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면이 꽤 낯설게 느껴지는 토요일 오전입니다. 돌아보니 시간이 또 몇 주 흘렀네요. 뭔가를 줄곧 생각했던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을 했던 건지는 선명하게 기억나지 않는 요즘입니다. 멍하고 무기력했던 것도 같고요. 보통 이런 상태가 되면 번아웃을 의심하는데요. 어젯밤 잠들기 전 ‘육아 번아웃’을 검색하고 자가 진단을 한번 해봤더니 대부분의 항목에 체크가 돼 있었습니다. 결과를 예상하고 한 것이 아니라서 그런지 막상 결과를 보니 좀 놀랐답니다. ‘번아웃 주의 단계입니다. 해당 증상이 2주 이상 지속 되면 심리상담을 받으세요.’ 라는데…. 글쎄요, 언제부터 그랬을까. 그 역시도 잘 모르겠더군요.
아마도 서서히 그리된 것이겠죠. 그동안 만들어지는 에너지보다 소모되는 에너지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달리 말하면 ‘매운맛’ 육아를 하는 날이 ‘순한맛’ 육아를 하는 날보다 더 많았던 것이겠죠. 매운맛 육아를 할 때는 좋아하는 일을 할 짬도 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니 ‘매운맛’이겠지만요. 7 to 9 풀타임 육아 중 ‘유일한’ 휴식 시간이라 할 수 있는 아기 낮잠 시간도 어떨 땐 그냥 건너뛰어 ‘핵매운맛’ 육아가 되기도 했고요. 그런 날이면 오후 4시쯤 벌써 몸과 마음이 녹초가 되어 남편이 퇴근하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악명높다는 그 18개월이 단우에게도 미엘에게도 찾아왔네요. 언젠가는 지나갈 ‘재접근기’ 혹은 ‘엄마 껌딱지 시기’라 여기며 버티고 있긴한데, 제 일상엔 이미 ‘번아웃, 주의요망!’이라는 빨간불이 자주 켜졌던 것 같습니다. 남편이나 친정엄마에게 톡톡 쏘아대는 제 말투가 거슬리기도 하고 사소한 일에도 허덕이는 제 모습이 싫어질 무렵, 이대로 두었다간 우리가 늘 이야기했던 ‘나다움’은 점점 사라지고 ‘지치고 우울한 엄마’만 남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최근 23개월 된 딸을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한 옆집 지유 엄마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고 집 근처 어린이집 몇 군데에 전화해 상담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상담을 받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하더라고요. 든든한 지원군이 생긴 느낌이랄까요. 한편으로는 아직 두 돌도 안 된, 엄마밖에 모르는 단우가 잘 적응을 할까 하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 마음을 읽기라도 하셨는지 두 번째로 상담 갔던 C어린이집 원장님께서 그러시더군요.
“대부분의 아이들은 초반에는 좀 울겠지만 결국은 적응을 하게 됩니다. 준비가 되지 않은 건 항상 어머님들이시죠. 아기는 잘 적응할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엄마만 준비가 되면 됩니다.” 라고요.
그 ‘준비’라는 단어를 듣고 마음을 다잡아보기로 했습니다. 아이를 언제부터 어린이집에 보낼까 하는 문제는 출산 전부터 계속 고민했던 터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막상 보낼려니 마음이 복잡했거든요. 당장 생업에 뛰어들어야 하는 처지도 아니고 몇 달 더 데리고 있어도 되는데 나 힘들다고 너무 일찍 보내나... 하는 생각에 단우한테 좀 미안해지더라고요. 또 다들 하는 육아 나만 이렇게 힘드나 싶기도 하고요.
하지만 결국은 선택의 문제더라고요. 저는 보통 선택을 하는 데 있어서 다른 사람들의 선택보단 저의 가치관이나 직관에 더 기대는 편인데 이번엔 좀 달랐습니다. 사실 좀 두려웠던 것 같아요. 제가 겁이 많은 편은 아니라 쿨하게 보낼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그렇게 안되더라고요. 첫아이라 경험이 워낙 없어서인 것도 있고, 산후조리 기간 외엔 아기를 친정엄마에게조차 맡겨본 적이 없기도 했고, 자주 전염성 질환에 노출되고 아플 것을 생각하니 선뜻 내키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요즘의 육아’, ‘보통의 육아’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네요. 제 주변에 단우또래 아기를 키우는 친구는 별로 없어서(미혼이거나, 비혼이거나, 잠정 보류이거나, 딩크족이거나. 혹은 아이가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이죠.) 맘카페에 검색해보기도 하고 스레드에 있는 글들을 쭉 읽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보통 의사들이 권장하는 ‘36개월까지는 엄마나 아빠가 가정보육 하는 것이 좋다.’라는 권고를 실천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흔하지 않더라고요. 완모(완전 모유)를 하는 게 가장 좋다고 알려져 있지만 완모가 그리 흔하지 않듯이요. 아마도 현실적인 이유가 있겠죠. 보통은 가정보육을 하더라도 육아를 도와주시는 조부모나 보모가 있거나, 없다면 어린이집에 보내는 등 각자 상황에 맞는 선택을 하는듯했어요.
