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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에 Nov 01. 2020

미국에 가면 유토피아가 있을까?

Seattle

 2020년의 나는 몇 년 전의 한국을 회상해본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과 시선에서. 신입생의 티를 갓 벗어난 후에야 나의 과거를 돌아볼 수 있는, 아니 돌아봐야만 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그래서 그 시기에는 고등학교 때의 나를 참 많이 추억했다. 주어진 것을 하기만 하면 됐던 시기, 그리고 그것을 잘해내던 시기의 나.


 수능을 마치고 다시 학교를 찾은 나는 나를 예뻐해 주시던 영어 선생님을 교무실에서 마주치게 되었다. "선생님, 저 00대 붙었어요."라고 웃으며 말하자 나에게 선생님은 조금 뜸을 들이시더니 활짝 웃으시며 말했다. "그래. 네가 행복한 거 맞지?"


 그때의 나는  목숨을 걸만큼 연극영화과에 가는 것이 오롯한 목표였고, 친구들이 외우고 다니는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 등등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염원하던 과에 합격을 하고선,3년이란 고등학교 생활을 지나 그것을 실제 이뤄낸 것(겨우겨우 턱걸이로)에 대해 사람들이 기뻐해 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졸업하고 이력서를 몇 번 돌려본 지금에서야 내가 들어간 학교는 나의 성적에 비하면 낮은 곳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또 예대를 간다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를 현실로서 깨닫는다.


내 삶에서 가장 올곧고 열심이었던 시기에 내가 머물던 나의 마음의 고향, 나의 집, 나의 학교.

 신입생이 된 후 겪게 된 과 생활은 끔찍했다. 객관적으로 정말 별로였다. 모든 것을 제쳐두고 들어온 예대는 이런 곳인가?  보상심리가 고개를 들었다. 성적도 다 버리고 꿈을 찾아 온 곳인데. 예쁘고 잘난 사람들 사이에서 내가 마치 투명인간 처럼 느껴지는 경험들과 군대식 문화부터 소수과 이기에 벌어지는 온갖 가십들, 그리고 실체 없는 예술 교육과 불합리한 대학의 민낯은 20살의 내가 경험하기에는 뜨거운 불덩어리 같은 것이었다. 가까이만 가도 얼굴이 달궈져 몸이 익는 것 같지만 겨우겨우 숨은 쉴 수 있는 그런.


 1년을 보내고 나니 우리 사이에 흉흉한 소문으로 돌던 과의 통폐합은 실제로 일어났다. 온갖 유명한 연예인들을 동원해 우리 과를 학교 홍보에 사용할 땐 언제고 우리는 어느새 비싼 등록금을 내면서도 학교의 취업률을 깎아먹는 그런 한심한 사람들이 되어있었다.


 말도 안 되게 비합리적인 '우리 돈을 들여 단편 영화를 만든다.'는 과정은 오롯이 학생들의 열정과 조금의 순수함, 뭔가를 만들고 싶은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창작욕에 비롯한 것이었다. 하지만 학교와 정부는 우리에게 "그래, 지금은 그렇겠지. 근데 졸업하면 뭐할 건데? 돈은 벌어먹겠니?"하고 빙긋 웃으며  말하는 것 같았다.


이런 말이라도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때는 아마 다정하다고 느꼈을 정도로 박했고 방치당했던 시기였다.

 나에겐 떠올리기만 해도 진지한. 가슴이 아프면서도 가슴이 두근대는 어떤 과정이 그들에겐 손으로 휘휘 몇 번 젓고 나면 사라져 버리는 그런 것이라는 것이 상처였다. 그 후로 무언가를 표현하고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아등바등하는 것이 창피했다. 꽤나 오랜 시간 동안 무엇에 진심을 다하는 것이 겉으로 티가 나는 것이 두려웠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비웃는 시선이 항상 존재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모든 것에 관심 없는 척하려고 부단히 애썼다. 우리보다 먼저 이런 부당한 처우를 받은 예술대학은 이미 많았고 나는 이 나라에서 예술을 공부하는 것이 문제일까? 이 사회가 문제일까 라는 생각을 하며 한창 유행했던 '헬조선'이라는 단어에 편승해 나란 존재를 처음으로 사회 속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외국에 사는 사촌들이 많았던 나는 어려서부터 영어를 쓰는 사람들을 만나는 일과 그들의 생활방식에 비교적 익숙했다. 우리 집도 오래된 주택이기에 전형적인 한국의 가정 구조보다 외국식에 가까웠다. 생각보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이런 자잘한 요소들이 쌓여 나는 서양문화를 좋아하고 익숙해하는 사람으로 자랐다.


 초등학교 때부터 왜인지 나는 외국에서 살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다. 다들 죽는소리를 내며 하는 영어 공부도결국 언젠간 실제로 쓸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조금은 덜 죽는 소리를 내며 공부했다. 그런 나의 막연한 생각들이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나에게 떠나라고 부추긴 것은 아마도 성인이 된 이후 특별히 자주 마주해야 했던 꼰대 같은 사회와 통폐합을 겪고 나서였을 것이다.


미국에 도착해 처음으로 찍은 사진, 다운타운의 나무조차 미국답게 엄청 컸다. 외국인이라 느낄 수 있는 차이.

 미국 교환학생은 생각보다 많은 준비와 무엇보다 많은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한 달 정도만 다녀올 수 있는 프로그램을 신청해 포틀랜드로 떠나기로 했다. 미국이라는 한국에 비하면 엄청 엄청 넓은 나라에 가보면 지금 이 나라에서 예술을 하는 것보다 조금 더, 아주 조금이라도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수 있는 곳이 있지 않을까?


 더 큰 나라는 어떨까. 더 넓은 나라는 어떨까. 나 하나 쉴 곳, 아니 서있을 곳 정도는 있지 않을까? 그걸 알고 싶어서 미국행을 택했다.


사실 지금 또 하라면 약간 아찔한 혈혈단신 미국 여행. 사람들의 펄럭이는 옷소매와 찰칵거리는 셔터 소리, 영어로 들려오는 대화 소리들. 나의 첫 미국 일정.

 생각과 너무 똑같아서 행복하고, 생각과는 너무 달라서 덤덤해지기도 했던 1달간의 미국 여행은 내가 졸업을 하고도 나를 사로잡아 미국으로 가겠다는 두 번째 결심을 하게 만든다. 그만큼 짧지만 강렬했던 미국 여행기는 꽤나 길어서 몇 편으로 나눠질 것이다. 이상하게 미국에서의 세세한 기억과 감정들은 사람들에게 잘 꺼내지 않는다. 꽁꽁 숨겨뒀던 기억을 열면 마주할 것이 확실한 그리움과 공기들이 두렵기 때문이다.


 몇 달 전 꾸역꾸역 나의 사진 아카이브에 들어가 찾은 미국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면서 생각했다. '아, 역시 사랑하는 것을 해야 해.' 그때의 나를 되찾고 싶었다. 시간이 나의 편이어서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것이 두렵지 않고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는 것이 두렵지 않았던 약간은 무식하고 용감한 나를.


 사진들을 찬찬히 둘러보고 그때의 순간을 글로 쓰면서 다시 살아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나는 많은 것에 굴복했다. 편하기 위해서. 원하는 것이 괴롭기때문에, 시간이 없기때문에.' 처음으로 도착해 혼자 크루즈를 타러 갔던 시애틀의 바다를 찍은 사진을 포스터로 만들어 내 방에 걸어두었다. 그때의 나를 잊지 말자고, 되찾아오자고.


지나가는 비행기가 마치 별똥별처럼 찍힌 사진. 다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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