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새벽 5시, 해도 뜨지 않은 이 시간 저는 거실에 나와 커피를 마시며 호아킨 소로야의 그림을 보고 있습니다. 음악을 듣다 문득 소로야의 그림이 보고 싶어졌거든요. 자연씨는 소로야를 아실까요. 바닷가를 거니는 여인들 그림으로 유명한 스페인 인상주의 화가랍니다. 하얀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며 바닷바람을 맞고 있는 여성들을 소로야는 바로 눈앞에 있는 듯 생생하게 포착해냈죠. 그림은 한없이 아름답지만 새벽에 그림을 보고 있으니 그림 속 여성들에 제 자신이 투사되어 알 수 없는 연민이 느껴집니다. 제 눈에는 그녀들이 ‘자유부인’ 시간을 갖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넘실거리는 저 바다가 그녀들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었을까 하고 말이죠.
‘소로야’ 하면 바다이지만 저는 <소로야 집의 정원(The gardens at the sorolla family house)>이라는 그림이 좋아서 엽서로 소장하고 있습니다. 한 달 전쯤인가 서점에서 그 엽서를 발견하고는 홀린 듯이 계산대로 갔었죠. 여름의 빛과 그림자를 섬세한 색채로 포착하고 있는 이 그림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언젠가 남편과 함께했던 스페인 여행이 떠오르거든요. 신혼 시절 과중한 업무로 지쳐 있었던 남편과 저에게 큰 추억을 선사했던 여행이었죠. 돌아와서도 계속 여운이 남아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면 그때 또 가자고 되풀이해 말하곤 했습니다. 그게 언제가 될까,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다 지으면? 10년쯤 후? 그랬었는데…. 그로부터 5년이나 지나서야 단우를 만날 수 있었네요.
첫 아이와 함께 하는 모든 여행엔 언제나 로망이 담기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해보지 못한 여행에 대한 갈망뿐 아니라 감당해야 할 것도, 챙겨야 할 것도 많겠지만요. 새벽녘에 이렇게 소로야의 그림을 보니 문득 오래전에 가졌던 저희 부부의 로망이 떠올랐고 자연씨에게 서신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새삼스럽지만 새벽이든 언제든 이런 이야기를 글로 전할 대상이 있다는 건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새벽녘의 서신, 커피, 피아노 음악, 소로야의 그림. 이상적이네요. 이쯤에서 자연씨는 이렇게 물을 것 같습니다. “언니, 단우 깨기 전에 잠시 ‘미라클 모닝’이라도 하시나요?” 라고요.
평온한 듯한 새벽 5시의 실상은 사실 이렇습니다. 갑자기 급방전되어 저녁도 못 먹고 잠들어버린 단우가 새벽 3시에 깼고, 데운 우유와 닭고기 죽을 먹여 재워 보려했지만 잠들기를 거부해 결국은 거실에서 놀고 있죠. 최소한의 조명만을 켜두고 지금은 잘 시간이라는 걸 앵무새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단우는 자동차 외엔 관심이 없습니다. 하릴없이 저도 깜깜한 유리창에 등을 기대고 단우의 놀이매트에 앉아 있네요. 잔잔한 피아노 음악을 들으면서요. 두어 시간 정도 더 놀게 두면 다시 잠들 것 같으니 적당히 반응해주되 아주 신나게는 안놀아주려고요.
몇 시간 못 자고 일어나 몹시 피곤하지만 단우와 있는 이 시간을 고통스럽게 인식하고 싶진 않아서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좀 채워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이것도 어느 정도 체력적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하긴 하지만요. 커피, 음악, 그림, 글쓰기, 드문드문 육아. 이러고 있으니 갑자기 능숙한 엄마라도 된 것 같습니다. 다행히 단우는 엄마를 찾지 않고 혼자 자동차 놀이에 몰입해 있네요. 이것으로 저는 다 괜찮습니다. 암요, 암요. 잠은 몇 시간 뒤에 또 자면 되니까요.
