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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찬 Apr 17. 2024

<10부> 교육위원이 되어

#1. 교육의원 선거에 뛰어들다

순창제일고등학교를 끝으로 36년간의 교직 생활을 접고 교육자로서 길고도 긴 장정의 길을 마무리했다. 교육의원(도의원)에 뜻을 두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은 2009년 7월 1일부터였다. 그 이전까지는 교육위원으로써 도교육청에 교육위원회가 있었지만,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부터는 도의회의 교육상임위원회를 두기로 했다.

간접선거에서 직접선거로 교육의원을 선출하는 방식으로 바뀌는 선거제도였다. 학교 운영위원들만의 간접선거가 아닌 직접선거이었다. 직접 유권자들로부터 표를 얻어야만 하는 직접선거였기에 주민인 유권자들에게 직접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7월 1일 이전부터 뜻을 세웠다. 교육에 못다 한 신념을 펼치고자 교육의원이 되기로 했다. 동생이 남원에 아파트 한 채를 사 놓은 것이 있었다. 그곳에 둥지를 틀고 주민등록도 옮겼다. 7월 1일을 선거에 출마하는 날로 잡고 명함도 준비했다. 그리고 혼자서 명함을 가지고 남원시청으로 달려갔다. 유난히도 지방선거에 출마하려는 입지자가 많았다. 시장에 출마하려는 입지자, 도의원에 출마하려는 입지자, 시의원에 출마하려는 입지자들이 이었다.


나와 초등학교 동기동창인 서 모 씨도 교육의원에 뜻을 두고 그 훨씬 이전부터 활동하고 있었다. 등산을 가는 유권자나 관광을 떠나는 유권자들은 대개 시청광장에서 출발했다. 구 남원역 광장에서도 출발했다. 그래서 지방선거에 출마하려는 입지자들은 시청으로 모여들기도 하였다.


관광버스에 올라타서 인사도 하고, 악수도 하면서, 명함도 주고들 했다. 나와 같이 교육의원에 뜻을 두고 움직이고 있는 서 모 씨도 자연스럽게 관광버스에 올라가 인사도 하고 악수도 하면서 명함을 주고 내려왔다. 나는 부끄럽고 창피하기도 해서 명함 한 장도 주지 못하고 가만히 서서 서투르게 인사만 하고 있었다.


‘교육의원에 뜻을 두고 있는 김정호입니다’라고 인사만 하는데 모든 입지자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인사를 하면서 명함을 주고 악수하는 것을 보니, 나도 하고 싶은데 주저주저하다가 여러 날 아침을 보내고 말았다.

학교에는 항상 9시 이전에 출근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교감 선생님과 행정실장에게 학교를 부탁하고 양해를 구했다. 물론 선생님들에게도 부탁드렸다. 그것이 처음 시작하는 선거운동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남원의 구 역전광장으로, 시청으로 쫓아다녀야만 했다. 처음으로 관광버스 안으로도 올라갔다. 시장 입지자의 보좌관 중에 한 사람이 나에게 관광버스에 올라가서 인사하면서 악수도 하고 명함을 주라고 해서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인 것처럼 안면몰수하고 버스에 올라타서 해보았다.


그렇게 어렵게만 생각되었던 것이 한순간에 풀렸다. 남이 하니 나도 했고 하다 보니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일 아침 거의 빠지지 않고 아침마다 계속했다. 특히 시장에 뜻을 둔 분들이 더 열심이었다. 시장은 하나인데 입지를 세우신 분들이 많으니 당연히 치열한 예비 선거운동이었다.


그래도 나는 둘이 뜻을 세우고 있었으니 다행이었다. 사무실도 준비해야 했다. 남원 오거리에 있는 3층을 계약했다. 시청 앞에는 사무실이 없었다. 그런데 시청 앞보다도 훌륭한 장소였다. 선거하는데 방법을 점차 물들어 가면서 준비했다. 혼자 한신아파트에서 생활하면서 서두르지 않고 시작했다.


