도 했다.


그런데 실업계고등학교라는 이미지를 벗겨내기가 가장 힘이 들었다. 있는 사실 그대로 설명하라고 했다. 나도 있는 대로 사실대로 설명했다. 정보처리과는 올해로 끝이 나고 자동차라는 특기가 있는 학생과 공부를 못하면서 공부는 하기 싫고 무엇인가 기술을 배우겠다는 학생이 가는 곳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내가 있는 동안에는 절대로 필요로 하는 학과이고 학생들을 위해서도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공부한다고 하는 학생은 일차적으로 선생님들이 만나고 그다음에는 내가 직접 학부모님을 만나서 믿고 맡겨달라고 했다.


선생님들의 눈물겨운 노력의 결실이 나타났다. 학생 수가 120명의 정원을 넘어섰다. 일단은 성공했다. 자동차과는 자동차과 선생님들이 움직이었다. 남원, 임실, 정읍, 심지어 전주까지 아는 선생님이 있는 곳이면 네 분의 선생님이 똘똘 뭉쳐서 학생 모집에 힘을 기울였다.


자동차과도 정원을 넘어섰다. 정원이 넘치니 이번에는 조정을 하는 데 애를 먹었다. 정원만 채우고 나머지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어도 옆의 순창고등학교로 안내했다.


학부모님들께서 학생을 믿고 맡겨주었으니 잘 가르쳐야 하는 숙제가 남았다. 그런데 아주 이상적인 교사 진영이 갖추어져 있었다. 국어, 영어, 수학 선생님들이 세 분씩 계셨다. 인문과 학생들을 수준별로 반 편성을 했다. 성적과 희망, 적성을 고려한 반 편성이었다. 과목별로도 수준별로 편성했다. 이상적으로 수업을 진행할 수가 있었다. 보충수업도 수준별 반 편성했다. 학생들의 능력에 맞게 수업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신성적 때문에 시험문제 출제가 큰 장애물로 등장했다. 과목 선생님들끼리 진지하게 토의했다.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이 불이익당하지 않는 방법을 심도 있게 논의했다. 그 결과 C반을 기준으로 해서 점점 난이도를 고려해서 시험문제를 출제하고 수행평가도 C반을 기준으로 해서 하도록 결론을 짓고 평가했다.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난이도가 높은 정도로 평가하도록 해서 학생들로 하여금 학교를 믿고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신념을 심어주었다.


기숙사 운영이 문제였다. 가난하고 거리도 멀고 한 학생들과 상위권 학생들로 기숙사를 운영했다. 남선생님과 여선생님께서 기숙사에서 자기도 했다. 그렇지만 주로 남선생님들이 숙식하면서 학생을 지도했다. 물론 자동차과 선생님들은 자동차과의 기숙사를 맡아 지도하도록 했다. 또한, 식비와 지도비도 많지는 않았지만 제공해 주었다.


동창회의 장학회에 편성된 예산이 있었다. 9시 50분까지 야간 보충수업을 하였다. 집이 가까운 학생은 가고 나머지 학생은 기숙사로 와서 일단은 청소와 정리를 하고 스스로 자율학습을 하도록 했다. 최대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주었다. 컴퓨터실도 만들어 주었다. 작은 도서관도 만들어 주었다.


교장인 나도 최소한 1주일에 한 번씩은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똑같이 자고 생활했다. 단, 6시에 일어나 운동장을 돌면서 뛰는 것을 제외하고는 똑같이 활동했다.


보충수업은 저녁 7시에 시작해서 9시 50분에 끝났다. 1교시가 끝나면 선생님들이 전주로 가고, 2교시가 끝나면 또 가고, 마지막 3교시에 수업하시는 세 명의 선생님은 학교의 기숙사에서 자면서 학생들 지도에 열정을 바치고 있었다.


정말로 나와 같이 학교에서 생활하면서 군소리 없이 잘 따라 주었던 선생님들께 진심으로 머리 숙여 고마운 마을을 전합니다. 교무실에서부터 행정실까지 학생들이 공부하는데 불편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였으니, 입소문을 타고 순창지역에 퍼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부터는 학생 모집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2년 차 학생 모집에서는 인근 순창고등학교가 타격을 받았다. 5학급 모집에 4학급의 학생만 모집된 것. 학급을 채우지 못한 순창고등학교에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순창제일고등학교가 원인이라고 했지만, 열심히 홍보도 하고 열심히 가르치는 학교를 인정해 주는 학부모들이었기에 우리는 정원을 다 채웠다.


