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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다인 Oct 26. 2024

나의 세계와 너의 세상이 만나면 by.자연

언니는 불안이 찾아올 때 어떻게 하시나요.    

  

저에겐 방금 그 불안이 찾아왔습니다. 제가 잠이 안올 때 쓰는 방법을 말씀드렸었지요. 몸과 얼굴 근육의 모든 힘을 쭉 빼는 것부터 시작해야하는데 자꾸 미간과 턱에 번갈아가며 힘이 들어가더군요. 아무리 눈을 감고 몸을 이완시키려고 해봐도 자꾸 초조해지고 맥박이 빨라지는 느낌이 들어 결국 이불을 박차고 나와 노트북 앞에 앉았습니다. 전 이 불안이라는 친구를 잘 압니다. 미엘을 모유수유로 먹이던 시절 매일같이 찾아오는 친구였어요. 병원에서는 아기 몸무게가 너무 늘지 않으니 최대한 잘 먹여보라고 하는데 역류가 심해서 모유를 먹는 족족 토하면서도 젖병은 안 물겠다고 버티니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었죠. 그땐 도대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알 수 없었어요. 새벽 수유 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아침이 다가오면 불안이 극에 달아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엉엉 울었던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불안이 나를 잠식하게 내버려두면 한도 끝도 없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불안이라는 놈에게 마음을 점령당하는 순간 더 이상 제 자신이 아니더라구요. 그런 시간을 보내고 나니 이제는 불안이 찾아왔을 때 다루는 방법을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곁을 주지 않는거에요. 잔잔한 수면에 톡 하고 떨어지는 작은 한방울로 시작한 불안이라도 그 파장을 제어하지 못하면 마음속에 물결이 일렁이다가 이내 거세져 온 마음과 머리를 잠식해버리거든요. 그래서 얼른 일어나 작업실의 불을 켜고 앉았습니다.   

   

언니, 단우는 소리에 어떻게 반응하나요? 미엘은 헤어드라이어 소리나 청소기 소리를 두려워하곤 했습니다. 아무리 보여주고 만져보게 하면서 놀아줘도 소리를 켜는 순간 잔뜩 겁을 먹고 기겁하며 울기 일쑤였죠. 어느 날 옆 라인에서 인테리어공사를 하며 시끄러운 소리가 나길래 귀에 손을 갖다대고 “이게 무슨 소리지?”하면서 궁금해 하는 표정을 지었더니 씩 웃더라구요. 그렇게 두 세 번 정도를 반복하니 미엘은 처음 듣는 소리가 날 때마다 손을 귀에 가져가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아기가 되었습니다. 울거나 무서워하는 대신 소리를 인식하고 그게 뭔지 묻는거죠. 그런 미엘을 보며 생각했습니다. 불안감,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무작정 잠식당하지 말아야겠다구요. 왜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지, 어디에서 오는 불안함인지, 어떤 트리거가 있었는지, 내가 무서워하는 대상은 정확하게 무엇인지, 등등을 차분히 생각해보는거에요. 미엘이 하듯이 제 마음의 귀에 손을 갖다대구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렇게 글을 써서 풀어보는 것입니다. 왜 나는 지금 불안할까를 곰곰이 생각하며 타이핑을 하다보니 답이 보입니다. 얼마 전에 시에서 청년창업자에게 임차료의 반을 지원해주는 사업이 있길래 자신만만하게 지원했었거든요. 지원서를 쓰다보니 여섯 명 안에는 당연히 들어 임차료를 지원받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점점 확고해졌습니다. 그런데 어제 1차 서류에서 미선정되었다는 통보를 받았어요. 문자를 몇 번이고 들여다보며 선정이 아니라 미선정이라는 것을 이해하기까지 조금 걸렸습니다. 그 정도로 자신있었거든요. 뭐 그래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남편에게 이야기하고 훌훌 털었습니다.      


