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엘이는 오늘 잘 잤나요? 아니, 자연씨는 오늘 잘 잤나요?
무더운 날과 더불어 매운맛 육아를 하고있는 자연씨의 안부를 더 묻고 싶은 요즘입니다. 단우는 오늘 통잠을 잤지만 저는 어제 늦게 잠이 들어 비몽사몽한 아침이네요. 가까스로 단우의 아침을 챙겨주고 휴대폰을 보니 한 시간 전쯤 자연씨로부터 ‘오늘 산책가시나요?’라고 묻는 카톡이 와있습니다. 뒤늦게 열어본 영상은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공원에서 오종종 걷고 있는 미엘이의 귀여운 걸음마가 담겨 있습니다. 갑자기 시간이 훌쩍 지나버린 것 같아요. 몇 주 전만 해도 단우랑 열심히 걸음마 보조기를 밀고 있었는데 말이죠. 그때는 햇볕이 뜨겁긴 해도 바람은 참 시원했는데. 종일 덥고 습한 공기를 머금고 있는 요즘은 가끔 불어오는 텁텁한 바람이 그저 고맙게 느껴집니다.
오늘의 날씨를 저희 집 AI 스피커 ‘짱구’에게 물어보니 현재 온도는 28도, 체감온도는 29도랍니다. 산책할만한 날씨인지 궁금하지만 ‘짱구’는 단지 날씨 데이터를 불러올 뿐이니 판단은 제가 해야겠죠. IT업계 최전선에서 일했던 과거의 저였다면 그다지 정교해 보이지 않는 짱구의 로직을 제법 아쉬워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날씨나 묻고 에어컨을 켜고 끄는 정도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체감온도, 습도, 풍속, 미세먼지 데이터를 합쳐 ‘산책 추천’ 로직을 만들면 어떨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긴 했지만요.
아기가 돌이 지나니 거의 모든 것에 기대치가 낮아지는 현상을 경험합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봤는데 대충 두 가지로 수렴되는 것 같습니다. 신경이 온통 아이에게 가 있고 아이를 중심으로 살다보니 다른 것에 관심이 줄었다는 것, 어떤 대상에 기대와 실망할 에너지가 별로 없다는 것. 그런데 저는 이 두 가지 때문에 저 자신이 누구인지,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꽤나 잊어버린 듯했습니다.
그걸 인지하게 된 계기는 엊그제 단우에게 읽어줬던 책을 통해서였어요. 그 책은 로이스 엘럿(Lois Ehlert)의 <In My World>라는 제목의 그림책인데, 이렇게 시작합니다.
- My world is made of things I like;
(나의 세계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이뤄져 있어.)
그 책의 첫 줄을 읽고 문득 내가 좋아하는 것, 나의 세계는 무엇으로 이뤄져 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당황스럽게도 당장 떠오르는 것이 없었네요. 책 읽고,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좀 더 디테일하게 생각해보려 해도 특별히 생각나는 게 없었죠. 만년필을 좋아해서 저렴한 것부터 고급 만년필까지 몇 자루 가지고 있지만 요즘은 아예 꺼내볼 생각도 없으니 좋아하는 게 맞나 싶었고, 세미 정장을 즐겨 입곤 했었는데 옷장안 제 옷을 보면 남의 옷인 듯 보이고, 와인을 즐겼었는데 지금은 아주 어쩌다 한 잔씩 마시고, 장르 구분 없이 온갖 음악을 찾아 들었지만 요즘은 라디오의 클래식 채널만 주구장창 틀어두고 있죠.
그러니 ‘My world’는 영역이 좁아졌다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엄마’라는 정체성이 부여된 후 다른 영역이 추가되었다고 봐야 할까요. 그날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는데 결론은 ‘조금은 변했다’에요. 뭔가를 할 정신적, 체력적 겨를이 없었던 동안 차츰 ‘잊혀진’ 영역(없어진 게 아니라)과 아기와 함께하며 새로이 만들어진 영역이 공존하고 있다고요. 그날 저는 오랜만에 뭐라도 좀 써보자 싶어 사들인 A6 크기의 노트에 이렇게 썼습니다.
- 나의 세계는 ‘아이’라는 세계와, 내가 절대적으로 좋아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테면 독서, 글쓰기, 그림 그리기. 좋아하고 자주 썼던 물건들은 요즘 거의 안 쓴다(못 쓴다). 그러나 당장 슬퍼하거나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은 자연스레 다시 시작될 것이다. 내게 시간이 조금 더 생긴다면, 에너지가 조금 더 있다면.
에너지. 눈치채셨겠지만 저는 늘 에너지를 의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초민감자 + 내향인으로서 적당히 잘 살아가기 위해 나름 하는 것인데요. 어떨 때는 에너지를 의식하는 것만으로 지칠 때가 있습니다. ‘할까 말까?’ 하는 생각에 치인달까요. 어떤 일을 했을 때 뒤따르는 일들, 그 일들에 소모될 에너지를 너무 생각하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선택을 하기도 하죠. 요즘 유행하는 말로 ‘대문자 T(MBTI의 T)’ 라 불리는 ‘사고형’ 인간인 저는 생각하느라 집 안 문턱을 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하지만 최근 산책만큼은 웬만하면 나가려 하고 있죠.
