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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에 Nov 11. 2020

Tebby & Julliet

드디어 도착한 포틀랜드

 미국에선 홈스테이를 하게 됐다. 한국에서 요구사항을 미리 적어 제출하면 거기에 맞춰 가족들을 배정해주는 식이었다. 나에겐   가지 요구사항이 있었다. 첫째, 고양이를 키우지 않는 집일 . 둘째, 조용한 곳일 .


1학년 때였다. 고양이  마리를 키우는 선배의 집에서 촬영을 했는데 목이 계속 아프더니 촬영을 마치고 다음날 바로 병원에 가서 링거를 맞았다. 목구멍의 앞과 뒤가 맞닿는 느낌을 처음 알게 되었다. 피로가 쌓여서  심했겠지만  달밖에, 또는  달이나 머무를 미국에서 아프면 여러모로  일이었다.


  번째 요구사항은  나의 만성적인 불면증 때문이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를 초등학생 3명이 있는 집에 배정해 주었고 동생이 없는 나는 ' 애들 귀엽지.’ 라는 순진한 생각으로 태비와 줄리엣의 집에 도착했다. 막내인 내대니얼이 엄마 줄리엣과 함께 나를 마중 나왔고 금발의 귀여운 꼬마한테 벌써 마음이 뺏겨 기분이 온통 들떴다. 나는 그들이 생활하는 공간  지하 가라지  세탁실이 있는 곳의 방을 쓰게 되었다.


 문제는 무엇이었냐면  방에 해가  드는 것은 그렇다 쳐도  다섯 식구가 (그러니까 초딩 3명이 있는) 움직일 때마다 모든 발자국 소리가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정말 한시도 빠짐없이 아이들이 뛰는 소리와 삐걱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니 미쳐버릴  같은 노릇이었다. 잠은커녕 다락방의 신데렐라가   같은 기분을 지울  없었다. 가끔은 가라지 옆이라 그런지 벌이 새벽에 들어와서  방안을 누비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켜켜이 숲이던 포틀랜드

 

포틀랜드는 자연이 우거진 곳이어서 밥을 먹고 산책을 가는 곳이 광고에나 나올 법한 숲이거나 (실제로 이곳은 트와일라잇의 촬영지이다) 길게 이어지는 강이었다. 주말엔  가족이 카약을 싣고 강으로 놀러 가거나 캠핑을 가는 것이 일상인 곳이었다. 나는  집의 가장이자 줄리엣의 남편인 태비가 정말 싫었다. 줄리엣은 나에게 캠핑을 같이 가자고 하거나 카약을 타고 같이 놀러 가자고 말하곤 했다.


 홈스테이 호스트들도 일종의 평가를 받고 보조금을 받기 때문에 학교 측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면 다음 호스트 패밀리에서 제외되고 돈을 벌지 못하게 되는 그런 속사정이 있는  같았다. 물론 줄리엣은 친절한 사람이었지만 나에게 이런저런 활동을 권유하는 것은 조금의 의무가 포함되어 있는 행동이었다.


 아무튼 내가 그녀의 제안에 좋다고 대답하자마자 태비는 항상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리는 그만큼의 공간이 없는데? 우리에겐 구명조끼가 충분하지 않아라며  말을 끊었다. 은근한 냉대와 무시가 그에겐 항상 있는 듯했다. 반면 줄리엣은  집에서 나를 담당하는 느낌이었다. 적재적소에 학교 프로그램을 살피고 필요한  가져다주거나 이것저것 같이 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태비 덕에  번도 해본 적은 없지만).


 하지만 그녀는 초등학생 세명의 엄마라서 매일 하루가 정신없이 돌아갔고  집에서 밥을 같이 먹으려면 그녀를 돕거나 설거지를 하지 않으면  됐다. 결국 나는 여기에 그녀의 집안일을 도우려고 이곳에 왔나 싶을 정도로 가사가 나의 하루 일과에서 빠질  없는 것이 되었다.

밥 먹고 길을 걷다가 강에 들어가서 수영하는 것이 당연한 삶이라는 것에 기분이 이상했다. 아이들이 있어서 더 그랬는지 나의 어린시절에 대해 돌이켜보게 됐다.

 그리고 그들은 매일 차로 10 거리인 학교까지 나를 태워서 데려다주겠다고 서류에 적어뒀는데, 어째서인지 15 남짓의 거리를 나더러 걸어가라고 이야기했다. 가끔 너무 더워서 오기 힘들면 말하라고 언제든지 태워주겠다며. 마치 대단한 선의를 베풀듯이. 걷는 것이 뭐가 그렇게  문제냐고 묻는다면 


 첫째, 미국엔 대도시나 다운타운이 아닌 이상 도로를 걸어 다니는 사람보다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 차가 다니는  옆을 걷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길도  되어있지 않아서 나는 갓길로 걸어 다니며 로드킬 당한 포섬을 매일같이 만나야 했다.