그다음부터가 문제였다. 학생 하나를 데려오기 위해서 산골짜기까지 찾아가 헤매던 선생님들과 함께 나도는 2년 차에도 그랬다. 공부를 중학교에서 잘한다면 몇 번이고 찾아가서 학생과 학부모님을 찾아가서 설득했다.

한번은 전주에서 다섯 시 반에 출발해서 쌍치면 소재지의 학생 집에 6시 반경에 대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서 있기도 했다. 11월이라 어두웠다. 산외 구절 고개를 나 혼자 새벽녘에 넘어간다면 어떠했겠는가? 꼭 뒷자리에 머리 풀고 소복을 입고 있는 여인이 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할 때마다 머리털이 뻣뻣해지곤 했다.


하지만 쌍치중학교에서 1등을 하는 학생을 데려와야겠다는 마음 하나로 약도만 가지고 찾아가 대문 앞에서 30여 분 기다리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나오셨다. 깜짝 놀라면서 ‘누구요?’ 하였다. 나는 ‘할아버지의 귀여운 손녀를 데려다가 훌륭한 사람으로 가르치기 위해서 온 순창제일고등학교 교장입니다.’라고 했다. 방으로 들어가자고 하셔서 들어가 복분자 차도 얻어 마셨다. 학교의 상황에 대해서 학생과 학부모님, 할아버지도 함께 한자리에서 설명하였다. 반 승낙받고 학교로 왔다. 감동을 주는 학생 모집이었다.


또 다른 학생을 말해 보겠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다 실패한 분이 순창으로 다시 내려온다는 말을 행정실 박근호 주사님한테서 들었다. 서울 동구여자중학교에서 1~2등을 한다는 학생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 학생만큼은 놓치지 않겠다고 하고 일단 전화하면서 학교의 내용을 설명했다. 만나자고 하고 서울로 달려갔다. 원서를 들고 달려갔다.


서울의 한 호텔 커피숍에서 만나 홍보자료와 학교의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숨김없이 솔직하게 설명했다. 학생만 학교에 보내주면 300만 원의 장학금을 주고, 공부하는데 어려움 없이 쓸 수 있도록 매달 10만 원씩 통장에 들어가도록 동창회원님과 멘토링을 시켜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학부모님이 직접 학교를 방문해서 모든 것을 보고 결정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학부모님께서 학교를 직접 방문했다. 물론 순창고등학교도 그 학생을 데려가려고 노력했단다.


하지만 원서를 우편으로 보낸 학교와 직접 교장이 원서를 들고 찾아간 학교와 비교를 하면 어느 쪽의 신뢰성이 더 있겠는가 말할 때 안심이었다. 그래도 믿기지 않아서 또 순창의 전통 고추장을 사서 동구여자중학교 교장, 교감, 담임선생님을 뵙고, 이야기를 자세하게 학부형이 계시는 곳에서 설명했다.


담임선생님은 이왕이면 열성적인 교장 선생님의 순창제일고등학교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담임교사가 원서를 직접 써주어서 가지고 내려왔다.


어디 그뿐이랴. 학생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는 나였다. 임실 섬진중학교에서 1등 하는 학생에 대해서 욕심이 생겼다. 선생님들이 그 학생을 설득하고 집까지는 갔는데 순창고등학교로 갈 것인지 제일고등학교로 갈 것인지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다는 말을 듣고 감동을 주는 행동을 또다시 취하기로 하였다.


선생님더러 정확한 약도를 그려 달라고 하였다. 약도만 가지고 전주에서 새벽 6시에 출발했다. 어둠을 뚫고 고개를 넘을 때마다 산발한 처녀 귀신이 뒤에 타 있으면서 내 어깨를 만지는 기분이었다. ‘이왕이면 예쁜 처녀 귀신이었으면!’ 농담이지만 무서움이 엄습해 왔지만 그래도 놓칠 수 없는 학생이었다.