주로 남원을 중심으로 시작했다. 가을이 되면서부터는 행사장에도 찾아다녔다. 특히 면민의 날 행사가 있으면 꼭 참석했다. 부모님과 같은 어르신들이 대부분이셨다. 인사하면서 악수도 하고 명함도 드리면, 웃으시면서 기꺼이 맞이해 주셨다. 역시 어르신들은 마음 정다웠고 정이 넘쳤다. 마을 잔치에도 찾아다녔다. 점심도 먹고 막걸리도 얻어 마셨다. 역시 시골 인심은 후했다. 겨울방학에는 더 열심히 찾아다니고 관광버스에 올라타는 것도 더 적극적이었다.




#2. 승진 기회를 포기한 집사람 김영화

그러면서도 고민을 많이 했다. 선거를 치르기 위해서 집사람과 협의했다. 남원으로 학교를 옮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승진을 위하여 선택한 전주교대부설초등학교를 어렵게 들어갔고, 또 그곳에서 3년이라는 세월을 고생하면서 보냈는데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교감, 교장이 되기 위해서 겨우 옮겨갔는데 남원으로 온다는 것은 교감이나 교장으로 승진한다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흔쾌히 옮긴다고 했다. 자신의 영광을 포기하고 남편인 나를 위해서 포기하겠다고 했다. 집사람과 같은 사람이 어디에 또 있을까? 하늘이 나에게 배필로 정해 준 것은 큰 복이고 행운이었다.


남원으로 내신을 하여 2010년 3월 1일 자로 남원노암초등학교로 발령받아 둥지를 틀었다. 지금도 가끔 생각이 나면 승진이 아쉬운지 말하고는 한다. 그때마다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미안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마음을 정하고 난 뒤부터 겨울방학 때부터는 아예 남원으로 와서 같이 생활하면서 활동도 같이했다. 행사장에도 같이 가고 모임에도 같이 다녔다. 몸집은 작지만, 강단이 있었다. 마음을 굳히고 나니 더 열심이었다. 모임이 있는 곳이면 모두 찾아다녔다.




#3. 활동의 반경을 넓히다

순창까지 활동 범위를 넓히고 있었고, 임실에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지인들에게 부탁했고, 그들에게서 연락이 오면 새벽같이 쫓아가 관광버스에 올라 인사하면서 명함도 주었다. 순창은 내가 순창중학교에 6년 근무했고, 순창제일고등학교에 교장으로 6년째 근무하고 있었기에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인사할 수 있었다. 행사장에도 자연스럽게 참여했다. 순창제일고등학교의 동창회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임실은 나의 고향이고, 경주 김씨들이 유난히 다른 지역보다 많이 사는 지역이었다. 많은 사람이 이해를 해주고 도움을 주었다. 교육의원 선거구가 결정되지 않아서 주로 남원, 임실, 순창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남원, 임실, 순창, 정읍, 고창이면 내가 불리 한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남원, 임실, 순창을 합한 인구가 정읍, 고창을 합한 인구의 5분의 4에 불과했다. 그러나 도전해 보기로 했다. 전주교육대학교 출신이면서, 초·중·고등학교를 두루두루 거쳤기에 자신감을 가졌다. 미리 포기하고 도전하지 않으면 실패도 성공도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면서 동부 산악권으로 선거구가 확정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렇게 되기를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민주당의 지인들에게도 뜻을 전했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실망을 안겨 줄 뿐이었다.


고등학교 동기동창인 정세균 국회의원의 측근에게도 선거구가 동부산악권으로 되면 좋겠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정세균 국회의원님에게도 ‘교육의원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전주신흥고등학교 동기동창이기에 1996년 무주, 진안, 장수지역구에 처음으로 출사표를 던진 정세균 국회의원을 당선시키기 위해서 내가 동기동창회장이자 안성중학교에 근무하고 있었기에 나는 온갖 정열을 기울여 교사로서 공무원의 신분이었지만, 아는 듯 모르는 듯 선거운동을 열심히 하였다.


선거운동 기간에는 집에 새벽 3시 이전에는 잔적이 없었을 만큼 선거운동원을 태우고 시골 골짝 골짝을 헤매고 다녔다. 그러면서도 후보자에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박카스, 음료수뿐만 아니라, 선거운동원의 식사비도 가끔은 내가 내곤하였다. 신흥고등학교 출신의 국회의원이 한 명도 없었기에 더욱더 그랬다. 국회의원을 만들어 보고 싶은 욕망에서였다. 우리 동기동창들도 토요일, 일요일뿐만 아니라 시간이 있는 친구들이라면 발을 벗고 나섰다. 신흥고등학교 동문들도 모두가 나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뛰고 뛰면서 뭉쳤다.


