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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다인 Oct 26. 2024

우리의 Good old days by.자연

언니,      


요즘 아파트 엘리베이터 교체 공사 중이라 아기띠로 미엘을 안고 양 어깨에 어린이집 등원가방과 제 가방을 짊어진채로 7층 계단을 하루에도 몇 번씩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꽤 딱한지 마주치는 분들마다 “아이고, 애기 엄마가 고생이네”하시며 안타까워하십니다. 사실 엘리베이터 문짝에 운행중지를 예고하는 공지가 붙은 이후로 하루하루 쫄리는 기분이긴 했습니다. ‘무료배송 금액에 맞춰 가득가득 장을 보는 새벽배송 박스들은 무슨 수로 갖고 올라오지.. 요즘 가게준비하면서 택배도 자주 시키는데 어쩐담.. 애 등원도 시켜야 하는데 유모차를 1층에 둘 수도 없고..’ 하면서요. 그런데 웬 걸, 오히려 전에 없던 튼튼한 활력이 도는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정도의 운동은 하고 사는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숨이 살짝 가빠지고 땀범벅이 된 상태로 집에 도착해서 물을 벌컥벌컥 들이키고나면 개운하기 짝이 없습니다. 미엘도 저와 함께 계단을 오르는 걸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아기띠 힙시트에 앉아서 들썩들썩 계단을 오르는 느낌이 즐거운가보다 했는데, 가만보니 제가 숨이 차서 헉헉거리는 소리를 재밌어하는 눈치입니다. 며칠 전부터는 자기도 따라서 헵헵 소리를 내며 구령을 맞춰주거든요. 덕분에 계단을 오를때마다 많이 웃습니다. 어제는 아기띠에 묶여 저와 하나가 된 아기의 조막만한 양손을 깍지끼어 꼭 잡고 함께 구령을 맞추며 계단을 오르며 5층 쯤 도착했는데 마침 열린 복도 창문으로 부드럽고 시원한 바람이 후욱 불어왔습니다. “우와, 시원하지? 가을 바람이야!” 미엘은 바람을 잡으려는 듯 손을 휘저으며 깔깔 웃었어요. 그 순간 눈물이 핑 돌더라구요. ‘내가 나중에 이 순간을 얼마나 많이 그리워하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런 마음은 저에겐 꽤 낯선 종류의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딱히 어떤 걸 그리워 할 생각에 미리 울적해졌던 적은 없었거든요. 돌이켜보면 지난 날의 전 현재를 아낌없이 소비하면서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설렘과 기대로 충전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직업상 하루하루가 다이나믹하다보니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것 같기도 해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런 식이기는 합니다. 현재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이 쉽게 되는 편이에요. (크루즈 일을 하면서 워낙에 잦은 만남과 이별에 익숙해지다보니 방어기제가 그런 식으로 작동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랫동안 차곡차곡 연락하며 챙기고 있는 친구들이 아주 많지는 않습니다만 십 수년만에 만난다고해도 마치 어제 만났던 것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또다시 ‘지금의 우리’로 이어지는 관계가 되곤 합니다.

     

그런데 임신을 한 순간부터 자꾸 옛날 생각이 하나 둘 씩 올라오기 시작하더라구요. 도전하지 못했던 일, 선택하지 않았던 길에 대한 뒤늦은 호기심과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으로 시작되는 공상들.. 특히 신생아 육아 시절에는 내 몸이 온전히 내 것이기만 했던 때가 참 그리웠어요. 낮에는 좋아하고 잘 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벌고, 밤에는 나만의 공간에서 좋아하는 책을 늦게까지 읽다가 내키면 와인이든 맥주든 한 잔 마시기도 하고, 몸이 원하는 만큼의 충분한 수면시간을 채울 수 있었던 그 시절이요. 그땐 하루하루를 그저 버티는 기분이다보니 딱히 미래가 기대되지도 않았습니다. 과거의 제 모습이 자꾸만 찬란해보였죠. 그런데 이상하죠. 엄마 노릇을 일 년 넘게 하고 나니 이젠 또 시간이 가는게 너무 아쉽습니다. ‘지금’을 붙잡아 어디 도망가지 못하게 꼭꼭 접어서 호주머니에 넣어두고 싶은 그런 마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어요. 미엘이 제 등 뒤에 숨어 작은 손으로 저를 팡팡 치며 깔깔 웃을 때, 미엘를 목욕시키면서 노래를 흥얼거리는 남편의 뒷모습을 볼 때, ‘마마!’하고 부르며 달려와서 안기는 작은 몸을 덥석 안을 때, 함께 구령을 맞추며 7층 계단을 오를 때 특히 그렇습니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좋았던 옛 시절’을 회상하며 그리워하거나 과거의 사진을 보며 시간을 보내는 일은 거의 없네요. 미래를 계획하는 것도 다시금 즐거워졌습니다. 그 중심엔 당연히 미엘이 있구요.     

