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 경장편 소설
구관 2층 화장실 귀신 얘기 알아? 구관 2층 복도 끝에 화장실 하나 있잖아. 거기 혼자 들어가면 안 되고 만약에 혼자 가게 돼도 세 번째 칸은 절대 쓰면 안 된대. 볼 일 다 볼 때까진 괜찮거든?
근데 문 열고 나오려고 하면 문이 잠기지도 않았는데 안 열리고 막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 들리고 그런다더라고. 어떤 선배는 누가 미친 듯이 잘못했다고 속삭이는 소리 듣고 기절했다더라.
그 시간 친구들이 위험해지지 않게 혼자 화장실에 들어온 하리는 주경이 보이지 않아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늘 춥고 차가운 공기가 가득했는데. 잠시 고민에 빠지는 하리의 머릿속에 1학년 야자 시간에 반쯤 졸면서 들었던 괴담 하나가 떠올랐다. 여전히 별다른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하리는 세 번째 칸으로 들어가 걸쇠를 돌렸다.
여긴 왜 온 거야?
몇 분을 기다렸을까 희미한 말소리가 목덜미에 닿았다. 하리는 손을 뒤로 뻗어 다가온 주경을 살며시 붙잡았다.
“뭐가 널 여기에 가두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왔어.”
주경은 대답 없이 제 팔을 잡은 하리의 손을 내려다봤다.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학생들은 종종 있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접촉을 한 사람은 처음이었다. 이제는 기억도 나지 않는 온기였다.
죄책감.
“누구의? 널 괴롭힌 사람들?”
주경이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눈을 뜬 그 순간부터 한 사람을 생각했다. 피해 다니기만 했던 그 눈빛. 울 것 같던 그 표정. 나보다 더 고통스러워하던 그 뒷모습. 가족보다 강렬하게 주경을 붙들어 맨 기억이었다.
선생님.
“… 체육.”
해주가 본 주경의 기억 속 인물을 떠올린 하리가 몸을 틀어 주경과 시선을 맞췄다. 어깨를 움츠리고 있어서 몰랐는데 주경은 하리보다 한 뼘 정도 키가 더 컸다.
묵은 감정의 대상은 찾았고, 이제 어떻게 한을 풀어주면 좋을지 물어봐야 했다. 말을 고르던 중 밖에서 하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하리야! 문 좀 열어봐!”
살살 두드리는 소리였음에도 주경은 패닉에 빠진 것처럼 떨기 시작했다. 뚜렷하게 느껴지는 공포에 소름이 돋았다. 하리는 아무렇지 않은 척 외쳤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
주경이 조금씩 희미해지고 있었기에 하리는 조바심이 났다. 한번 관여한 이상 확실하게 책임지고 싶었다. 기분이 나쁘고 귀찮다는 이유로 모른척했던 것에 대한 사과의 의미였다. 뭐라 대꾸하려는 해주 대신 낯선 목소리가 돌아왔다.
“나다. 이은.”
주경의 떨림이 멎었다.
“문 좀 열어줄래? 내가 필요하다고 들었는데.”
본인들의 방식으로 해답을 가져온 친구들 덕분에 하리는 터져 나오려는 너털웃음을 꾹 참고 주경을 쳐다봤다. 화장실 문 너머를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주경은 무슨 기분일까. 하리가 주경을 부드럽게 밀었다.
“이제 나아가도 괜찮아.”
문이 열리고 체육 선생님이 한 걸음을 뻗은 찰나의 순간, 도희는 찬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느꼈다. 체육 선생님은 세 번째 칸 앞에 서 있는 하리를 발견하고 다른 사람을 찾는 듯 주위를 살폈다.
“어…. 너 혼자 있었니?”
하리는 대답 없이 선생님을 살폈다. 선생님의 뒤에 서 있던 해주가 천천히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잘게 떨리는 손이 조심스럽게 선생님의 소매를 잡았다. 잡는다는 표현이 민망할 정도로 힘이 들어가지 않은 동작이었다.
“…ㅈ…ㅜ…ㅅ…요….”
“응?”
“도와…주세요….”
분명히 해주의 얼굴이었지만 눈물이 가득 고인 눈망울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10년을 넘긴 지금까지도 어제 일처럼 선명한 기억 속 초상이었다.
“주경이니?”
“…선생님….”
무거운 침묵이 깔리고 선생님은 천천히 팔을 뻗어 해주를 끌어안았다. 시원한 시트러스 계열의 익숙한 향기. 기다리던 사람을 만나자 모든 기억이 돌아온 주경은 선생님에게 안겨서 한참동안 눈물을 흘렸다.
주경이 죽은 날은 아침부터 비가 아주 많이 내렸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우산을 휘청거리게 했고 축축한 냄새와 젖은 옷 때문에 다들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반장아. 수행 오늘까지 내는 거 알지? 6교시 끝나기 전까지 거둬와라.”
쉬는 시간에 문을 열고 나타난 영어 선생님의 한마디에 2학년 4반 교실이 뒤집혔다. 모두 까맣게 잊고 있던 과제를 하느라 바쁘게 손을 놀렸다.
수행평가의 주제는 좋아하는 시를 영어로 번역해 보기였는데 난이도보다는 10개라는 개수가 문제였다. 최대한 짧은 시를 찾기 위해서 교과서를 뒤지고 도서관으로 달려가 시집을 빌려오는 학생도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 과제를 공유하는 사이 주경은 혼자 마지막 시를 적고 있었다. 물론 주경의 것은 아니었다. 마침표를 찍음과 동시에 하얀 손이 노트를 가져갔다.