정세균 대표의 완승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꼭 내가 된 것같이 기뻐했다. 동창들과 동문들도 모두가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그러한 인연 때문에 솔직 담백하게 리베라호텔 로비에서 의사 표현을 했다. 빨리 선거구를 결정해야 하는데 국회에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러나 ‘진인사대천명’이라고 그만둘 수는 없지 않은가? 원래 성격이 목표가 정해지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온몸으로 부딪히고 마는 성격이다. 결과는 나중의 일이다. 큰아들 희곤(지금은 승찬)이도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하지만, 퇴직하고 선거를 도우라고 했더니 곧바로 사표를 내고 선거사무실에 뛰어 들어왔다.


처음엔 홍보기획사에 홍보 팸플릿이며, 명함과 현수막까지도 기획사에 맡겨보았다. 그런데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들과 협의하면서 만들어 보라고 했다. 내 마음에 쏙 들었다. 기획사보다 훨씬 나았다. 홍보 팸플릿도 그랬고, 명함뿐만 아니라 현수막과 건물 외벽의 대형 플래카드도 선거기간 내내 선거 관련 홍보 자료들은 모두 아들 승찬이가 기획하고 제작했다. 승찬이는 우리나라 ‘대동여지도’의 김정호를 빗대어 나를 ‘교육의 대동여지도’ 김정호라는 문구를 만들어 선거기간 내내 홍보할 수 있도록 기획하기도 했다.


능력이 있는데 그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못 잡고 펼칠 수 있는 장이 마련되지 않았었다는 것을 그때에야 알았다. 가족 모두가 달려들어 선거운동을 준비하고 얼굴 알리기에 최선을 다했다.




#4. 본격적인 선거운동 시작

그러면서도 선거구의 확정이 마음에 걸렸다. 마침내 예비후보 등록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2월 중순쯤 선거구가 확정되었다는 매스컴에서 뉴스가 나왔다. 내가 바라던 무주, 진안, 장수, 남원, 임실, 순창이 제5선거구로 확정되었다. 원래 선구대로 했다면 동부산악권에는 교육의원이 탄생되리라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런데 전라북도의 면적 2분의 1에 해당하는 곳에 교육의원이 없다면 누가 동부산악권의 교육을 챙길 것인가를 십분 고려한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전라북도 국회의원인 김춘진 의원과 정세균 의원의 노력이 컸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부안, 고창 출신의 김춘진 의원과 무주, 진안, 장수 출신의 정세균 의원님께 고마웠다.


나에게 행운의 여신이 미소를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일단은 1차 관문을 넘었다. 이제부터는 모두가 나의 노력 여하에 달린 몫이고 해결해야 하는 문제였다. 활동의 폭을 넓혔다. 무주, 진안, 장수 쪽으로도 폭을 넓혀 갔다. 새벽같이 일어나 오라는 곳이면 쫓아갔다. 장수교회의 강 장로님을 소개받았다. 그분의 역할이 아주 컸었다.


이 자리를 빌려서 강 장로님께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빌어드린다. 그러는 중에 예비후보 등록도 마쳤다. 마음 놓고 정식 선거운동을 할 수 있었다. 선거사무실도 열었다. 선거운동 사무실 개소식도 했다. 수행하는 선거운동원도 뽑았다. 모두가 성실했다. 운전은 서부성 친구가 했다. 둘이 함께 열심히 쫓아다녔다.


물론 자식과 비슷한 나이지만 진실성을 가지고 있는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다. 상대 후보보다 더 열심히 해야 했다. 남원에서는 확실하게 열세인 것을 인정했다. 나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했을 뿐이었다. 고등학교부터는 전주에서 다녔고, 교사 생활도 남원에서 하지 않았으니 아는 사람이라고는 마을 사람과, 친구와 동창들뿐이었다. 상대 후보는 초등학교 동기동창이었다. 남원용성초등학교 51회 동창이었다.


하지만 선거는 일종의 마라톤 경주이고 승자와 패자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경기이므로 서로가 열심히 하자고 했다. 누구에게나 선출직에는 기회가 주어지는 것이니 각자 열심히 해보자고 했다. 그는 형이 민주당 고문이었고 남원에서 줄곧 생활했다. 더구나 성원고등학교에서 오랫동안 교직 생활을 했을 뿐만 아니라 교장으로 정년도 하였다.