순창지역의 읍 단위 학교지만 명문화 고등학교를 만들려면 명문대학에 학생을 입학시키는 길밖에 없다는 생각이 무서움을 짓눌러버리고 평상심으로 돌아와 차를 몰고 달려갔다. 강진을 지나 동계면 방향으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약도를 보기 시작했다. 천담초등학교가 있었던 곳에 조금 못 미쳐서 왼쪽으로 접어드는 약도를 따라 한참이나 가니 동네가 있었다.


그런데 그 동네를 지나가야 하는데 삼거리 길에서 헷갈렸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의 노랫가락이 생각났다. 사람이 나오길 기다렸다. 한참 지나서야 한 어른이 나오시길래 물었다. 골짜기로 한참 올라가면서 맨 끝 집이란다. 울퉁불퉁, 꼬불꼬불 좁은 길로 찾아갔다.


일어나 밥을 하시는 어머니, 짐승들에게 밥을 주는 아버지가 깜짝 놀라셨다. 순창제일고등학교 교장으로 학생 모집 때문에 왔다고 했다. 일단 방으로 들어가서 학생과 같이 이야기하고 아침도 먹고 왔다. 물론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니 장학금도 넉넉히 주겠다고 했다. 순창제일고등학교로 원서를 쓰겠다는 허락을 받았다.


이렇게 좋은 학생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니, 학교 분위기도 훨씬 좋아졌다. 제대로 명문 고등학교로 차츰차츰 가는 길을 걷고 있었다.




#4. 장학금을 만들기 위하여

장학금을 마련한 것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순창제일고등학교의 동창회는 전주 스타저축은행의 양효섭 회장님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 뒤를 이어서 김대유 회장님이 맡았고, 양효섭 회장님은 장학재단의 이사장을 맡고 계셨다.


부임하자마자 서울 강남 현대 타워팰리스의 사무실로 찾아갔다. 마침 그 건물의 관리소장이 셋째 동생이어서 찾아가기가 쉬웠다. 양효섭 회장님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인자하시면서도 날카롭게 보였다.


대화를 시작했다. 학교 경영방침에 대해서 설명을 했지만 믿지를 않았다. 앞선 교장 선생님들을 떠올리면서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앞선 교장 선생님들께서 학교를 운영했던 것은 그분들의 철학으로 운영했고, 나는 나대로의 학교 운영철학이 있으니 믿으시면서 지켜보아 달라고 했다.


2시간 이상의 대화였다. 상견례 수준에서 이야기하였다. 점심 대접을 잘 받고 돌아왔다. 유달리 모교에 대한 애정이 깊으신 분인 것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양효섭 회장님의 신임을 얻는 길만이 내가 순창제일고등학교를 명문화시키는데 지름길이라는 신념을 가졌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1년에 3천5백만 원의 장학금을 장학회에서 준다는 것이었다. 거의 2천만 원 이상을 양효섭 회장님 개인의 돈으로 출연해서 준다는 것이었다. 대단한 분이셨다.


학생을 모집하는 데 쓰고, 학생들에게 성적순에 따라서 장학금도 주고, 3학년 담임수당도 주고, 기숙사 사감비와 급식비를 지급하면 빠듯했다. 그러나 다른 학교에 없는 장학금 제도였다.


나는 나름대로 한 푼의 장학금을 만들기 위해서 학교의 공터를 경작했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옥수수와 고추에서 백만 원 정도의 소득이었지만, 그래도 학생들에게 지급하고 있었으니, 동창님들의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학교의 행사와 실적이 있으면 싸 들고 가서 설명했다. 진학 상황도 전년도와 비교해서 설명했다. 그러니 서서히 나를 믿고 학교를 믿어 주었다. 장학금도 요구했다. 공식적인 장학금 외에 몇백만 원씩 주셨다. 필요하면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묻지도 않고 바로 다음 날 학교 장학금 통장으로 들어왔다. 어디에 사용했는지 결과는 묻지 않으셨다. 양효섭 회장님은 사람이 그런가 보다. 한번 신임하면 끝까지 믿는 성격이었다. 그러한 분이 계셨기에 나는 더 열심히 했다. 명문고로의 발전의 기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양회장님을 학교에 모시고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여드렸다. 흡족해하셨다. 다른 동창회원님들도 선뜻 장학금을 요구하면 주셨다. 그리고 한 달에 10만 원씩 학생 한 명씩을 멘토해서 달라고 하면 거절을 하는 분이 한 분도 없었다.