“역시 반장이라니까. 빨리 잘했네.”
손목이 욱신거렸지만 자신의 과제도 마무리해야 했기에 주경은 서둘러 자신의 노트를 꺼냈다.
“반장은 뭐 적었어? 보자.”
대답도 듣지 않고 노트를 가져간 현이 내용을 훑어보더니 살짝 웃으며 말했다.
“나 이거로 내줘. 이게 더 마음에 들어. 반장 니꺼 아니라고 대충 한 거야?”
“아, 아니야…. 미안…. 이름 바꿔서 낼게….”
두 권의 노트는 다급하게 주인이 바뀐 채 제출되었고 주경은 처음으로 과제를 대신해 준 것을 들켰다. 교무실에 불려 가 한바탕 잔소리를 듣고 온 현은 주경을 끌고 화장실로 갔다.
“썅년이 봐줬더니 이딴 식으로 엿을 먹여?”
다른 학년은 현장 체험을 갔고 학교는 텅 비어있었다. 비가 오면 더욱 고요해지는 학교 안에서 주경이 도망갈 곳은 없었다. 차가운 타일이 뺨에 닿았고 토악질이 나올 것 같아 입을 세게 다문 게 문제였는지 화장실 문에 부딪힌 머리가 강하게 흔들렸다. 시야가 까무룩 해졌다. 웅성거리는 소리, 이리저리 흔드는 손길, 물기에 젖어드는 셔츠의 감촉까지 모든 감각이 저 멀리 떠나가는 듯했다. 차라리 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요일 오후, 그렇게 혼자 남겨진 주경은 화장실에서 아주 긴 잠이 들었고 자신을 발견한 경비 아저씨가 놀라 넘어지는 모습과 소복하게 쌓인 국화, 장례식장에 찾아와 어머니에게 울면서 용서를 비는 현의 무리, 그들이 뿔뿔이 흩어져 전학을 가고 곧 일상으로 돌아간 교실까지 모두 지켜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화장실을 둘러보는 주경에게 하늘에서부터 환한 빛이 쏟아졌는데 생전에 느껴보지 못한 따뜻함이었다. 저기로 가면 편안해질 것 같아. 천천히 걸음을 옮기다 불쑥 나타난 이은을 발견한 주경은 그대로 발이 묶여버렸다. 짧고도 긴 시간이 흐르며 고통스러운 과거는 잊혀졌지만 주경은 그리움을 끌어안고 차가운 화장실에 머물렀다.
피구는 교묘하게 누군가를 괴롭힐 수 있는 수단이었다. 선생님이 지켜보고 있음에도 주경은 집요하게 자신을 향하는 공을 고스란히 맞을 수밖에 없었다. 점점 세게 날아오는 공을 피해 뒷걸음질을 치다 발목을 삐끗해 넘어지자 체육 선생님이 달려왔다.
“이 자식들이! 다치지 않게 조심히 하라고 했지!”
“아 쌤~ 승부욕이 생겨서 그런 걸 어떡해요. 반장 미안! 괜찮지?”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티가 났는지 주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선생님은 주경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땀 닦고 창고 가서 줄넘기 챙겨 와. 나머지는 경기 계속해라. 지는 팀이 뒷정리하기야.”
입을 다물고 있는데도 신경이 쓰인 것일까 담임을 만나고 온 이후로 체육 선생님은 은근슬쩍 주경을 챙겼다. 체육 선생님과 같은 향이 나는 손수건을 소중하게 쥔 채 주경은 참고 있던 호흡을 편하게 내쉬었다.
“돌려 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체육 창고 오른쪽 구석 탁구채와 공을 넣어두는 박스 뒤. 아무도 살펴보지 않을 작은 틈.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두 사람을 남겨두고 창고로 간 하리와 도희는 먼지를 뒤집어쓴 손수건 하나를 찾았다.
교사라는 직업을 선택하면서 각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빠른 시기에 큰일을 목격하게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늘 희미하게 웃는 낯으로 유령처럼 돌아다니던 아이. 점점 말라가는 주경을 보며 도움을 주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나 답답했다. 아이가 발견된 화장실에서 한참을 머무르며 주머니에 넣어둔 사직서를 구긴 이은은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다시는 주경과 같은 학생을 만들지 않으리라. 쉬쉬하려는 학교와 여러 번 갈등을 빚었지만 버티고 또 버티면서 학생 주임이 되었다. 적어도 자신이 이 학교에 있는 한 반복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도 주경을 떠올리면 언제나 눈물이 났다. 세월이 흘러 낡게 바란 손수건을 돌려받자 남은 후회와 죄책감이 모두 흘러나왔다.
“너는 끝까지 괜찮다고 하는구나.”
마지막 순간만큼은 두려움 없이 따뜻한 품 안에서 위로받은 주경을 향해 하리가 손을 내밀었고 긴 기다림 끝에 주경은 빛을 따라 나아갈 수 있었다.
“어때? 우리가 한 건 했지?”
어느덧 더위를 조금 더 끌어안은 바람이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간지럽혔다. 체육 선생님이 사 준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운동장을 바라보며 앉아 있던 하리와 해주가 의기양양한 도희의 말에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직 눈이 빨간 해주는 코끝에 남은 향을 되새겼다. 주경은 체육 선생님에게 감사함을 전하고 그 애정을 돌려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체육 선생님의 품에서 한참을 울던 주경은 사라지며 해주에게만 짧은 인사를 남겼다. 하리가 자신을 많이 아끼는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도희나 하리에게는 전하지 않았지만 해주가 오래오래 곱씹을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