상대 후보는 간접선거에서 교육위원으로 출마한 경험이 있으니, 돌로 바위치기였다. 남원에서만 그랬다. 하나 다른 지역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순창에서 12년을 근무했고, 임실이 고향이고, 무주 안성중학교에서 3년 반 근무했었다. 더구나 나의 사랑스러운 두 동생인 둘째 정섭이와 막내인 정율이가 무진장여객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니 다행이었다.


동생뿐만 아니라 제수씨들까지도 선거운동에 뛰어들어 이곳저곳을 열심히 누비고 다녔다. 시간은 빛보다 빠르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았다. 인지도를 높이는데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새벽 4시 일어나 찬물로 머리를 감고 5시 30분에 인력센터로 달려가 일하러 가시는 분들에게 커피를 빼주고 하면서 인사도 하고 명함도 주었다. 그러고는 관광버스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다음은 택시 승강장으로 달려가 인사를 나누곤 했다. 둘째 동생이 남원에서 택시 운전을 했기에 동생의 지인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침은 콩나물 국밥으로 먹었다. 각 입후보자의 보좌관들과 관계를 잘 형성해 갔다. 만약 민주당 경선에서 후보자님이 떨어지면 와서 도와주겠다고 했다.




#5. 입후보자 등록

물론 두 사람이었다. 등록 마감 후 기호 추첨이 있어서 오라고 했다. 선거관리사무소로 2시에 갔다. 등록 후에는 계속 나도 기호 2번을 뽑는다고 되뇌고 갔다. 나에게 최면을 걸었다. 그리고 연습도 해보았다. 가기 전에 아들이 기호를 뽑아보라고 해보았다. 세 번 모두 기호 2번을 뽑았다.


그 기운을 갖고 선거관리위원회로 갔다. 시장 후보부터 뽑았다. 그리고 교육의원의 기호 추첨이 이어졌다.


먼저 기호 추첨 순서부터 뽑았다. 번호는 탁구공에 새겨서 주머니 속에 넣어 있었다. 가위바위보로 순서를 정했다. 내가 이겼다. 먼저 뽑는 순서에서부터 기선을 제압했다. 1번을 뽑겠다고 되뇌면서 손을 집어넣었다. 망설이다가 끄집어냈다. 기호 뽑는 순서에서 1번을 뽑았다.


다음에는 정식 기호 추첨이었다. 2번을 뽑아야 했다. 이유는 민주당의 기호가 2번이기에 그랬다. 아직도 호남에서의 정서는 민주당의 정서였다. 일단 기호 2번을 뽑으면 유리할 것으로 생각하고, 또 마음속으로 빌고 빌었다.


손을 집어넣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쓸어 않으면서 번쩍 손을 들어보았다. 기호는 2번이었다. 야호! 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놀랐음은 물론이고 상대 후보의 기호를 뽑으러 나오신 분은 풀이 죽어 있었다. 두 번째 관문을 넘었다. 또다시 행운의 여신은 나에게 미소를 던져주었다.


이제는 마지막 관문인 6월 2일의 선거에서 당선되는 일이었다. 집사람은 하교 후에 남원 시내를 쓸다시피 명함을 돌리면서 인사를 하고 다녔다. 무조건적이었다. 지쳐서 쓰러질 지경에 이르기까지 혼자서 아니면 둘이 함께 하고 다녔다. 나보다 더하고 다녔다. 나는 주로 모임과 초청하는 데에 몰두하고 다녔다.      



    

#6. 선거운동의 꽃 ‘유세’ 시작

선거운동이 시작되었다. 연일 강행군이었다. 서부성과 둘이 함께 뛰고 또 뛰고 했다. 쓰러지더라도 길에서 쓰러지자고 했다. 오직 우리 둘은 유세와 행사 모임에만 몰두했다. 선거후보자 팸플릿과 명함을 각 시·군 마을 이장들한테만 보내는 데에도 힘이 들었다. 워낙 많은 숫자라 그랬다. 물론 선거관리위원회에서 보냈지만, 그 이전부터 준비를 철저히 해야 했다. 유세차량은 외사촌 형에게 부탁했다. 흡족하게 만들었다. 선거유세 차량을 많이 대여했던 노하우가 축적되어 있었기에 그랬다. 마이크와 스피커의 성능도 대단히 우수했다.


