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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사에 Nov 15. 2020

로레타 할머니의 집

"You're in good hands."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줄리엣 가족이 모두 캠핑을 떠난 토요일에 나는 혼자 집에 남아 에릭을 기다렸다. 헤어짐은 전혀 아쉽지 않았다.  집에서의 짧은 시간은 나를 굉장히 불편하고 외롭게 만들었다.


잠깐이라도 어디에 나갈 때면 차에 타야 했는데 어린 아이들이 셋이나 있는 집에  커버린 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항상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물론 아이들과  부부와  지낼 수도 있었지만 그들이 만든 가족이란 울타리 안에 절대 들어갈  없다는 당연한 사실이 나에게 계속해서 그들로부터 배척당하는 느낌을 주었다.

매일 걸어야 했던 길, 볼 때마다 위로가 되었던 풍경 이제 안녕.

 오후가 지나갈 때쯤 에릭은 약속한 시간에 차를 끌고 나타났다. 아무도 없어 조용한 줄리엣과 태비의 집의 문을 잠그고 떠났다. 사실 에릭과 홈스테이를 바꿔달라는 담판을 짓고  ,  둘이 그의 차를 타고 집을 이동하려는 생각을 하니 굉장히 불편했다. 하지만 그는 나의 가방을 친히 들어주며 차에  후에도 이것저것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도착하게  로레타의 집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는 조부모님과 함께 자랐기 때문에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것이 익숙하고 좋다고 이야기했다.


 에릭도 할머니와 함께 자랐다며 할머니 할아버지 사랑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알고 보니 에릭의 어머니는    아프시다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그의 어머니를 많이 돌봐주신 분이 로레타 할머니였다고도 전해주었다. 가슴 아픈 이야기를 담담하게 나에게 전해주는 그에게서 미국에 도착해 처음으로 사람으로 부터 유대감을 느꼈다.


  그의 나눔이 고마우면서도 서울 집에 계실 할머니를 생각하니 괜히 눈물이 나서 훌쩍거리며 로레타 할머니의 집에 도착했다. 로레타의 집에 도착하자 그녀의 손님도 마침  집을 떠나는 중이었다. 현관 앞에서 마주친 손님은 내가 새로 이곳에 머물게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You're in good hands."라며 인사를 건넸다.

 

나의 방으로 올라가던 계단. 그녀에게 굿모닝 굿나잇 인사를 하면서 오르락내리락거리던 그때가 존재하긴 했었는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져서 가슴이 아프다.

 지금이 되어서야 꺼내보는 이 집에서의 많은 사진들을 보면서 어떤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아 몇 번을 멈춰 선다. 그래서 처음 미국에 오게 된 이유로 돌아가 보고자 한다.

https://brunch.co.kr/@sa00ehkim/22 - 과의 통폐합을 겪고 미국에 오게 된 이유가 궁금하다면 이곳으로.

 그래서 나는 유토피아를 찾았냐고? 아니, 그것을 찾는 것을 잊어버렸다. 학교 입학  여름방학엔 다음 영화를 찍을 돈을 모으기 위해 카페에서 알바를 하거나, 짧은 여행을 다니며 생각을 정리하고 시나리오를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다였던 나에게 영화와 조금 멀어진 시간은 20대가  후로 처음 갖는 것이었다.  정도로 영화에 미쳐있었냐고 묻는다면 사실 아닌데, 아닌 것도 아닌 그런 상태지였겠지 .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아도  일에 힘들어하고 그렇게까지 예민하게 굴지 않아도  일들에 화들짝 화를 내곤 하던 고군분투하던 시절.


 미국에서  달을 보내다 보니, 월마트에 들어가 복도마다 탐방하며 내일 먹을 팬케이크 가루를 고르고 다양한 종류의 요거트를 구경하고 샴푸 향기를 맡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었다. 굳이 들여다보지 않는 문제들을 파헤지고  명확한 하나의 답이 정해지지 않은 것들을 나만의 결론들로 만들고자, 그것에 공감을 얻고자 노력하는 과정들보다 그런 것들이 훨씬 재미있었다.