제가 괜찮은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약 6시간 후면 대학원 동기 언니를 만나 전시회를 보러 갈 예정이거든요. 참 많은 것들이 오랜만이네요. 저의 자유시간도, 친구를 만나는 것도, 전시회를 가는 것도요. 아마도 저를 태운 고속버스가 서울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면 막혀 있던 어딘가가 뻥 뚫리는 듯한 기분을 느끼겠죠. 소로야 그림 속 바닷가를 산책하는 여성들처럼요.
남편에게 한 달에 한 번은 ‘자유부인’ 하겠다고 선언해놓고선 날이 너무 덥다고 계속 미루다가 갑자기 엊그제 “나 이번 주에 자유부인 할래.”라고 선언했네요. 어제 <아트센터 인천>으로부터 공연 안내 문자를 받았는데 갑자기 그 공연이 가고 싶었거든요. 돌아오는 토요일 저녁 5시, 조지 거쉰의 <랩소디 인 블루> 공연이었죠. R석을 저렴한 가격으로 볼 수 있는 데다 <랩소디 인 블루>는 저무는 8월에 딱 어울리는 음악이라 구미가 당겼는데 공연장이 인천 송도라는 게 마음에 걸렸습니다. 혼자 왕복 두 시간을 운전해 공연을 보고 오는 건 좀 심심할 것 같고, 친구랑 같이 가기에도 좀 애매해 그냥 포기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별 고민 없이 남편과 다녀올 수도 있었을 텐데, 여러모로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날 저녁 다소 울적한 마음으로 설거지를 하는데 라디오에서 거짓말처럼 <랩소디 인 블루>가 흘러나왔습니다. 참 희한한 타이밍이었죠. 저는 자연스럽게 설거지를 멈추고 볼륨을 높였습니다. 여름밤의 소나기처럼 시원하게 쏟아붓는 전주를 듣다 문득 깨달았죠. 제가 원하는 건 공연이 아니라 ‘정신적 환기’였다는 것을요. 마지막으로 ‘자유부인’이 된 게 5월 초쯤이었으니 정말 나갈 때가 됐다 싶었죠. 근데 누구랑 뭘 하지? 고민하던 차, 동기 언니가 인스타그램에 ‘우리 볼 때 됐어’라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그 역시도 참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죠. 마침 삼성동에서 스웨덴 왕립미술관 컬렉션 <새벽부터 황혼까지>라는 전시가 주말까지 열린다기에 당장 언니와 약속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약 6시간 후로 다가왔네요.
단우가 자면 저도 잠깐 자고 일어나 전시회를 보러 가려고요. 오랜만에 보는 전시회가 어떨지 기대가 됩니다. 거길 다녀와서 다시 이어서 글을 써야겠습니다. (역시 17개월 아기를 보면서 글을 쓰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네요...)
(4일 후)
주말을 지나 다시 책상 앞입니다. 토요일에 전시회를 다녀왔고, 일요일엔 열심히 육아와 집안일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네요. 어김없이 한주가 시작되었고 벌써 화요일입니다. 주말에 자연씨 가족도 전시회를 다녀오셨더군요. 걸음마를 못 하던 아기들이 이제 전시회도 다녀올 수 있게 되다니... 별 탈 없이 잘 크는 아기들이 참 기특합니다. 미술관에서 예쁘게 웃는 미엘이의 모습을 보니 저도 단우를 데리고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동기 언니와 다녀온 전시회는 역시 좋았습니다. 오랜만에 화가의 붓 터치를 가까이서 보게 되니 제 안에 잠들어 있던 예술혼이 깨어나는 듯했죠. 전시회에 자주 등장했던 단어는 ‘혁신’이었습니다. 당시 북유럽 화가들은 왕립아카데미에서 ‘완벽한’ 신화 그림을 그리는 것에 갈증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화가들은 다양한 주제 표현과 새로운 스타일을 경험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 덴마크 스카겐 등지로 넘어갔고, 인상주의를 비롯한 여러 스타일에 영향받았죠. 그리고는 돌아와 고국의 정취에 맞게 여러 스타일들을 적용하고 시도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익숙한 화풍을 보는 듯하면서도 북유럽만의 감성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 지금의 이케아(IKEA)의 설립에 영감을 주었다는 칼 라르손의 동화 같은 수채화 작품들도 감상할 수 있었죠.
