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와 기독교
21.
어렸을 적 겁 많고 볼살은 빵실하던 꼬꼬마 시절. 잠자기 전에 TV에서 동자승을 보았다.
망태 할아범이나, 귀신 등 무서운 것 많던 꼬마는 그 동자승을 보며 무언의 두려움을 느꼈다. 마치 엄마의 손을 잡고 교회로 가던 나와 대척점에 서 있는 또래의 아이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기독교와 불교가 대척된다는 것이 크나 큰 오해였다는 사실을 안다. 불교에도 여러 종파가 나뉘겠지만 기본적으로 불교는 무엇을 섬긴다기보다 학문의 성질이 크기 때문이다.
얽메이지 않는 자유로움
우리는 세상을 나 자신이라는 관점을 통해 본다. 이 때문에 개인은 전체를 하나의 진실로써 볼 수 없다. 다만 부분적인 사실을 볼 뿐이다. 마치 맹인이 더듬는 코끼리의 비유 처럼 말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내 입장에선 맞는 사실이 상대방 입장에선 거짓처럼 보일 수 있고 그 반대 역시 통하게 된다. 누군가의 조언이 누군가에겐 독이 될 수 있다. 반대로 누군가의 실패가 내게는 타산지석이 될 수도 있다.
중도란 하나의 지식을 전체로 보지 않는 태도이다. 각각의 관점에서 그것이 어떻게 성립하는지 이해하고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 맞게 유리한 관점을 집는 태도가 필요하다.
제왕학
중도의 태도를 구체적으로 잘 설명한 것은 아무래도 제왕학일 것이다. 왕은 스스로가 최고로 똑똑할 필요가 없다. 대신 각각의 상황에 따라 신하들끼리 토론한 것중 가장 뛰어난 방법론을 선택하면 그만일 뿐이다.
전쟁에는 나보다 강한 장군을 내보내면 되고, 경제에 있어서는 상인들을 저울질 하고, 법에 대해선 학자들을 등용하면 된다. 왕에게 필요한 자세란 모든 것에 능하는 자세가 아니라, 모든 것으로부터 한 발 물러난 관찰자의 관점으로 상황에 가장 이로운 선택을 할 줄 아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의 부분적 진리를 담고 있다면 그것을 무시하거나 하나의 얽메여있지 않고 각각의 상황에 따라 사용하면 된다.
방법론과 사용자
중도란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을 전체로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하나의 진리로 여기며 물러나 각각의 나와 다른 진리를 가지고 있는 모든것을 관조하는 태도다.
전체를 하나로, 하나 하나들의 합을 전체로 보는 중도의 태도는 더 자유롭고 유익한 선택을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뛰어난 방법론이다. 그러나 모든 행위에는 목적이 따르는 법이다.
방법론은 도구다. 칼은 음식을 썰 수도 있고 남을 헤칠 수도 있다. 말은 협상을 가능케 하기도 하며 이간질 하기도 한다. 여기가 바로 방법과 목적이 대응되는 지점이다. 중도의 선택하는 태도로 당신은 여러가지 선택지를 고를 수 있다. 이득을 극대화 하는 선택지도 있을 것이도 이득을 조정하더라도 누군가를 이롭게 하는 선택지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중심이다. 여러 가지의 선택지 중 당신은 어떤 의도로 어느 선택지를 고를 것인가. 이 물음에서 불교와 기독교가 상호 보완될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