순창제일고등학교의 동창님들은 훌륭했다. 사무실로 찾아가면 이야기하시는데 정신없다. 다른 누구에게 하지 않던 이야기도 다 해주셨다. 가정사까지도 다 이야기 해주셨으니 나를 신임해도 단단히 신임하셨는가 보았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훌륭한 분이시다.


그분의 사후에 지산 김영무 선생님처럼 학교 동산에 모시어 영원히 학교를 지켜달라고 하고 싶다. 나의 꿈은 그분을 학교에 모시는 일이다. 물론 나의 모교는 아니다. 순창에는 연고도 없다. 그러나 나의 꿈을 펼친 곳이고 교직을 떠나면서 모든 것을 받쳐서 학교다운 학교로 만들어 놓았기에 애정이 더한 것은 사실이다.




#5. 진학의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진학 사항을 빼놓을 수 없다. 선생님들의 노력으로 학생들도 학교도 점진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게 나아져 가고 있었다. 워낙 밑바탕이 없었으니 2004년도의 진학실적은 빼어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전년도의 수준 이상이었다.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순창군에서 2003년 9월부터 운영해 오고 있는 옥천 인재장학숙이 있어서 좋았다. 나의 뜻과 맞아떨어지는 교육을 해주었다. 순창에는 대학입시를 전문적으로 하는 학원이 없었으니, 몇몇 학생은 광주에 있는 학원까지 갔다 오곤 했다.


인재숙이 생기기 전까지 그랬으니, 순창군의 고등학생들이 반듯한 대학교에 진학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공부를 한다는 중학교 학생들이 다른 지역으로 진학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상황이었다.


대학입시로 넘어가 보자. 2004년도에 부임해서는 좋은 명문대학에 입학성적을 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전북대학교와 전남대학교 등 국립대학과 서울의 SKY대학은 아닐지라도 몇몇 대학에 합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2005년에 접어들었다. 앞서 밝혔듯이 선생님들의 눈물 어린 노력으로 정원을 채웠으니, 학생들의 실력향상에 심혈을 기울였다. 1년간의 노력 끝에 순창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전주교육대학교에 처음으로 한 학생이 입학하는 쾌거를 안았다. 대단한 성과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몇 명에 불과했던 전남대학교와 전북대학교에 30여 명의 학생이 합격하였고, 서울지역의 명문대학교는 아니지만 사립대학교에 합격하는 쾌거를 이루어 냈다.


2006년은 내가 순창제일고등학교로 간 지 3년 차가 되는 해였다. 선생님들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우수한 학생을 데려오는 것 못지않게 훌륭한 선생님을 모셔 오는 것이 급선무였다. 선생님들이 추천받아 전화로 의향을 묻고 직접 만나 순창제일고로 모셔 왔다.


이번에는 서울대학교에 문을 두드렸다. 드디어 한 명의 학생이 합격했다. 역시 순창에서 처음 있는 경사스러운 일이었다. 현수막도 여기저기 걸어서 홍보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려대학교에도 한 학생이 합격했다. 물론 전주교육대학교뿐만 아니라 인천교육대학교에도 들어갔다. 문을 열어 놓으니 닫힐 일이 없다.


이렇게 해서 학교는 매년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연세대학교와 고려대학교뿐 아니라 교육대학에도 합격하는 일이 계속 일어났다. 물론 순창고등학교도 사립학교이니 같이 경쟁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 모집에서부터 가르치는 것까지 보이지 않은 경쟁이 심했고, 물러설 수 없을 정도로 지역사회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진학지도에 온 힘을 쏟고 있었다.


전통이 세워지면 쉽게 무너지지 않는 법이다. 그렇기에 모든 고등학교가 명문고등학교가 되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좋은 현상이다. 세계적인 인재를 양성하는 데는 학교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은 선생님들의 몫이다. 교사는 그냥 가르치는 일만이 교사가 아니다. 학생들에게 꿈을 심어주면서 그 학생들의 잠재 능력을 계발시켜 주어야 한다. 선생님들을 위해서 교장은 해야 할 일이 따로 있다.