저는 여성 화가들의 그림이 좋았는데 그중에서도 한나 파울리(Hanna Pauli)의 〈아침 식사 시간〉이란 그림이 가장 마음에 들었답니다. 당시 스웨덴 화가들이 프랑스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다소 경직된듯한, 사진처럼 딱 떨어지는 완벽주의가 엿보이는 그림들도 제법 보였죠. 그런데 한나 파울리의 작품은 <소로야 집의 정원>처럼 일상적이면서도 특별한 풍경을 생생하게 담고 있었습니다. 당시 북유럽 여성들은 왕립아카데미에서 그림을 배울 수 없었고 주제 표현에도 제약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이 오히려 독창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때로 제약은 창의력의 도구가 되기도 하니까요. 아침 햇살이 드리워진 야외 정원에 단아하게 차려진 한나 파울리의 식탁은 그늘마저도 맑고 우아했습니다. 식탁 위에 떨어진 한 줌의 햇살은 ‘Here and Now, 지금 여기서 행복할 것’, 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죠.
그 그림을 눈에만 담고 오기엔 좀 아쉬워 아트샵에서 그 그림이 인쇄된 엽서를 한 장 구매했습니다. 집에 가서 소로야 그림 옆에 두고 감상하고 싶었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그림 엽서를 다시 꺼내 보았는데 그 순간 제 무의식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던 오래된 로망이 의식 위로 떠올려졌습니다. 아늑한 집, 자상한 남편, 건강하고 예쁜 아들, 그런 가족과 시간을 보내는 나. 글을 쓰는 나, 그림을 그리는 나, 뭐든 할 수 있는 나... 네, 그랬어요. 지금의 나는 언젠가의 내가 그토록 꿈꾸었던 로망 그 자체더라고요. 그걸 지금 인식했다는 게 이상하리만큼 지금의 저는 언젠가의 제가 원했던 대로 살고 있었죠.
갑자기 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지면서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그리고 고된 육아로 잠시 잊고 있었던 ‘현재의 내 로망’들이 하나, 둘 생각나기 시작했죠. 현재의 나로서, 단우의 엄마로서, 남편의 와이프로서 하고 싶었던 일들, 꿈꾸었던 일들 말이죠.
단우가 태어나기 전 여행 유튜브를 보다 메모했었다던 여행리스트 외에도 ‘아이와 해보고 싶은 것’이라는 엄마로서의 로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워낙 공상하기를 즐겼던 저였기에 엄마가 된 지금이라고 해서 그런 로망이 없을 수가 없었죠. 자연씨도 아마 저랑 비슷하시겠죠? 세계 곳곳을 여행하셨던 자연씨라면 넓고도 세세한 추억들을 미엘이와 공유하고 싶은 마음이 아주 클 것 같거든요.
아이랑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해가며 소중한 추억을 쌓아가는 것. 저는 이런 로망들이 앞으로 우리 인생의 북극성이 되어주리라 생각합니다. 나에게는 이러한 로망들이 있고, 그 로망에는 언제나 가족이 있으니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과 함께하는 선택을 할 것이라는 믿음에서죠.