그뿐만 아니다. 아름답게 율동하는 아가씨도 서울에서 다섯 명이나 데리고 왔다. 로고송에 맞게 율동을 맞추어서 하도록 했는데 효과 만점이었다. 나의 복장은 아들 승찬이가 제안했다. 옛날의 후크가 달린 교복과 모자로 준비했고, 서부성은 교련복을 입고 유세차량에 몸을 실었다. 유세는 나 혼자 했다. 이곳저곳 장날을 찾아다녔다.


각 지역의 연락 사무소장과 선거사무실과 유기적인 연락 관계를 취해서 유세 일정이 잡히면 그대로 진행하려고 노력했다. 일단은 로고송과 율동팀이 분위기를 잡으면 나는 연단으로 올라가 유세를 시작했다. 10여 분 연설했다. 길어도 안 되고 짧아도 안 되었다. 청중은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몇 마디만 듣는다. 처음부터 목청을 높여서는 청중이 쉽게 질러버린다. 청중, 아니 유권자들의 입맛에 맞는 연설이어야 했다.


남원의 유세는 아침 출근 시간과 퇴근 시간에 했다. 물론 장날에도 공설시장과 남원 순창사거리에서 했다. 아가씨들의 아름다운 율동과 동요를 개사한 로고송이 어린이들의 시선을 끌었고, 어린아이들이 모이니 보니 어른들도 모였다.


하지만 여론보다는 조직에서 열세였으니 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국회의원까지도 중립이 아닌 상대 쪽에 뜻을 두고 있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 여러 루트를 통해서 중립을 요구했지만, 여러 가지의 인간관계가 있어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내 자신이 인정했다.


순창 장날 유세가 있으면 순창으로 갔다. 임실 장날과 겹쳤다. 순창으로 갔다가 임실로 갔다. 임실로 갔다가 순창으로 갔다. 아니 진안으로 갔다가 무주로 갔다. 장수에서 유세를 마치고 남원으로 왔다가 이곳저곳 다니면서 유세하다 보니 건강관리와 목소리 관리가 문제였다. 유세를 마치고 오면 사무실에서든지 아니면 집으로 가든지 몇 시가 되었든지 간에 바로 잠을 자버렸다. 그렇지 않으면 건강을 잃고 쓰러지면 죽도 밥도 아니라고 캠프에 있는 운동원들이 더 난리였다.


선거캠프는 존경하는 장상규 교장 선생님을 필두로 방국성, 박선준, 김정안, 김희곤(현재는 승찬), 김화순에게 맡기고 캠프는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알아서 하라고 했다.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그랬다. 금전적인 문제를 제외하고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예비선거 운동 기간에서부터 줄곧 상대 후보를 비하·비방하거나 허위사실을 절대 하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교육하고 당부했다. 사무실에서는 ‘서’자 한마디도 끄집어내지 말라고도 했다. 지금은 유권자들의 선거 의식이 높아졌기에 그러한 것은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을 모두가 인식했다.


비방이나 허위사실 유포에도 무대응, 무반응을 원칙으로 정했다. 반응하다 보면 서로 싸움을 하게 되고 다치는 쪽은 힘에 밀리는 것은 우리 쪽이라고 강조했다. 유세의 첫마디는 ‘대동여지도의 김정호’ ‘교육의원 후보 김정호’ ‘교복 입은 사나이 김정호’의 구호로 유세를 시작했다. 면 단위 앞에서는 5분 정도 유세를 간략하게 했다. 스피커의 성능이 좋아서 거의 500m 밖에서도 울림이 없이 퍼져나갔다. 마을 앞에서는 ‘교육의원 후보 김정호가 인사드립니다. 한 표를 부탁드립니다’는 등 간단하게 2~3분 정도하고 떠났다.