그 계기는 두어 달 전쯤 자연씨와 카톡으로 나눈 대화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언젠가 에너지가 없어 못 나간다는 저에게 자연씨는 ‘저는 움직여야 에너지가 생기더라고요.’라고 했었죠. 그 순간 제가 ‘쉬겠다’라는 태도 내지는 ‘쉬고 싶다’는 정서를 꽤 오래 유지해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경험적으로든 이론적으로든 머리로는 아는데 몸이 움직여지지 않는 상태, 혹은 알고 있는 것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못하는 상태였어요. 한마디로 ‘쪼그라든’ 상태였죠. 병원도 다니고 약도 먹고 있었지만 움직임은 별로 없었던 그때. 비로소 제 상태를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나가서 걸어야 한다는 것을요.
고된 육아로 잠 못 자고 힘든 건 자연씨도 마찬가지일 텐데, 매일 아침 걸으며 에너지를 일으키는 자연씨를 보며 갑자기 저의 평균값이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혹시 아실지 모르겠는데요, 몇 해 전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강연에서 조용민 구글 매니저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최근에 만난 5명의 평균이 바로 당신이다’. 매일 소통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현재의 나를 만들고 있다고요. ‘나’의 정의를 ‘평균’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게 재미있었어요. 실제로 어떤 사람을 자주 만나면 알게 모르게 생각이나 태도, 말투가 바뀌기도 하니까요.
지금 저는 1. 단우, 2. 남편. 이렇게 두 사람이 기본값이고 그다음으로 자주 소통하는 사람은 육아 동지이자 글쓰기 동료인 자연씨, 친정엄마(전화통화), 오전에 종종 들리는 집근처 카페의 사장님 정도겠네요. 그 외 9시~10시쯤 나가면 랜덤하게 마주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파트 내부를 청소하시는 아주머니와 아파트 외부를 관리하시는 아저씨, 또 단우보다 5개월 누나인 옆집 아기 지유와 지유엄마에요. 산책을 시작하기 전에는 거의 만나지 못했던 분들이죠.
어느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그러셨는데 사람은 하루 최소 7번 이상의 소통이 있어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걸 의식한 건 아니지만 밖에서 이웃분들을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하고 스몰토크를 나누게 됩니다. 뭔가 ‘목말랐던 듯’ 말이죠. 처음에는 그냥 인사만 했는데 아기랑 있다 보니 조금씩 대화도 하게 되었습니다. 아기가 걸음마를 못할 때는 ‘아기가 안 걸어요.’라는 주제로 대화하고, 아기가 걷기 시작하니 날이 더워 잘 못 나간다고 이야기합니다. 스몰토크는 대부분 ‘아기 엄마’로서 이뤄졌지만 그 페르소나 뒤에 있는 ‘나’를 깨우는 동력이 여러 방식으로 만들어지고 있었죠.
그렇게 아침 산책으로 만들어진 에너지로 요즘엔 뭔가를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네요.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미뤄뒀던 정리를 하거나... 조금이라도 생산적인 일을 하고 나면 결핍된 무엇(아마도 저 자신이겠죠.)인가가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죠. 그 시간이 누적되다 보니 자기 만족감이 높아지고 ‘다른 것’에도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아기 낳고는 완전히 손 놓고 있었던 운전도 조금씩 하고, 에너지가 없다는 핑계로 자주 연락하지 않았던 친구도 집에 초대해 같이 놀기도 했죠.
저는 이러한 산책의 효과를 ‘자연씨 효과’라 부르고 있습니다. ‘자연씨 효과’의 또 다른 기능으로는 약간의 의무감을 가지고 제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고 조금씩 실행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최근 새로운 도전을 하면서 하나씩 부딪히고 시도하는 자연씨를 보고 있으면 ‘나도 뭔가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거든요. 비젼과 목표를 세우고 뭔가 도전해보자는 마음이 오랜만에 다시 생기니 자연스레 독서 시간도 필요해졌습니다. 시간적 체력적 여유가 생겨도 왠지 사치처럼 여겨지던 독서를 지금은 영양제를 먹듯 챙겨서 하고 있어요. 영감을 줄 만한 작가의 책이나 배우고 싶은 스킬에 관한 책들을 사서 틈틈히 읽고 있답니다. (좋은 게 있으면 공유할게요.) 아기랑 있다 보니 진도가 전처럼 팍팍 나가지는 않지만, ‘읽을 수 있는 게 어디야.’ 하고 있습니다.
그 외 취미로 읽는 책들은 단순히 즐거움을 위해서 읽는 책들(고전문학), 순수하게 작가의 이야기가 궁금해 읽는 책들(에세이), 호기심으로 읽기 시작한 책(과학서, 논문)들로 나뉩니다. 장르를 특별히 따지진 않는데 최근 읽은 책들은 주로 비문학이라 소설이나 시집은 별로 없네요.
