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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순심 Aug 05. 2020

인복 있는 여자

 





   대학 다니면서 ‘장애’ 때문에 좌절되는 순간이 많았다. 포기하고 싶을 때 나를 일으켜 세운 이들이 있었다. 동아리 사람들과 과동기인 태연이었다. 그들이 지금 저를 있게 만들었다.      

 

태연이와 나는 장애인 응시생으로 따로 배정받은 시험장에서 만났다. 그 당시 그 친구와 인연이 오래 이어지리라 생각 못했다. 우리는 대학교 면접에서 다시 만났고. 서로 신기하게 생각했다.        


 오리엔테이션이 있는 날, 긴장한 채로 강의실에 들어갔다. 강의실 문을 연 순간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그 친구를 본 순간 ‘아, 대학 생활이 외롭지 않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장애가 있어서 나와 같은 장애인을 보면 꼭 나를 보는 느낌이어서 불편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친구에게는 그런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친구는 시각장애 5급이었고, 나는 뇌병변 5급 장애인이었다. 경증장애인인 우리는 서로의 장애를 보완해 주었다. 예를 들어 식당에 가면 나는 그 친구의 눈이 되어서 메뉴판을 읽었고 그 친구는 제 팔이 되어 식판을 들어주었다. 각각의 로봇이 합체하면 힘이 강해지는 ‘변신 로봇’ 이 되는 것 같았다. 그 친구는 ‘피해의식’이 없었다.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고 오픈하는 멋있는 친구였다.    


 태연이는 ‘변신 로봇’이었다면 동아리 사람들은 세상을 향해 날 수 있도록 ‘날개’가 되어 주었다. 내가 다니는 대학교는 장애인이 대학 생활에서 어려움이 없도록 도와주는 ‘장애인 도우미 제도’가 있었다. 입학 당시 나는 도우미 친구를 구하지 못하여 난감한 상황이었다. 한 선배의 소개로 한 은경이 언니를 만났다. 언니는 나보다 한 학년이 높았다. 늘 앞서 걱정하는 버릇이 있는 저에게 ‘그냥 하면 되지.’하면서 항상 용기를 준 언니였다. 무언가를 실수하여 자책하면 ‘괜찮아, 다시 하면 돼.’라며 용기를 주었다. 나는 ‘장애로 인해 실패작’이라고 생각하면 은경 언니는 ‘순심아! 너는 최고의 걸작품이야.’라며 다독여 주었다.    


 은경 언니는 나의 대학 생활을 이야기할 때 빼놓고 이야기를 할 수가 없다. 간혹 언니가 시험 치거나 아르바이트 등으로 나와 시간이 맞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럴 경우는 동아리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도와주었다. 공부하는 시간을 쪼개 가며 시험 대필자로 들어왔으며 리포트 타이핑 치는 것을 도와주었다. 자신의 시간을 내어준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대학 생활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건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움 필요할 때 도와주었지만, 단 한 번도 보상을 바라지 않았다. 그들은 저를 ‘장애인’으로 도와준 것이 아니라 ‘친구’로서 도와주었다.    


  대학을 다니면서 많은 것을 얻었다. 그중에 가장 크게 얻은 건 ‘사람’이다. 사람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남을 돕고자 하는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지금도 도움을 요청하면 큰 거부감 없이 도와준다. 이때 도움받는 장애인의 자세가 중요하다. 도움받을 때 ‘내가 장애인이라서 불쌍하게 보는 건 아닌가?’라는 피해의식은 버려야 한다. 비장애인은 장애인에게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 장애인 역시 비장애인에게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다른 장애인 도우미 하던 학생의 고충을 들은 적이 있다. 그 학생은 자신이 도우미 역할을 최선을 다했다. 자신의 모든 스케줄을 장애인에게 맞추었다. 하지만 도움받는 장애인은 도우미 학생을 고용한 사람처럼 대하였다. 약속 30분 전에 일방적으로 취소하거나 강의 내용을 애써 요약해가면 장애인은 ‘이런 거 필요 없다.’며 도우미 학생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도우미를 지원한 학생은 처음에는 장애인을 돕고자 하는 선한 마음으로 출발했다. 한 명의 장애인을 만남으로 도우미 학생은 장애인을 전체적으로 ‘이상한 사람’으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였다. 장애인 전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건 잘못되었다. 이 경우에 근본적인 원인은 장애인에게 있었다. 당사자는 도움받는 것에 ‘피해의식’이 있거나 ‘장애인이라 배려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라고 착각하였다. ‘배려’라는 것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지하철에 임산부를 위한 임산부 지정석은 ‘배려’ 차원이다. 그 자리에 누군가는 자리를 비워두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앉을 수 있다. 그 자리에 누군가가 앉는다고 해서 비난하지 못한다. ‘배려’를 당연한 권리로 착각하면 안 된다. ‘배려’는 상대방의 선택 사항이다. 그것을 강요하거나 내 권리인 양 이용해서도 안 된다.    

 예전에는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는 것에 대해 서운했다. 그 마음은 욕심이었다. 지금은 도와주면 나에게 마음 써 주는 것에 감사하다. 설령 도와주지 않더라도 그건 상대방의 마음이다. 그 마음을 강요할 수는 없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사이는 갑을 관계가 아니다. 같은 위치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우리는 혼자서 살 수 없다. 그러므로 상대방 마음을 내 뜻대로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 상대방이 나를 이해해주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다. 상대방 마음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다.


                                                  출처:택용이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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