워낙 광역의 선거구여서 한곳에서 시간을 오래 보낼 수가 없었다. 선거사무실이나 유세하러 다니는 후보자인 나나 교육자의 본을 보이는 선거를 하자고 했다. 떨어져도 좋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돈을 쓰는 선거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


돈이 없을뿐더러 돈을 쓰는 순간에 선거는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꼭 필요한 경비 외에는 쓰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처음 해보는 선거인지라 필요 없는 돈이 많이도 유출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선거판이 깨질까봐 모른척하면서 지나간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교훈으로 받아들였다. 하루하루가 즐겁고 재미있는 선거운동이 되었다. 점차 여론도 호전되어 가고 있었다. 다른 지역은 우세했다. 그리고, 남원에서는 여전히 열세였다. 인정해야 했다. 그러면서 남원에서 70대30이면 박빙의 승부이고 60대40이면 내가 확실히 이긴다는 확신이었다.


남원의 유권자들에게 파고들면서 인지도를 높이는 것이 급선무였다. 점차 도와주겠다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었고, 시장 예비선거에서 탈락한 후보의 캠프에 있었던 사람들도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선거일 며칠을 앞두고 5월 29일 공설운동장에서의 마지막 유세에서는 고등학교 후배인 정인성 전북학원연합회 부회장에게 찬조 연설을 부탁하였다. 멋지게 소개와 찬조 연설을 했다. 다음은 내가 유권자인 남원시민들을 상대로 연설하는데 초등학교 동기동창이면서 상대 후보의 선거캠프에 있는 이모 동창이 나를 향해서 증거 수집 차 사진을 찍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 유세 중에 ‘친구가 저를 홍보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고 있네요. 친구야 고마워’라고 했더니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고 이모는 쏜살같이 사라져 버리는 웃지 못할 일도 있었지만, 유세는 계속했다.


로고송은 어르신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초등학교의 동요를 개사했으며 교복 입은 여자들의 율동은 유권자들의 시선을 집중시켰으며, 가장 많은 유권자가 항상 나의 유세차량 주위에는 모여들었다. 멋지고 감동이 넘치는 마지막 유세였다, 시장의 이곳저곳으로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악수도 하고 인사도 하였다.


아는 사람은 아는 대로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대로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악수하고 하였다. 오후에는 도통동 우체국 사거리에서 유세하고는 했다. 아침에도 도통동 사거리 아니면 남원시청 삼거리에서 유세를 하면서 한 표를 부탁했다.


순창에서는 장날마다 시장통에 있는 농협마트 앞에서 유세하였다. 순창에서의 김삼순 씨를 중심으로 하는 자원봉사자는 그야말로 열심이었다. 순창 전체를 두 번쯤 돌았다고 생각했다. 남원에 유세가 있으면 남원으로 지원을 나왔다.


임실에 가면 임실에도 지원을 나왔다. 그만큼 열심히 하였다. 그런데 순창은 군수 출마자, 교육감 출마자, 교육의원 출마자가 하나가 되어 움직인다는 소문이 들려와 무척 언짢았다. 그러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군수 출마자 사무실에 의사만 전달했다. 그런데도 계속이었다. 군수로 있을 때 그렇게도 많이 협력하고 도와주었건만,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고 무쌍한 일인 것을 절실하게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12년을 순창중학교와 순창제일고등학교에서 근무했으니, 나의 인지도가 상대 후보보다 높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임실은 나의 고향이다. 혈연을 중시하고 있는 곳이었다. 경주 김씨인 것을 믿고 열심히 선거운동을 하였고 동기동창의 정세균 국회의원의 선거구였다. 덕도 많이 보았다. 유세는 시장 입구에서 행하였고 도지사나 군수 출마자를 항상 앞에 하도록 배려했다.


스피커의 성능이 좋아 나의 로고송과 율동을 시작하면 내 쪽으로 시선이 집중되어 쉬게 하곤 했다. 그것이 상대를 배려하는 것이 아니었던가? 군수 출마자는 고등학교 후배여서 많이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었다. 유세 마지막 날 강완묵 군수 후보자의 딸이 유세하였다. 모든 청중의 심금을 울리는 유세였다. 눈물을 흘리는 시장 상인들, 장 보러 오신 어르신들이 눈물을 훔치는 것을 보고서 깜짝 놀랐다. 나도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가슴이 울컥했다. 아! 게임은 끝났다. 멋지고 심금을 울리는 연설로 강완묵 군수 후보는 당선되리라는 확신이 섰었다.