교무실은 교감 선생님에게 맡겨야 한다. 행정실은 행정실장에게 맡겨야 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을 부여해 주어야 한다. 사사건건 간섭해서는 안 된다.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제공해 주는 것이 교장의 역할이다. 교장은 선생님들의 복지와 근무 여건 개선을 최우선시해야 한다.




#6. 승진의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승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밖으로 뛰어야 한다. 그래서 선생님들이 믿고 따라 주도록 해야 하는 것이 교장이 해야 할 일이다. 부임할 당시에 도교육청의 연구학교를 2년 차 하고 있었다. 승진 가산점에는 연구학교 운영에 대한 점수가 필수적이었다.


2005년도에는 점수가 많은 교육부의 연구학교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2004년은 교육부에 찾아가기도 했다. 교육부의 연구학교를 어떻게 하면 가져올 수가 있을까 고민하고 고민하던 중에 한 분을 소개받고, 무턱대고 7월 중에 교무 선생님과 여선생님 한 분, 체육부장, 그리고 교장인 나 넷이 함께 정부종합청사로 달려갔다.


교육부에 소개받은 분을 찾아갔다. 부닥쳐 보고 노력해 보겠다는 마음 하나로 결행을 한 것이다. 순창제일고등학교를 살려달라고 매달렸다. 그러나, 그분이 결정할 문제는 아니었다. 윗사람도 있었으니, 사정 이야기만 하고 내려왔다.


9월에 또 올라갔다. 이번에는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점심 식사 자리를 잡고서 몇 분과 우리 선생님들과 함께 식사하면서 시골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리고 점심시간이었지만 아주 간단하게 건배주를 하면서 식사도 하고 담소도 했다. 정부종합청사로 들어가 김모 과장님께도 인사를 드렸다. 광주가 고향이었고, 발탁되어서 교육부에 근무하고 계신다고 했다. 모든것을 이야기하고 도와주시면 꼭 좋은 학교로 만들어 가겠다고 하고서 내려왔다.


점점 연구학교를 공모하는 시기가 다가오니 걱정이었다. 참지 못하고 10월 말에 또 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어떤 주제로 하고 싶으냐고 했다. 도서관의 운영에 관한 것으로 하고 싶다고 했다. 2005년에 드디어 교육부 지정 연구학교를 가져와 선생님들 모두에게 승진 가산점을 부여받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2년간 교육부 연구학교를 실행하였다.


교육부 연구학교가 끝나고 또다시 도 지정 연구학교에 몰두하였다. 계속해서 선생님들을 위해서 도 지정의 연구학교도 했다. 내가 정년 퇴임할 때까지 6년간을 계속했다. 선생님들은 노력하고 있는 나에게 보답이라도 하듯이 맡은 분야에서 열심히 해주었다. 학생, 학부모, 교사, 동창회가 하나가 되었으니 발전하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오는 듯하였다.




#7. 학교 환경개선을 위해서

학교 환경을 바꾸는데도 소홀하지 않았다. 그것은 도교육청과의 유기적인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산이 투입되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먼저 기숙사 환경부터 바꾸어 주었다.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리고 이부자리도 모두 교체해 주면서 모든 이부자리를 광주에 있는 세탁소로 보내어 완전히 세탁하여 보관하고, 필요하면 주기도 했다. 기숙사 바닥도 완전히 교체하였다. 필요한 곳은 칸막이도 하고 컴퓨터실도 마련해 주었다. 지저분하고 거미줄이 쳐진 학교 전체를 도색도 하였다. 불가능한 예산으로 임실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서 도색하였다. KCC에 부탁해서 사진을 찍어 어울리도록 모형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물론 페인트는 KCC 제품을 쓰기로 약속했었다. 지금의 학교 모습이 그때 페인트칠을 한 것이다.


2007년에도 농산어촌 우수고등학교에 응모했다. 장학금을 만들려고 학교 부지를 관리기로 밭을 갈다가 언덕 아래로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오른쪽 다리의 골절이 발생했다. 3개월간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그래서 목발을 짚게 되었고, 목발을 짚고 다니면서 심사위원들을 모두 찾아다니면서 설명해 드리고 심사하는 날 멋지게 브리핑했다. 질문에 모든 것을 적나라하게 답해 주었다.