사실 전 쉽게 동하는 사람이라 비문학이나 논문을 읽으면서도 자주 ‘아!’ 하고 감동받는 편입니다. 어떤 사실(Fact)이 아주 개인적으로 와닿을 때 만들어지는 내밀한 즐거움을 즐기는 편이죠. 그래서 종종 과학자들이 문학적으로 쓴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하는데요. 시를 읽을 때와 같은 맥락이에요. 이를테면 ‘A는 B이다.’와 같은 짧은 문장들, 절묘한 묘사나 미려한 표현 없이 필요한 단어 몇 개만으로 만들어진 문장들. 그 문장들의 정직한 간결함에 머물다 보면 작가가 어떤 것을 아주 제대로 알아내기까지의 긴 고뇌의 시간을 상상하게 됩니다. 문장 안에서 느껴지는 작가의 ‘내공’이랄까요. 응축된 ‘뭔가’를 찾아내는 기쁨, 그 때문인지 언젠가부터 그런 문장을 쓸 수 있는 작가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비록 그 작가분의 책을 모두 챙겨 읽진 못해도 일단 책장에 꽂아놓고는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죠.
책장하니 생각났는데, 저에게 어떤 작업실을 갖고 싶은지 물어보셨죠. 단우 태어나기 전(아마도 제 첫 책의 원고를 쓸 무렵)에 저만의 작업실을 꾸몄던 적이 있었어요. ‘내 서재’라 불리던 그 방은 제 취향보다는 전셋집이라는 현실에 맞게, 실용성 위주로 꾸며진 방이었어요.
지금 제가 앉아 있는 책상은 그 당시 친정엄마가 생일 선물로 사주신 건데, 벽면 가득 크게 나 있던 창가 쪽에 두어 새벽녘 흩날리는 눈을 보며 글을 쓸 수 있었죠. 창가라 발은 좀 시렸지만, 뷰가 꽤 괜찮아서 세상의 모든 낭만을 혼자 독차지한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오른쪽으로는 남편이 땀을 흘리며 조립해준 하얀색 이케아 책장이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서재가 생긴다면 한쪽 벽면을 책으로 채우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때 잠시나마 제 로망이 실현되었죠. 그 방이 꽤 널찍해서 책상 뒤편으로는 공업용 재봉틀과 전용 책상이 놓여있었어요. 예전에 패브릭으로 뭔가를 만드는 것에 푹 빠져 큰맘 먹고 산 재봉틀이죠. 그 옆 붙박이 수납장에는 패턴을 그릴 때 쓰는 도구들과 재봉용품, 조금씩 사 모았던 원단들이 색깔별로, 계절별로, 용도별로 잘 정리되어 있었답니다.
지금 그 방에 있던 물건들은 아기방을 마련하기 위해 여기저기 흩어지게 되었네요. 책상은 다락으로, 책장은 거실과 아기방으로, 재봉틀은 옷방으로요. 훗날 다시 저만의 공간이 생긴다면 흩어진 가구들을 다시 한곳으로 모으고 싶습니다. 특히 엄마가 저의 글쓰기를 응원하며 사주신 책상과 제가 힘들 때 스스로에게 선물한 재봉틀은 오래오래 함께하고픈 마음이에요.
다시 저만의 전용 책장이 생긴다면 튼튼한 하드 우드로 만들어진 책장을 사고 싶어요. 거기에 좋아하는 책들을 한가득 꽂아놓고 가끔씩 읽었던 책을 다시 꺼내읽는 여유를 부려보고 싶네요. 저는 보통 책에 밑줄을 긋고 메모 하면서 읽는데(그래서 주로 사서 읽네요), 과거의 제가 남겨놓은 흔적들을 보는 재미가 또 있거든요. 공간이 좀 크다면 널찍한 원목 테이블과 이젤도 하나 놓고 싶습니다. 디지털페인팅이 대세인 시대라 해도 ‘Undo 기능(ctrl/cmd + Z)’으로 되돌릴 수 없는, 그래서 단 하나뿐인 ‘손맛’ 나는 작업은 포기할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또 뭐가 있으면 좋을까요. 회현동 지하상가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클래식한 스탠드형 스피커도 하나 있었음 좋겠고, 그 곁에 자유로운 곡선을 뽐내는 화분도 두어 개 두면 좋겠네요.
아마 그 공간엔 제가 자주 소통하는 다섯 사람의 흔적도 있겠죠. 때로는 미니멀리즘의 바람이 몇 차례 그 공간을 비우라 명하겠지만 고민하고 고민해도 결국은 함께할 수밖에 없는 물건들, 이를테면 오래된 필름사진과 손편지, 카드, 선물 받은 물건들(아마도 그릇이나 문구들), 저의 손때가 묻은 노트들이 그 공간을 채우고 있을 것 같네요. 이렇게 쓰고 보니 이미 제가 그 작업실에 있는 듯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꿈은 생생하게 꿔야 이뤄진다던데, 제 작업실도 머지않아 만들어질 것 같네요. 이 역시도 ‘자연씨 효과’가 아닐런지요.
세계를 더욱 확장중인
가영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