진안에서는 인삼 약재상이 몰려있는 삼거리에서 유세했다. 동생이 무주, 진안, 장수를 맡아서 했기에 안심이었다. 한번은 진안 부귀의 마을회관에 가서 인사를 하는데 마을회관의 여러 어르신께서 누구요? 하면서 시큰둥했다. 그런데 동생이 들어오면서 저의 큰형이라고 하니 모두가 환영해 주었다. 또 다른 마을에 갔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다음 마을도 그랬다.


역시 버스 기사로서 친절하게 어르신들을 모시고 다니면서 운전했다고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다음부터는 면 소재지를 제외하고는 다니지 않았다. 물론 막냇동생도 무진장여객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니,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제수씨도 모든 일 제쳐 놓고 아주 열심이었다. 제수씨 딸들도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다. 이 마을 저 마을 할 것 없이 동생을 중심으로 친구들과 자원봉사자들이 하나가 되어 움직였다.


무주로 가보겠다. 무주는 내가 안성중학교에서 3년 6개월을 근무했던 곳이었다. 안성을 중심으로 면 소재지는 모두 돌아다녔다. 무주의 연락소장과 자원봉사자들이 진실로 열심히 선거운동을 해주었다. 이진규 연락소장이 민주당 소속이었으므로 열심이었고, 자원봉사자들도 열심이었다. 시장 입구에서 유세하곤 했다. 장날이면 그곳에서 했다. 시장에서 장사하고 계시는 아저씨와 아주머니들도 인심이 후했다. 음료수도 주곤 했다. 나의 이름과 같은 아들이 있다는 어르신도 자기 일처럼 해주셨다. 누구신지는 몰라도 감사하는 마음을 전해본다.


그런데 연설하려고 하는데 상대 후보의 유세차량이 와서 스피커 소리를 높여서 유세하기가 어려웠다. 우리 쪽의 연락소장이 그쪽의 연락소장에게 말하였다. 그쪽 연락소장에게 스피커 소리를 줄여 달라고 했지만 듣지 않았고, 약간의 소란스러움이 그쪽에서 있었다. 결국에는 스피커 소리를 줄여서 무사히 연설을 마쳤다.


각각의 후보마다 상대 후보가 되든 그렇지 않든 연설을 시작하면 모든 행동을 멈춰주는 것이 예의였다. 장수는 장계의 삼거리에서부터 연설을 시작했다. 김삼량 자원봉사자와 다른 봉사자들이 열심히 활동을 해주었다. 시장도 많은 사람이 모여서 장날은 시장에서 하곤 했다. 예전과 같지 않아서 시골장은 오전에만 북적북적하고 오후에는 거의 사람들이 없다.


장계에서 잊지 못할 사람이 있다. 목이 말라 작은 슈퍼에 들어갔다. 몇몇 사람이 들어갔다. 시원한 음료수를 주었다. 돈도 받지를 않고 도리어 격려를 해주기도 한 장계사거리 코너의 슈퍼집 아주머니를 기억하고 있다.

장수에서도 잊지 못할 사람이 있다. 안성중학교에서 교장으로 모셨던 고 최갑술 교장 선생님을 빼놓을 수 없는 분이셨다. 정년퇴직하시고도 정정하시게 자원봉사자로 도와주셨고, 장수교회 강 장로님은 아무런 관계도 없으신데도 불구하고 행사는 다 챙겨주시는 분이었으며, 그 외에도 이름을 밝히기 어려운 분들이 이곳저곳 뛰어다니면서 열성적으로 활동하여 주셨다.


장계 백화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직하셨던 김기현 교장 선생님도 열심히 해주셨다. 시장에서 연설과 로터리에서 연설은 모두가 열심히 귀를 기울여 주셨고 지금도 시골의 잔잔한 인정이 흐르는 곳이 장수인 것 같았다. 실제로 따뜻하고 잔잔한 시골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정을 느끼기도 했다.


선거의 바로 전날은 모두가 기도했다. 6월 2일의 투표 전날이다. 기도뿐만 아니다. 승리의 제사도 사무실에서 올렸다. 항상 커다란 장독 뚜껑에다가 쌀을 가득 채우고 그 위에 촛불을 켜두고 있었다. 온갖 정성을 다 들였다. 투표의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투표 장소에는 가지를 못한다. 멀리서만 투표하는 모습만 지켜볼 뿐이었다. 투표 시간이 점점 끝나갈수록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있었다.