그 무렵 미엘이나 옆집아기 지유의 적응기를 보고 듣다 보니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답니다. 다들 적응하고 나니 어린이집 가는 걸 너무나 좋아한다고 말이죠. 일찍부터 어린이집을 보냈던 남동생도 조카가 어린이집에서 사회성을 키우기도 하고 식사예절을 배워 오거나, 더 잘 먹거나(너무나 기대가 되는!), 다양한 언어 자극을 통해 말이 트이기도 했다고 하고요. 결국 ‘요즘 엄마’, ‘평범’이라는 키워드에 기대고픈 마음이 소신으로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아이를 무균실에서 키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냥 제가 용기를 낼 타이밍이라 생각했죠. 어떤 선택을 하든 완벽한 엄마, 완벽한 환경이란 불가능할테니까요.
그렇게 저는 풀타임 육아와 헤어질 결심을 했답니다. 미엘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서야 비로소 마음 편하게 점심 한 끼를 챙겨 드신다는 자연씨와, 테니스를 치러가던 옆집 지유 엄마의 밝았던 얼굴을 떠올리면서요. 무엇보다 제 안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번아웃 위기라고!” 한편에서 적색 경고등을 끊임없이 켜대던 에고(ego)의 신호를 들어야 할 타이밍이었죠. 아무리 우울증약을 먹고 심리적, 화학적 변화를 도모한다 한들 혼자 7 to 9 풀타임 육아를 한다는 현실은 크게 바뀌지 않을 것이었고, 어떻게든 고군분투하며 가정보육을 해내는 것이 단우와 저, 남편 모두에게 좋은 선택은 아니라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되었죠.
사실 아이를 낳기 전엔 ‘육아 번아웃’이란 건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책 <리셋, 다시 나로 살고 싶은 당신에게>에서도 썼듯, 저는 기질상으로나 성격상으로나 번아웃이 오기가 쉬운 편이라 아이가 태어나면 정말 많은 걸 내려놔야겠구나 생각한 정도였죠. 꼬물거리는 신생아를 보면 모성애가 새록새록 피어나 초월적 힘을 발휘하겠지... 라는 막연한 기대도 있었죠. 뭐, 그 예상이 크게 틀린 건 아니었지만 몸소 겪는 현실은 실로 엄청난 것이더라고요. 앞선 서신에서 말했듯 ‘뇌가 변할 정도의 변화’를 포함해 거의 모든 것이 아기를 중심으로 돌아가다 보니 피곤함이 계속 누적될 수밖에 없더라고요.
막상 해보니 육아라는 건 상상했던 것보다 몇 배, 아니 몇십 배 더 힘든 것이었고 저의 심신은 생각보다 더 쉽게 고갈되고 말더랍니다. 게다가 아기가 백일쯤 될 무렵(그렇게 귀여운 시기에) 찾아온 산후 우울증은 출산 전에 겪었던 우울증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제가 우울할 때 했던 방법들은 효과가 크지 않았고 일시적이었죠.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 자주 올라와 저를 괴롭혔지만 제대로 대처하지도 못했죠. 별 이유 없이 가슴이 먹먹해져서 미친듯이 울거나 공허한 기분을 느끼다가도, 저를 보며 방긋 웃는 아기를 보면 너무 예뻐서 그 순간만큼은 행복에 겨워지는... 이게 과연 뭔가 싶더군요.
하지만 ‘엄마는 강하다’고, 좋은 엄마이고픈 마음이 어떻게든 돌파구를 찾아내더라고요. 단 몇 분을 쉬더라도 밀도 있는 마음 챙김을 해보려 명상을 한다거나 전문가를 찾아가 속내를 털어놔 보기도 하고 열심히 약도 챙겨 먹었네요. 그렇게 하루하루 자신을 챙기려 노력하다 보니 에너지가 많이 올라왔고 그와 동시에 육아가 능숙해지는 지점도 찾아왔습니다. 지나치게 긴장하며 힘들여서 했던 육아를 조금은 힘 빼고 할 수 있게 되었죠.