 둘째, 포틀랜드는 백인 비율이 높기로 유명한 도시이다. 다시 말해 인종의 다양성이 부족하다. 거기서 아무도 걸어 다니지 않는 거리를 혼자 걷고 있는 아시안 여자를 발견하는 것은 정말이지 흔치 않은 풍경이다. 그렇기에 아무도 없는 차가다니는 도로에서 눈에 띄는 나를 의식하며 길을 걷기란 나에겐 공포스러운 것이었다.

 

한번 백인 할아버지에게 길을 어떻게 건너냐고 묻자 세상 놀라며 나에게 니하오라고 경의에  인사를 건네길래, 중국인이 아니라고 이야기하자 합장을 하며 곤니찌와로 인사를 하더라. "Please, Don't"라고 이야기하자 "와우. 나는 너의 영어에 감탄했어 악센트가 하나도 없구나? 어디서 왔니?" 라고 눈을 반짝이던 그가 생생하다. 내가 정색하고 길을 묻자 친절하게 길을 알려준 그는 악의가 전혀 없이 정말로 순수하게 아시안 여자애가 영어로 말한다는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하는  같았다.


 나도 그리 기분나쁘진 않았다. 물론 다운타운에 내려가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있기에 전설의 유니콘 같은 그런 취급은  받지 않는다. (스킨헤드 무리를 만나 그들이 나에게 끈질기게 헬로우를 외쳤지만 미국에선 눈만  깔면 대화를 피할  있다) 내가 사는 지역은 다운타운과는 거리가 멀었고 젊은 사람들을  마주칠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경험을 했던  같다. 미국에 가서 아무도 걷지 않는 길을 걸어 다니면서 처음으로 나를 인종과 성별에 빗대어 인식하게 되었다.

벌이 나와서 잠을 못 자던 밤에 찍은 사진. 흔들린 것이 웃기다 나의 심정을 대변해주는 것 같아.

 더불어 며칠이 지나고 나서 알게 되었는데 테비와 줄리엣은 몰몬교의 독실한 신자들이었다. 도착한 첫날 교회에서 바비큐 파티가 있다며 나를 데려갔었는데, 그곳에서 우리가 한국에서 쉽게   있는 명찰을  미국인들을 만났다.  글을 쓰는 동안에도 조금 어이가 없어서 이게 기억의 왜곡인가 싶은데 그들과 함께 영화전공 관련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던 것이 기억나는 것을 보면 거짓 기억은 확실히 아니다. 조금 어리둥절했던 나는 결국   앞에 걸려있는 종교화를(가톨릭과 개신교 학교에 모두 다녔지만   번도   없는 종류의 것들이었다) 발견하고 나서 확신을 가졌다.


 물론 그들은 나에게 그들의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기에 그들이 이름표를  몰몬교들이 있는 교회에 다니는 것이나 걸어다니며 보는 로드킬이며 하는 것들은 모두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처음에 말한 소음이 정말 어마어마한 것이어서  번이고 줄리엣에게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고 대화를 해봤지만 근본적인 소음은 해결할  없는 것이기에 나는 학교 측에 따져서 결국 집을 바꾸기로 마음먹는다.

"Erick, Please don't think that I'm too picky. It's too much for me."

 삐걱대는 소리를 들으며 누워서 메모장에 한가득 영어로 이것저것을 적었고 나는  메모장을 들고 에릭을 만나러 간다. 에릭은 홈스테이 담당자였는데 집을 바꿔달라는  말에 조금의 실랑이가 오고 갔지만 그는 나에게 재봉사 일을 하고 있는 90 가까운 할머니의 집으로 홈스테이를 바꿔주겠다고 이야기했다. 90  되어 가는 할머니..?


 그런데   할머니의 집만 남아있는 것이냐고 물어보자 그는 마침 며칠 전에야 그녀의  방이 비게 되었고 내가 요구하는 타이밍에  집이 남아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나는 로레타 할머니와 살겠다고 이야기했고, 주말에 집을 바꾸러 에릭이 직접 나를 방문하겠다고 이야기하고 태비와 줄리엣 집에서의 사건들은 일단락되었다.

여전히 사랑하는 풍경. 가질 수 없는 일상과 유년시절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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