자연씨도 잘 아시듯 최근까지 저희 부부가 힘든 시기를 겪었잖아요. 로망을 품고 계획한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가혹한 현실을 견뎌야만 했죠. 태어난 지 6개월밖에 안 된 단우를 침대 눕혀놓고 남편과 한참을 울기도 하고, 베란다에 서서 몇 시간 동안 영하의 겨울바람을 맞으며 서 있기도 했었죠. 로망은 트라우마로 변해 버리고 삶은 엉킨 실타래처럼 어렵기만 했던 그 시기를 저는 가슴에 품은 로망들로 버틴 것 같습니다.
명확한 해답은 없었죠. 하지만 ‘어떻게 살고 싶은가?’에 대한 질문과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생각할 수 있었던 저는 남편에게 편지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렵더라도 작은 소망들을 하나씩 이뤄가며 살아가자, 우리의 북극성을 따라가자. 그렇게 살다 보면 어느새 우리가 꿈꾸는 삶에 가까워져 있을거야, 라고요. 역시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겠죠. 그런 마음으로 살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정말이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태였는데 많은 것들이 종결되었고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것을 잃지 않은 상태로 현재에 이르렀습니다. ‘로망은 어떻게 실현해야 하는가?’에 대한 교훈도 함께요. (이 주제는 언젠가 자연씨와 술 한잔 하게 되면 또 나눠보겠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다시 ‘현재의 로망’으로 돌아가면... 현재 저의 북극성은 이런 로망들로 이뤄져 있답니다.
- 눈오는 날 눈밭에 누워서 스노우엔젤 만들기(단우가 만들어낸 스노우엔젤 얼마나 귀여울까요. 사진으로 남겨서 평생 간직하며 보려고요.)
- 비오는 날 우비에 장화 신고 숲길 걷기
야외에서 같이 풍경 그림 그리기(단우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으면 좋겠네요.)
- 천문대가서 천체망원경으로 별 보기(이 로망 때문에 저희 집 책장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꽂혀 있습니다.)
- 완공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보러 가기
- 다 같이 오케스트라 공연 보기(1부만 보고 나오더라도 OK. 만약 2부까지 보게 되면 다 같이 오스트리아에서 공연 보기)
- 여름에 겨울인 나라 여행하기(자연씨가 추천한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도 좋을 것 같아요.)
- 캐나다 횡단열차 타기, 벤프 국립공원 트래킹하기(체력을 많이 길러야할 것 같습니다.)
- 하와이에서 스노클링 하기(수영을 제대로 배워둬야 할 것 같습니다.)
- 하와이/스위스에서 한 달 살며 글쓰기(경비를 많이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로라 투어하기. 핀란드 로바니에미에서 원조 산타클로스 만나고 사우나 실컷 하기.(10년 후 지구의 기후는 우리의 오로라 투어를 허락할까요?)
- 남편과 단둘이 유럽 여행가기.(단우가 성인이 될 무렵, 육아 해방 기념 여행이 되겠네요.)
이렇게 써놓고 보니 단우의 성장 시기에 따라 정리해봐도 재밌을 것 같아요. 보시다시피 ‘비오는 날 우비에 장화 신고 숲길 걷기’처럼 날씨와 컨디션만 허락된다면 곧 실현 가능한 로망도 있고, ‘남편과 단둘이 유럽여행’처럼 아주 훗날에 가능할 것 같은 로망도 있습니다. 또, 여기엔 쓰지 않았지만 우리가 서신으로 나눴던 작가로서의 로망, 이를테면 ‘나의 작업실 갖기’ 같은 로망도 앞으로 더 채워지겠죠.
신나게 놀 궁리, 행복할 궁리로 채우는 삶은 그 과정마저도 추억이 될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이 로망들을 실현하기 위해선 돈, 시간, 노력이 필요하니 지금부터 구체적인 궁리를 하면서 살아야겠네요. 돈도 모으고, 열심히 운동도 하고, 시간도 마련하면서요. 그 과정에서 자연씨의 가족과도 함께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껏 그래왔듯이 말이에요.
로망 수집가
가영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