아마도 제가 육아를 하면서 가장 예상하지 못했던 지점은 힘듦보다는 ‘성장’이 아니었나 싶어요. 다른 일들과 마찬가지로 육아를 하면서 겪는 모든 힘듦의 끝에도 성장이 있더군요. 아기의 성장과 동시에 저 역시도 엄마로서 성장한다는 사실, 아이가 한 단계씩 나아갈 때마다 업그레이드되는 예쁨과 기쁨은 경험해보지 않고는 상상할 수 없었던 듯싶습니다. 나만 알 수 있는 아기의 언어적, 비언어적 신호를 알아차릴 때. 매일 매일 미묘하게 달라지는 아기의 성장을 발견할 때. 새삼스레 엄마라는 존재, 나라는 사람의 영향력에 대해 조금씩 느끼게 되었던 것 같아요.
자연씨는 누군가 ‘아이가 있는 삶’은 어떠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실까요. 저는 그 질문을 받을 때마다 힘은 들지만 여러모로 삶이 다채로워진 것 같다고 얘기하곤 합니다. 달리 말하면 이제야 인간에 대해 ‘조금’ 알게 된 느낌이라고 말이죠. 뱃속에 젤리만큼 작던 배아가 존재감이 확실한 태아로, 그 태아가 세상에 나와 신생아로, 영아로... 기고, 걷고, 말하는 모든 과정에서 느꼈던 감정이란 얼마나 새롭고, 다양하고, 깊던지요.
언젠가 자연씨가 서신에서 표현하신 것처럼 ‘24색 팔레트에 단우라는 새롭고 아름다운 색의 물감들이 추가되어 36색 팔레트’가 된 느낌입니다. 36색 팔레트에는 ‘오페라’나 ‘피코크 그린’ 같은 대체 불가한 쨍한 컬러와 ‘세피아’처럼 묵직하게 어두운 컬러들이 있죠. 저는 이제야 비로소 분홍빛 노을이나 에매랄드 빛 바다를 제대로 그려볼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삶을 찬란하게 채우는 빛과 어둠, 그사이에 촘촘히 자리하는 다양한 층위의 감정들을요.
아이가 있는 세계, 육아의 세계에 온 지 2년 가까이 되어가니 ‘아이’라는 대상에 대한 태도나 마음가짐에도 여러 변화가 생겼습니다. 좋은 어른이고픈 마음 혹은 아이가 속한 환경으로서 좋은 생태계가 돼 주고픈 마음이 강해졌죠. 내 아이뿐 아니라 친구의 아이, 다른 이웃의 아이들에게도 말이죠. 그런 마음이 든다는 것이 고무적이면서도 한편으론 좀 놀랍습니다. 과거의 저는 꽤나 염세적인 사람이었거든요.(웃음) 그간 뭐가 그리도 힘들었던지 말이죠.
물론 지금도 힘든 건 마찬가지입니다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고 해야 할까요.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가 무수히 많고, 뭔가가 익숙해질 만하면 새로운 서툶이 생겨날 테지만, 아이와 엄마의 성장 과정과 ‘그냥 나’로 회귀하는 과정을 즐겨야만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 말이죠.
돌아보니 벌써 가을이 훌쩍 지나고 있네요. 이 서신을 달팽이처럼 써나가던 사이 단우와 남편은 갑자기 불어온 찬 바람에 두세 번 감기를 앓았고, 저도 감기 바이러스를 피하진 못했네요. 집에만 있는 것이 답답하다가도 아기와 단둘이 노는 이 시간도 언젠간 그리워질 거라고 생각하니 또 소중하게 와닿는 것 같습니다.
바람이 차가워지고, 자주 소아과를 들락거리고, 아기의 옷차림을 단단히 싸매는 요즘을 생각하니 밖에서 열심히 놀게 할 수 있었던 초가을의 날씨가 아쉬워지네요. 하지만 좋은 날씨와 좋은 계절은 또 돌아오겠죠.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날처럼요. 돌아보니 우리가 서신을 쓰기 시작한지도 어느덧 꽤 시간이 흘렀네요. 힘든 시기를 버티는 와중에 자연씨처럼 멋진 사람을 만나 함께 산책하고, 대화하고, 글을 쓰고, 그 과정에서 더는 약이 필요 없을 만큼 건강해진 것에 대해 참 감사한 마음입니다.
글쓰기에 열중하다 보니 저라는 사람이 누군지 다시 떠올릴 수 있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바쁘고 정신없는 와중에도 ‘아, 빨리 글 써야 하는데. 뭘 쓰지?’라는 생각만큼은 꼭 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분들이라면 공감하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서툰 초보맘의 희박한 공기를, 대화의 목마름을, 지루한 외로움을, 공허한 자기외침을. 그래서 누군가를 향해 글을 쓰는 이 시간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것을요.
방금 서신을 쓰면서 또 하나를 더 깨닫게 되었습니다. 육아를 하면 감사의 농도 또한 달라진다는 것.
나의 친구 홍작가님, 찐한 감사를 보냅니다. 우리 앞으로도 계속 ‘찐’하게 지내봅시다.
가을의 끝자락, 소중한 인연에게
가영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