 

아기와 함께 하는 로망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고 했었죠. 문득 로망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궁금해졌습니다. (지난 서신에서 제가 호기심이 강한 편이 아니라고는 했지만, 단어의 어원이나 유래는 늘 궁금해하고 찾아보는 사람이기는 합니다) 아무래도 영어의 romance와 관련 있겠지 싶은데 우리가 쓰는 문맥에서의 로망은 꿈, 소망 같은 것이잖아요? 그래서 인터넷에 한번 쳐봤더니 이런 흥미로운 답변을 달아놓은 사람이 있네요.      


 로망은 불어에서의 roman이나 영어에서의 romance 어원상 관련이 있습니다만그보다는 국어에서 "낭만 (浪漫)"에 해당하는 일본어의 浪漫 [ろうまん]의 발음 "-"이 차용되어 유행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봐야할 것 같습니다다음과 같이 "낭만 (浪漫)"이란 단어 자체가 불어의 roman이 일본어에 차용되어 발음을 딴 일본식 한자조어인 浪漫[-]으로 만들어진 이후 우리말로 받아들여진 표현입니다.     


꽤 설득력 있는 설명이지 않나요? 낭만. 제가 좋아하는 단어이기도 하구요. 제가 꿈꾸는 미엘과의 낭만은 어떤 것일까, 머릿속으로 한 번 상상해봅니다. 가장 먼저 그려지는 이미지는 초등학생이 된 미엘과 함께 길을 걷고 있는 모습이에요. 구체적으로는 하교 후 수영 강습을 마치고 나온 아이를 데리고 집에 가는 길입니다. 머리가 아직 젖어있는 아이의 말랑한 손을 잡고 봄내음이 나는 오후 햇살이 좋은 거리를 재잘재잘 떠들며 함께 걷고 있어요. 상상만 해도 행복합니다. 사거리를 건너기 전에 길 건너 분식 집에 들러 떡볶이를 나눠먹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 양념 범벅 떡볶이라니. 그런 걸 나눠먹는 날이 정말 금방 올까 싶군요.      


또 다른 낭만을 상상해봅니다. 이번에는 어떤 나라의 지방 소도시를 여행하고 있어요. 왠지 러시아의 어느 시골 동네처럼 언어가 아예 통하지 않는 곳이면 더 재밌을 것 같습니다. 와이파이 같은 것도 없는 곳이라면 더할 나위 없겠구요. 낯선 그 곳의 거리를 익숙한 손을 잡고 걷는거에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가리키며 신기해하고 별 것 아닌 것에 깔깔 웃으면서요. 다리가 아파오고 허기가 질 때 쯤 식당에 들어가 이해하지 못할 메뉴판에서 가장 그럴 듯 해보이는 음식을 주문해서 천천히 먹으며 각자의 시선으로 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저희 셋의 모습을 그려보니 정말 재밌겠다 싶습니다.    

  

