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와 돌봄을 읽고』
『장애와 돌봄을 읽고』는 장애 당사자와 장애인을 둔 가족들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돌봄’은 장애인에게만 해당하는 말일까. 돌봄은 노인과 아동을 포함해, 누구나 어떤 시기에는 돌봄의 대상이 되고 또 어떤 시기에는 돌봄의 주체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장애’를 떼어내도 충분히 성립하는, 사람이 사람을 돌보며 살아가는 이야기다.
구찌 더스트백 도난 사건, 고릴라 엄마가 된 사연, 방귀 사건까지. 키득거리며 읽다 보면 어느새 장애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이야기를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장애인복지 현장에서 일하며 한 가지를 깨달았다. 돌봄은 ‘주는 사람’의 판단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돌봄은 반드시 받는 사람과의 협의 위에서만 가능하다. 이 단순한 결론에 이르기까지 십수 년이 걸렸다. 그전까지 나는 ‘이런 서비스가 좋을 것 같다’는 막연한 판단으로 개별 재활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숟가락을 혼자 들게 하는 것, 기저귀를 떼고 화장실을 혼자 가게 하는 것, 버스를 타게 하는 것. 모두 당사자에게 ‘좋아 보이는’ 목표였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질문을 빠뜨리고 있었다. 당사자는 그것을 원하는가.
장애인이 재활서비스를 받는 일은 여전히 ‘하늘의 별 따기’다. 대기 기간은 길고 선택지는 제한적이다. 보호자가 재활을 간절히 바라는 이유다. 아이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혹은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받을 수 없을지도 몰라서. 이것은 부모의 욕심이라기보다, 장애인이 필요하고 원하는 서비스를 충분히 제공하지 못하는 국가의 책임에 가깝다. 이 모습은 비장애 아동을 키우는 현실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학입시를 이유로 아이들은 가기 싫은 학원에 다닌다. 나 역시 어릴 적 원치 않는 재활 훈련을 받았고, 지금은 부모로서 아이들에게 학원에 가게 하고, 한자 급수 시험과 각종 독서를 권한다. 때로는 강요에 가깝다.
어릴 적 나는 재활 훈련을 받으며 ‘이 훈련이 정말 내 손 떨림을 개선해 줄까?’ 의문을 가졌다. 결과적으로 큰 도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손 떨림을 완화하는 약물이 나에게는 더 효과적이었다. 희망보다는 좌절이 남았다.
아이들에게 공부를 시킬 때도 마찬가지다. "왜 이 공부를 해야 해?"라는 아이들의 질문에 매번 답해야 한다. 그런데 얼마 전, 아이가 교보문고에서 주최한 책갈피 독서 편지 공모전에서 은상을 받았다. 지정 도서를 읽고, 선택한 책은 세 번이나 스스로 읽었다. 그 과정에서 실랑이는 없었다. 즐거움의 밀도도, 결과를 받아들이는 태도도 달랐다. 아이의 자존감 역시 달랐다. 이 경험을 통해 다시 확인했다. 사람은 ‘시키는 일’이 아니라 ‘선택한 일’에서 성장한다는 것을. 물론 모든 선택을 당사자에게만 맡길 수는 없다. 자립과 안전을 위해 걷기 훈련이 필요하고, 근육이 굳기 전에 운동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장애인에게 재활이, 비장애 아동에게 기초 학습이 필요한 이유다. 그럼에도 우리는 묻고, 설명하고, 대화해야 한다.
‘좋은 돌봄’은 아이들의 오늘을 관리하는 일이 아니라
아이들의 오늘에 응답하는 일이다.∙
내가 생각하는 돌봄 자는 지시자가 아니라 파트너여야 한다. 그럴 때 변화는 더 빠르고, 돌봄자의 소진은 줄어든다. 무엇보다 당사자의 삶의 질이 달라진다. 결국 ‘좋은 돌봄’이란 당사자의 의지와 주체성이 존중받는 돌봄이 아닐까. 나는 그렇게 믿는다.
∙장희숙 『좋은 돌봄의 조건』 돌봄의 지도를 그리다, 민들레 vol. 158, 2025. 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