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아 경장편 소설
친구가 늘었구나.
쓸쓸한 표정인가.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하다.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은데 눈앞에 구름이 모여든 것 같이 시야가 뿌옇다. 가까이 가려고 해도 자석의 같은 극처럼 다가가면 그만큼 멀어진다. 슬슬 답답해지려는데 아예 등을 돌려버린 소녀가 말을 이었다.
행복하니?
오랜만에 꿈을 꿨다. 촉촉한 이마를 닦으며 몸을 일으킨 하리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 지금보다 훨씬 마른 몸의 하리와 다정하게 붙어 있는 단발머리 소녀의 사진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사진을 어루만지는 하리의 눈가가 붉어졌다.
“안 울어. 난 괜찮아.”
넌 항상 내 곁에 있잖아. 거울에 비친 흐릿한 형체가 하리와 가까워졌다. 등을 껴안고 토닥이는 형상이었다. 약하지만 확실하게 느껴지는 한기에 하리는 안도감을 느꼈다. 달력을 쳐다보니 어느덧 5월이었다.
5월은 누군가를 위하는 날이 아주 많다. 아직까지 어린이날에 받을 선물을 기대하는 친구, 스승의 날 파티 계획을 짜는 친구, 어버이날에 드릴 편지를 쓰는 친구, 학교에 오지 않아도 되는 날을 계산하는 친구까지 온갖 행사와 기념일로 한 달 내내 소란스럽다. 하리는 그런 5월의 분위기를 좋아했지만 정작 5월이 되면 누구보다 차분해졌다.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은 하리였으므로 여기저기 불려갈 것이라는 해주의 예상과는 달리 하리를 잘 아는 아이들은 입을 꾹 다문 하리가 혼자 있을 수 있도록 티가 나게 그를 배려했다. 도희와 해주는 어리둥절해져서 하리의 눈치를 살폈다. 밥 먹는 걸 보면 기분이 나쁘거나 컨디션이 저조한 것은 아닌듯했다. 여전히 주머니에는 초코바가 가득했고 해주나 도희가 피곤해 보이면 젤리와 함께 나눠주었다. 두 사람이 말을 걸면 대답도 잘했고 수업 때도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분명히 무언가가 하리를 벽 안에 가둔 것 같았다.
“고하리.”
걱정 가득한 해주가 점점 울적해지는 것을 보다 못한 도희가 나섰다. 위풍당당하게 분위기를 잡았지만 막상 가라앉은 하리의 눈동자를 마주하니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 오늘 점심 뭐 나와?”
“식단표 있어.”
야무지게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둔 식단표를 정독하는 척하며 눈치를 살폈다. 해주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하… 내가 어디 가서 하고 싶은 말 참는 스타일이 아닌데.”
“무슨 소리야.”
하리는 여전히 심드렁했다. 딴 곳에 집중하고 있는지, 깊은 생각에 잠긴 건지 붕 떠 있는 말투였다. 해주가 하리의 손가락을 살짝 잡았다.
“하리야, 무슨 고민 있어? 요 며칠 조금 이상해.”
도희의 영향을 받았는지 그럴싸한 직구가 날아왔다. 하리가 가볍게 고개를 젓는 바람에 닿지 못하고 떨어졌을 뿐 도희는 남몰래 은근한 뿌듯함을 느꼈다.
“하리? 원래 5월 되면 저래.”
“컨디션 구린가 보지. 괜히 괴롭히지 마.”
“원래 봄이나 가을에 날씨 좋을 때 좀 싱숭생숭하고 그러잖아.”
다른 친구들의 반응은 비슷했다. 그럴 수 있지, 하리라면 이유가 있을 거다, 저러다 금방 괜찮아진다. 도희와 해주의 궁금증은 더 커졌고 도희는 답답함에 거의 폭발 직전이었다.
“나 내일 학교 안 나와.”
기묘한 거리가 점점 벌어지던 중 점심을 먹고 운동장을 걷던 하리가 말을 꺼냈다. 해주의 얼굴에 다시 걱정이 가득 찼다.