그러고는 미엘을 어린이집에 데려갔습니다. 아직 적응기간이라 한 시간 정도 있다가 데리고 오는 중인데 주말을 지내고 월요일이라 그런지 특히 힘들어하더라구요. 어린이집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울음을 터트리는 것을 시작으로 조금 기분이 나아졌을 때를 틈타 인사하고 방을 나오려고 하니 금새 그 분위기를 알아차리고 엉엉 울기 시작했어요. 원장님 사무실에 앉아서 미엘이 어쩌나 봤는데 계속 울다말다하며 담임 선생님 품에 힘없이 안겨있더라구요. 마음이 복잡해졌습니다. 뭐 대단한걸 하겠다고 두 돌도 안되는 작은 아기를 이렇게 울리면서까지 떼어놓나. 집에서는 별 장난감 없이도 엄마아빠와 교감하며 세상 행복해하고 혼자 두어도 사부작거리며 하루종일 기분좋게 잘 노는 아기인데 어린이집에 데려다놓고 울려가며 적응하라고 하는게 맞는건가. 별 생각이 다 들었어요.      


점심도 거부하고 우는 아기를 데려오며 생각이 많아졌지만 한편으로는 내심 마음이 들떠있었습니다. 내일은 저희 가게 천장과 바닥을 하는 날이거든요. 천장 도배를 싹 하고 바닥을 원하는 색으로 깔고 나면 분위기도 확 바뀔 거고, 이제 곧 주문한 가구들도 하나하나 도착할 것이고, 드디어 본격적으로 오픈 준비를 하는 재미가 있겠지! 하는 와중에 전화가 울렸어요. 자재가 도착하지 않아서 광복절이 지나고 금요일에나 작업이 가능하겠다는거에요. 오늘이 겨우 월요일인데 말이죠.      


이렇게 세 번이나 훅훅 들어오는 펀치에 결국 너덜너덜한 기분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글을 쓸 수 있다는게 참으로 다행이라고 느껴집니다. 이렇게 제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 자체가 건강한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미엘이 큰 소리에 놀라 무작정 울지 않고 귀를 기울이며 이게 무슨 소리인지를 알려고 하는 것 처럼요. “응 버스야, 이건 슝~ 전투기가 지나가는 소리야, 이건 옆집 드릴 소리야” 하고 소리의 출처를 알려주면 미엘은 이해하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 하면서 하던 놀이로 돌아갑니다. 저도 제 자신에게 말해주려고 합니다. “걱정하지 마. 당연히 잘 될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기대처럼 이루어지지 않았고, 월요일이라 미엘이 어린이집 적응을 조금 더 힘들어했고, 일정에 조금 차질이 생긴 것 뿐인데 이 모든게 하루에 다 벌어지니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지. 그래도 괜찮아.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 조금 더디더라도 꾸준히만 가면 돼.” 하구요.      


여기까지 쓰고나니 몸이 조금 릴렉스되는 느낌이 들면서 눈꺼풀이 감겨옵니다. 이제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라고 쓴 것이 월요일이었는데 맙소사, 벌써 토요일 밤입니다. 글을 쓰지 못한 날들이 하루, 이틀.. 닷새가 되었네요. 물론 전혀 쓰지 않은 건 아닙니다. 생각날 때마다 노트에도 끼적이고 자기 직전에 영감이 떠올라 핸드폰 불빛에 눈을 찡그리며 메모장에 오타가 가득한 문장들을 남겨두기도 했지만 이렇게 덩어리 시간을 내어 글을 쓰는 건 닷새 만입니다. 그 사이 언니는 벌써 저에게 서신을 보내왔지요. 전 아직 반밖에 못썼다는 말에 “고모도 집에 가시고 가게공사하느라 정신 없었을텐데요”라는 말로 저를 배려하시면서요. 사실 더 힘든 쪽은 언니였을 것 같은데 말이죠. 저는 몇 달 째 공동육아 중이지만 언니는 요즘 많이 칭얼대고 엄마껌딱지 모드가 된 단우를 주중에는 혼자 돌보고 계시잖아요. 단우가 요즘은 낮잠도 짧게 잔다고 들었는데 늘 먼저 글을 완성하시는 언니의 성실함에 매번 감탄합니다. 언니의 서신을 빨리 읽고 싶어서라도 조금 속도를 내어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언니가 지난 서신에서 말씀하셨던 책의 “나의 세계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어”라는 구절을 생각해봅니다. 문득 대학생 시절, 싸이월드 프로필 화면에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가득 써놓았던 기억이 나네요. “산책, 아침공기, 여행, 수다, 조용한 새벽, 글쓰기, 바다, 알랭드보통 (20대에 흠뻑 빠져있었습니다), 하루키, 재즈, 공항, 단잠” 등등이었던 것 같습니다. 스물셋의 저는 그랬습니다. 다시 2024년, 서른 일곱의 여름으로 돌아와 제가 좋아하는 것들과 저의 세계를 살펴봅니다. 여전히 여행과 독서와 글쓰기와 수다와 단잠을 좋아합니다만 미엘의 등장으로 예전만큼 즐기고 있지는 못하고 있으며 그래서인지 좋아하는 마음, 갈망하는 마음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임신 기간, 제 안에 미엘을 품을 때부터 이미 느꼈던 사실입니다. 콩알만했던 게 점점 사람형태를 하고 커져가면서 제 갈비뼈를 툭툭 차기도 하고 제 안의 장기를 밀어내는 느낌이 들 때 마다 생각했습니다. 요 놈이 밖에 나오는 순간 이전의 나의 세계는 밀려나고 온통 요 녀석의 잔치가 되겠구나 하구요.      