 조금만 다른 생각을 해도  흐트러져버리는 생각들을 하나의 실로 꿰고자 예민하게 머리를 핑핑 돌리며 잠에 드는 것이 아닌, 내일 먹을 샌드위치의  재료를 생각하며 잠에 드는 것이 하루의 마무리가 되는 것이 낯설었다. 마음 쓰고 가슴 아파하고, 열심히 하고. 그런 것들이 나에게 세상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이 한없이 부질없이 느껴지는 한국에서의 삶이 피곤했다. 그런 피곤한 나와 조금 멀어지고 나니 만약  시간이 계속된다면 나는 그저 멀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멀어지면 멀어지는 것이라고. 그렇게 충격적으로 쉽게 이야기할  있었다.


 적응하기 힘들던 학교를 그만두고, 이곳에서 로레타 할머니의 집에서 대학을 마치고.  돈을 벌며 이것저것 사들이고 사람들을 만나며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렇다면 여기서 영화를 계속할까? 미술 대학을 가볼까? 여기는 공대가 유명하다던데 그곳에 가볼까 아니다. 경찰이 될까.


 로레타 할머니 말을 들어보니 한국분인데 병원에서 통역을 하면서 일한다는 분이 있던데, 나도 통역이나 간호 공부를 해볼까. 아니다 여기에 살려면 돈이 되는 전공을 먼저 찾아야지. 그레이 아나토미에  빠져서  가운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보면 사실 나는 의사가 되는  맞는 걸지도 몰라. '돈이 되는 전공을 해야지. 공대에 갈까? 의사나 간호사가 될까?' 이런 생각은 내가 떠올렸다고 하기엔 정말 낯선 것이었다.

원래는 로레타 할머니와 그의 남편 밥이 쓰던 방을 나에게 내주었다. 한 달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언제나 집에 돌아왔다고 느낄 수 있었던 소중한 나의 공간.

 1학년이 끝나고 전과가 가능해지자 나는 학교의 모든 단과 대학들을 뒤지면서 전과할 과를 찾았다. 하지만 공부하고 싶은 것이 아무것도 없어서  번의 시도 끝에도  포기하고 말았다. 그런 내가 살아가기 위해 확실한 것은 무엇이든 하겠다고 자연스럽게 생각을 바꾸고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있을  같다는 생각에 설레는 기분이 드는 것은 지금의 내가 봐도 신기한 감정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마음의 집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다.


걸터앉아 과제를 하기도 하고 생각에 빠지기도, 가족과 친구들과 통화를 하기도 했던 곳

 이런저런 생각에 지쳐 집에 돌아오면 항상 로레타 할머니가 있었다. 그리고 나보다 며칠 뒤에 도착한 일본에서  고등학생 아카리라는 룸메이트도 우리와 2주간 함께 지냈다. 셋이서 아침밥을 같이 만들고 저녁 설거지를 하며 아카리와 나는 내일 싸갈 런치박스를 만들고 주말엔 쇼핑을 하러 셋이 차를 타고 나가 샌드위치나 피자를  오기도 했다. 매주 수요일엔 공원에 가서 음악을 듣고 매주 토요일 할머니의 집에 모이는 식구들과의 저녁식사를 함께하며 더없이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그것이 나에게 뭐가 그렇게 특별했냐면 집에 돌아가면 언제나 마음 편하게 이야기할 로레타 할머니가 있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우리 집은 오래된 주택이다. 거실이랄 것이 없고 복도식에 가깝기 때문에 함께 모여있을 공간이 없다. 엄마 아빠는 어릴 때부터 맞벌이를 했고, 언니 오빠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나는 그들이 학생일 때는 유치원생이었고 언니 오빠가 어른이 되었을 , 공부하기에 바쁜 학생이었다. 마침내 나마저도 20살이 넘자 그나마 우리의 사이클이 맞춰지는  싶었다. 하지만 모두 각자 삶의 패턴이 달라 밥도 같이 먹기 힘들었다. 집에 들어가면  마디 하고  방에 들어가 쉬다가 나갈 때가 되면 나가고 나름 잡음없는 평범한 생활이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 일상을 공유하고  "How was your day?"라고 묻는 삶이 나에게 그렇게  위로가  것을 보면 서울에서의 삶은 평범하게 외로운 생활이었다.


 돌아가기만 하면 안정을 찾을  있는 곳을 집이라고 부르는구나.  집을 나는 꽤나 시간이 지나서 미국에서 찾았구나. 이래서 결혼이란 것을 하나. 그래서 울타리를 만드는 거구나.