“왜? 어디 아파? 무슨 일 있어?”
“아니. 아픈 건 아니고 볼 일이 있어서.”
하리의 표정이 여전히 다른 곳에 가 있었으므로 해주는 더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를 꾹 눌렀다. 요즘 해주는 언젠가 하리가 먼저 이야기해줄 거라는 행복회로를 돌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 알려줄 거면서 그런 말은 왜 하지?”
경악스러운 도희의 발언에 해주가 화들짝 놀라 몸을 틀었다. 입술이 쭉 튀어나온 것이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해주가 전전긍긍하는 마음을 누르고 있었다면 도희는 대놓고 서운함을 티 냈는데 하리는 모르는건지 모르는척 하는 것인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중간에 낀 해주만 애써 땀을 닦아대는 중이었다.
다음 날 예고했던 대로 하리가 결석을 했다. 담임 선생님도 특별한 언급이 없었고 하리가 없는 교실은 해주와 도희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 같았다. 기운이 빠져있는 해주를 도희가 살뜰하게 챙겼다. 하리가 해주와 적극적으로 대화를 나누거나 재미있게 노는 것은 아니었지만 해주에게는 그의 존재감이 생각보다 더 크다는 걸 옆에서 지켜봤기에 하는 노력이었다. 그런 도희의 마음이 전해졌는지 오후쯤이 되자 해주도 작게 미소를 보였다.
“해주 너는 어떻게 그렇게 하리를 좋아해?”
분위기가 누그러지자 직구를 날리는 도희 덕분에 해주가 웃는 얼굴 그대로 굳었다. 티가 많이 나? 라는 문장이 얼굴에 실시간으로 쓰였다. 도희는 웃음을 꾹 참고 별거 아니라는 뉘앙스로 말을 이었다.
“아니, 되게 신뢰가 강한 것 같아서. 둘이 원래부터 아는 사이도 아니었다며.”
“하리는…….”
깨끗한 옆 책상을 쳐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긴 해주의 표정이 서서히 풀어졌다.
“내 인생을 바꿔놨거든.”
“오…그거 되게 의미심장하다?”
돌아온 대답의 스케일이 커서 도희는 살짝 놀랐다. 짧은 시간 동안 어떤 일을 겪었길래 저런 맹목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는지 온갖 상상의 나래가 펼쳐졌다.
“하리가 돌아오면 얘기해줄게.”
하리를 따라 하며 킥킥대는 해주는 확실히 교실에 들어 온 첫날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뭔지는 몰라도 엄청난 사건이 있었으리라 결론을 내린 도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평온한 둘의 관계에 억지로 끼어든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살며시 얼굴을 내밀었지만 잠시뿐이었다.
“나도 그만큼 친해질 수 있으면 좋겠어.”
호기심을 넘어 유대감을 형성하기 시작한 셋은 분명 더 깊은 관계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흘렀다.
해주에게는 너무나 길었던 하루가 지나고 하리가 평소와 비슷한 얼굴로 교실 문을 열자 여기저기서 인사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할 틈도 없이 하리의 고개가 교실 한쪽으로 돌아갔고 조용히 다가온 해주가 말을 걸었다.
“하리야, 저쪽에….”
“응. 보여.”
둘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반장 채은이 머리가 아픈 듯 인상을 쓰고 있었고 반장의 책상에 검은 형체가 찰싹 붙어 있었다. 지독한 악취가 반장의 자리에서부터 코를 찔렀지만 다른 아이들은 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제도 저랬어?”
하리의 질문에 해주는 고개를 저었다. 해주도 아침에 교실로 들어오는 반장을 보고 놀란 참이었다. 마치 학교에 돌아온 첫날의 자신 같았다.
“채은이 많이 힘들어 보여.”
“일단 좀 지켜보자.”
검은 형체가 어떤 귀신인지 알 수 없는 만큼 신중했다. 특히 해주가 옆에 있으면 더욱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더 조심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