예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가장자리로 밀려가는 저의 세계가 아쉬워 미엘이 잠든 낮과 밤 사이에 어떻게해서든 흩어진 저의 세계를 끌어 모으려는 듯 열심히 읽고 쓰곤 했어요. 그때만큼은 엄마라는 페르소나를 벗어버리고 나 자신이라는 기분을 흠뻑 느끼면서요. 그러다가 미엘이 잠에서 깨면 아쉬워하며 저의 자아를 덮어두고 다시 엄마로 돌아가곤 했죠. 아기가 낮잠을 짧게 자고 보채거나 밤잠을 자꾸 깨는 날에는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나도 지켜내고 싶은 나의 세계가 있단 말이야! 하면서요. 그러나 미엘의 16개월을 맞이한 지금은 엄마라는 페르소나가 저에게 자연스럽게 흡수되어 저의 고유의 자아를 단단히 끌어안은 느낌입니다. 이걸 어떻게 표현할까 하다가 얼마 전 미엘의 아침식사를 준비하면서 깨달았어요. 예전의 제가 그냥 식빵이었다면 지금의 전 노란 계란물을 입히고 으깬 바나나와 블루베리를 잔뜩 묻혀 후라이팬에 앞뒤로 구워낸 프렌치토스트라는 것을요! 언니도 언니의 세계에 대해 오랜 생각 끝에 ‘조금은 변했다’라고 하셨죠. 언니의 24색 팔레트에 단우라는 새롭고 아름다운 색의 물감들이 추가되어 36색 팔레트로 업그레이드 된 상상을 해봅니다. 우리가 더 깊은 글쓰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봅니다.      


그나저나 언니의 책 취향은 저랑 비슷하면서도 다르군요. 저는 시인이나 소설가의 에세이를 좋아합니다. 문장의 리듬감이 좋거든요. 당장 떠오르는 건 최승자 시인의 <어떤 나무들은-아이오와 일기>, 반수연 소설가의 <나는 바다를 닮아서>, 하루키와 메리 올리버의 에세이들입니다. 언니는 호기심에서 과학서나 논문을 읽으신다니... 그러고보니 산책하다가 만난 처음 보는 새의 이름이 궁금해서 도서관으로 달려가 새 도감을 찾아보았다는 제 또 다른 친구가 떠오르는군요. 전 호기심이 강한 편은 아닙니다만 ‘어떤 사실이 아주 개인적으로 와닿을 때 만들어지는 내밀한 즐거움을 즐기는 편’이라는 언니의 말에는 살그머니 호기심이 동합니다. 과학자들이 문학적으로 쓴 책을 한 권 추천해 주신다면 한 번 읽어보고 싶습니다.    

  

올해 8월은 참으로 강렬하게 기억될 것 같습니다. 한 달이 넘게 밤에도 끄지 못하고 계속 가동중인 저희집 에어컨처럼 사실 저도 약간의 과로 상태입니다. 쿠킹 스튜디오 오픈을 준비하고 있는데 이것 참 육아만큼이나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더군요. 머릿속을 가득 채운 빛나는 계획에 비해 참 비루할 정도로 실행이 안되고 있는 부분도 많고 체력도 딸립니다만 그럼에도 ‘언젠가는’ 이라고 생각했던 일을 실제로 벌이고 있다는게 신기하고 재미있는 요즘입니다. 매일매일 나아가고 있는거겠죠. 제가 이 며칠에 걸친 서신을 끝내 완성했듯이요!      


불안에 지고 싶지 않은      

자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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