90이 다 되어가던 로레타 할머니는 작년에 이 곳에서 친구와 함께 음악에 맞춰 춤을 줬던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며 나와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사랑스러운 그녀

 줄리엣과 태비의 집에서 느꼈던  끊임없는 자기 의심이 비로소  집에 도착하니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너무 애처럼 생각하는 걸까?' '내가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것일까?' '내가 너무 한국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들에 '네가 느꼈던 것들 모두 당연한 것들이야.'라고 말해주는  같았다. 할머니인 로레타의 지인들은 나이가 있었다. 그래서 집에   파이를 구워서 오기도 하고 곧잘 나를 Darling이나 Sweet heart라고 부르기도 했다.


 가끔 건네던 What's up Kido?라는 말에 배시시 웃기도 했다. 그런 호칭들이 별것 아니고 항상 좋은 맥락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들의 따땃한 눈동자가 생각나서 아직도 그때를 떠올리며 감동받곤 한다. 재봉사인 할머니의 집에 웹페이지나 명함을 보고 옷을 찾아오던 손님들, 나와 키가 비슷한 고객의 옷의 완성도를 보기 위해 할머니를 위해 모델을 해주던 나날들이 그립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시절의 내가 누구인가 싶다.

뒤로 보이는 마당은 옆집 마당인데, 훗날 열쇠를 잃어버려 옆집에 스페어 키를 보관하고 있는지 묻기 위해 들르게 된다.
떠나기 전 아쉬울 것이 분명한 이 집을 기억하기 위해 찍은 사진. 아무도 없던 집에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이 모두 나의 것이었다.

 외국에 나가면 지나가는 여자들에게서 나는 진한 향수 냄새가 좋다. 달달하고 따뜻한 그런 냄새들. 빈말일지라도 너의 귀걸이가 예뻐, 너의 드레스가 너무 예쁘네? 하고 말을 건네던 낯선 사람들. 속옷 가게에 들어가서  시간이고 속옷 쇼핑을 하는 것들도. 널찍한 방같이 생긴 피팅룸도. 버스 요금을 어떻게 낼지 몰라 물어보던 나에게 친절히 알려주며 " I just wanna make sure that you get to home safely."라고 이야기하던 사람들.


 그런 이상하고 혹자는 가식이라고 말할 소소한 친절이 그리워 한국에 돌아와서 매일 가슴속에 구멍이  것처럼 지냈다. 21 , 제주도에서 만난 남자가 나에게 말했다. 자기는 제주도에서도 살아봤고 호주에서도 살아봤으며 서울에서도 살아봤지만 서울만큼 외로운 곳은 보지 못했다고. 그때까지 제주도도 가본  없던 나는 서울에서의 삶이 너무 당연했기에 그가 말하는 호주에서의 삶을 들으며 '  사람 사대주의자인가?'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와는 연락을  한지도 까마득하게 오래됐는데도 20 초반을 훌쩍 넘어선 나는 아직도 그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이제 그의 외로움을 이해한다고. 약간은 사무칠 정도로 어쩌면 당신보다도 .

이상하게 많은 애착이 가던 공간 욕실, 저곳에 있는 샴푸가 오로지 나만의 것이고, 몸을 닦고 나와 머리를 말리고 화장을 하는 시간이, 내가 혼자만의 사람이라는 느낌이 좋았다.

 나의 집이 되어줬던 그곳에 내가 존재했었다는 것이 나에게 조차 까마득하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가슴 아파 그때의 추억을 지금까지도 꺼내보지 않았다. 그곳의 공기를 담고 싶어 영상으로 이것저것을 찍었던 클립들은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번도 재생하지 않았다.


 가끔 너무 힘들  구글맵으로 할머니가 나를 픽업하러 오던 월마트를 찍어 그곳에서부터 차근차근 손가락으로 길을 따라가다 할머니의 집에 도착하면, 새하얀 대문을 보며 울기는 했다. 이젠 연락이 닿지 않는 로레타 할머니가 행복하길 . ‘그녀가 행복하길.’그저 그냥  말만 되뇌며 생각하고 추억한다. 애써  시절을 떠올리며 다시 발견한 그때의 나를 잃고 싶지 않아 무엇을 다시 시작하고 무엇을 다시 느끼며 무엇을 위해 움직여야 할지 곰곰이 생각한다. 끊임없이 붙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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