모두가 ‘진인사대천명’이라고 열심히 이곳저곳 뛰어다니고 한 표 한 표를 호소했기에 마음이 차분했다. 전 가족 모두가 뛰었다. 동생들은 물론이고 제수씨들까지도 움직이었다. 생각지도 않았지만, 모두가 하나가 되었다. 그랬으니 나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하였다. 결과만 기다릴 뿐이었다. 모두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무실에서 초조하게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13일간의 멋지고 재미나는 선거운동이었으며 유세였다.


서부성과 함께 열려있는 유세차량에서 교복과 교련복을 입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촌음을 다투면서 뛰었던 그 모습이 어느 입후보자들과 견줄 수가 있었겠는가? 점심은 발이 닿는 곳에서 먹고, 음식점 아주머니들의 훈훈한 인심도 느낄 수 있었다. 주로 장날은 시장 안에서 국수를 먹든지, 소머리국밥이나 순대국밥을 먹으면서 영양 보충을 하기도 했다.


“대동여지도의 김정호” “교복 입은 사나이 김정호” “교육의원 후보 김정호”를 외치면서 유세차량에 하루 종일 서 있다시피 한 선거운동은 강행군의 연속이었지만, 마냥 즐겁고 신명 나는 선거운동으로 ‘앞으로 선거에 또다시 출마한다면 또 그럴 것이다.’라고 머릿속에 장단점을 그려보고는 했다.




#7. 교육위원이 되다

선거가 끝나고 개표 시간을 기다리는데 초조했다. 각 개표소마다 연락소장들이 나가서 개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드디어 운명을 가르는 개표가 시작되었다. 몇십 표의 개표에 대한 결과가 사무실로 보고가 들어오는데 월등히 앞섰다.


처음부터 기선 제압이었다. 1천 표, 2천 표, 5천 표, 1만 표가 개표되면서 딱 한 번 뒤집기를 당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표 차이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었다. 12시가 조금 지나자, 방송국에서 인터뷰 요청하러 사무실로 왔다. 그러나 아직은 이르다고 하여 돌려보냈다.


새벽 2시쯤 확실하게 승부가 갈리자 KBS방송국에서 취재기자가 카메라 기자와 함께 왔다. 꽃다발도 준비해서 인터뷰에 응했다. “무·진·장·임·순·남 유권자들에게 머리 숙여 고맙다”라고 하면서 “그동안 교육의원이 없어서 소외되었던 동부산악권의 교육을 챙겨서 발전시켜 나가겠다”라고 인터뷰했다. 모두가 하나가 된 당선이었다.


교육의원이 되었다. 임실군 삼계면 후천리 뒷내에서 보릿고개와 초근목피로 살아가시던 우리 아버지 어머니, 자식 사랑이 남달랐던 우리 아버지 어머니, 하늘나라에서 소 고깃국에 흰 쌀밥으로 식사하고 계실 우리 아버지 어머니, 어깨가 공이가 박히도록 노동으로 처자식 굶기지 않으려고 노력하신 우리 아버지에게 이 모든 영광을 받치고 싶었다.


종갓집에 깔머슴을 하다가 겨우 가정을 꾸려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자식들이 각자의 길을 개척하여 먹고 살게 하려고 하면서 사셨던 아버지와 홀로 가슴 아파하며 살아오신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우리 집안에도 도의원이 나왔다고 서로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린 우리 동생들, 기뻐서 즐거워하는 제수들, 특히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밤낮으로 발이 부을 때까지 남원 시내를 돌아다니던 집사람, 아무리 멀어도 소개받으면 산골짜기까지 찾아갔던 집사람, 교직 생활을 접고 선거사무실을 지켜주었던 아들 승찬, “새우도 훑어야 고기다”라는 속담을 가슴에 새기면서 발로 뛰어준 선거운동원과 자원봉사자들께도 깊은 감사와 함께 머리 숙여 인사를 드렸다. 아니 큰절로 보답했다. 보이지 않게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셨던 분들께 하느님의 은총과 건강의 축복이 함께 하기를 두 손 모아 이 자리를 빌려서 감사를 드립니다.


이렇게 나의 꿈인 선생님은 교육의원을 끝으로 꿈은 이루어졌다. 하느님의 은총이고, 조상님들의 보살핌이고, 나의 아버지 어머니의 헌신적인 희생의 산물인 선생님의 꿈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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