농산어촌 우수고등학교로 선정이 되었다. 2008년도부터 7억 원이라는 예산을 배정받아 학생들 실력향상에 쓰도록 했다. 보충학습비며 환경개선비이며 넉넉하게 쓸 수 있었다. 3년간 나누어 쓸 수 있도록 배분했다.


잊을 수 없는 추억 한 토막이 있다. 교실 바닥과 복도바닥을 친환경으로 모두 교체했다. 너무나 깨끗하였기에 교실 바닥에서 학생들이 나뒹구는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이었다.


2010년 정년하면서도 1억 원 가까이 남겨놓았었다. 한꺼번에 쓸 수 있는 예산이었지만 학교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앞으로의 계획도 철저히 세워서 운영해야 하는 것을 감안해서였다.




#8. 농산어촌 기숙형고등학교로 선정되다

바로 이어서 2008년도에 농산어촌 기숙형 고등학교에 응모했다. 물론 옆의 고등학교도 응모했지만 순창에서는 순창제일고등학교로 선정되었다. 2010년도부터 운영하도록 되어 있었다. 기숙사를 새로 짓는데 그냥 지을 수만은 없었다. 미래를 보는 기숙사여야 했다.


전국의 유명한 기숙사가 있는 곳은 다 가보고 좋은 점만 벤치마킹했다. 대학기숙사도 가보았다. 200명이 기숙할 수 있는 기숙사를 원했지만 예산과 수용 가능을 따져서 180명 수준에 맞추어서 짓기로 하고 장소는 동창회의 의견을 들어 짓기로 했다.


동창회의 의견이 분분해서 어려움을 겪었다. 홍보와 햇빛을 고려해서 현 위치로 정했다. 건물은 냉난방비를 고려한 친환경 건물이었다. 지열과 태양열을 활용하는 건물로 알뜰살뜰하게 지었다. 나의 온갖 정성이 깃들어져 있는 기숙사였다.


너무나 인문과 이야기만 했다. 자동차과 학생들에게도 특별히 신경을 썼다. 기숙사에서부터 공부하는 것까지 인문과 학생들과 똑같이 해주었다. 전국기능경기대회 도장 부분을 유치해서 자동차과도 시설개선에 최선을 다해 주었다. 도장실도 콤비 자동차까지 들어가 도장 할 수 있을 만큼 크게 지었다.


기존의 도장실도 완전히 바꾸었다. 모든 장비가 새롭게 갖추어졌다. 동문을 통해서 폐차되는 자동차도 기증받았다. 외제 차도 기증받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분의 노력으로 새로운 엔진도 네 개나 기증받았다. 예산을 배정받아 기존의 굴착기를 팔고 공2 짜리의 굴착기도 새로 샀다. 학생들에게 졸업할 때까지 최소 4개의 자격증을 따도록 했다.


굴착기, 지게차, 불도저, 자동차 정비는 기본적으로 꼭 따도록 했다. 자동차과 선생님들과도 약속하고 그것을 지키도록 했다. 7개의 자격증을 졸업 때까지 획득한 학생도 있었다. 도장 부분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장려상을 받은 학생은 호주로 취업을 가기도 했다. 모든 것을 다 해주기로 하고 연봉 4천만 원에 계약하고 떠나보낸 일도 있었다.


교직을 접어야 하는 정년이 다가왔다. 한 고등학교에서 그것도 공립학교에서 6년을 보낸 교장은 내가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후임 교장에게 부탁했다. 하드웨어는 갖추어졌으니 소프트웨어인 학생들의 실력향상에 최선을 다해 명문 고등학교를 계속 만들어 달라고 부탁도 했다.


이렇게 학교 전반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순창제일고등학교에서 정년을 맞이했다. 총동문에서도 정년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 많은 분이 참석해 주셨다. 그 화려한 정년을 무사히 마치도록 한 것은 나보다 뒤에서 묵묵히 뒷바라지한 집사람의 힘이 컸고, 믿고 따라 주면서 열심히 살아준 동생들도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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