사실 방금 언급한 여행은 2013년에 동생과 다녀온 노르망디 해변도시 에트르타(Etretat)에서의 기억을 바탕으로 상상해본 것입니다. 프랑스에서 일주일을 머무르는 동안 1박 2일로 후딱 다녀온 여행 속 여행이었는데 도착하자마자 1박만 예약한 걸 후회했습니다. 마을과 자갈해변과 절벽과 홍합요리와 와인이 있었고 호텔 직원이 와이파이를 ‘위피’라고 발음했던게 생각나네요. 언니도 분명히 좋아하실 것 같은 여행지에요. 모네 그림에 등장하는 코끼리 절벽을 볼 수 있는 곳이거든요. 넷플릭스 시리즈 <뤼팽> 시즌1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배경도 바로 에트르타의 그 해변가였는데 무려 10년 전 기억 속의 장소들이 그날의 공기와 냄새까지 너무 생생하게 오버랩되어서 놀라웠습니다. 에트르타는 저의 해피 플레이스랍니다. 언젠가 언니도 꼭 가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다시 이야기하자면 저의 로망 중 하나는 미엘과 함께 에트르타에 가는 것이네요. 에트르타에 간 김에 유럽 크루즈를 하고 돌아오면 딱 좋겠습니다. 영국에서 출발해 프랑스를 찍고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거쳐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 쪽을 돌고 오는 약 2주 정도의 멋진 코스가 있거든요. 미엘과 함께 하는 크루징은 단연 저의 로망이자 낭만의 핵심입니다. 저의 첫 직장이었고, 남편을 만난 곳이었고, 한국에 정착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잊어본 적이 없거든요. 미엘의 태명이 ‘바다’였던 이유입니다. 지금도 마음이 어수선하거나 잠이 오지 않을 땐 눈을 감고 배 안의 작은 캐빈의 벙커침대에 누워있는 상상을 합니다. 왠지 모르게 살짝씩 흔들리는 느낌에 (실제로 날씨가 궂은 날에는 덜컹거리며 흔들리기도 합니다만) 마치 요람에 누운 아기처럼 잠에 빠져들곤 했거든요. 미엘이 세 돌이 되면 싱가폴에서 출항하는 동남아 크루즈부터 시작해볼 예정입니다. 만 3세가 되어야 크루즈 안에서 운영하는 키즈클럽에 보낼 수가 있거든요. 우리 꼭 같이 가요! 애들은 키즈클럽에 등원(?)시킨 뒤 저희는 미모사에 브런치를 즐기고 선데크에 자리를 잡고 누워 태닝도 하고 책도 읽는거죠. 앞으로 2년 동안 이런 달콤한 유혹으로 언니를 꾀어내어 저희의 싱가폴행에 조인시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제 상상 속의 미엘과의 낭만을 이야기하자면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읽으면서 느끼셨을 수 있겠지만 저는 상상을 꽤 구체적으로 하는 편이라 ‘같이 떡볶이 먹기’ ‘에트르타 여행가기’ ‘크루즈 타기’같은 요약형 리스트는 도무지 성에 차지 않거든요. 어렸을 땐 제가 상상을 했던 건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인지 헷갈렸던 적도 몇 번 있었습니다. 아, 며칠 전엔 조금 서먹해진 오랜 친구에게 먼저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 공상을 또 아주 구체적으로 하며 걷다가 중심을 잃고 아스팔트 바닥에 엎어져 무릎을 해먹었습니다. 아기띠로 미엘을 안고 걷고있던 상황이라 아이가 다치지 않게 희한한 자세로 넘어지다보니 더 심하게 다친 것 같습니다. 그날 언니도 손가락을 다치셨다고 하셨는데 지금은 좀 나아졌는지 궁금하네요. 손가락이나 입술은 아주 작은 상처라도 유난히 아픈 것 같습니다. 촉각의 최전방에 있으니까요. 모쪼록 언니의 손가락도, 저의 무릎도 잘 아물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아, 지난 편지에서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미엘은 어린이집 적응을 완료했습니다. 3주차 화요일부터 울지 않고 놀더니 이젠 도착하면 선생님께 가겠다며 양 팔을 쫙 뻗고, 현관 앞에서 헤어질 때도 태연하게 손을 흔듭니다. 신통방통하다는 말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표현인가 싶습니다. 선생님께서 알림장에 첨부해주시는 사진들에 보이는 각종 활동들과 신나서 웃고있는 미엘의 얼굴을 보니 그동안 집에서 심심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뭐가 됐든 적응해줘서 다행이에요. 가게 공사가 한창이고 오픈이 얼마 안남았는데 미엘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정말 난감할 뻔 했거든요. 하루의 여섯 시간을 온전히 저희의 프로젝트에 쏟을 수 있다는 건 정말 꿈만 같습니다. 미엘이 생전 처음으로 저희와 떨어져 있는 시간을 최선을 다해 받아들여준 만큼 그 시간을 최대한 귀하게 쓰려고 노력중입니다. 계획보다 한참 지연되고 있는 가게 공사, 사업 시작을 위한 여러 가지 행정적인 일처리, 쿠킹클래스 기획과 홍보, 소셜미디어 관리, 언니와의 글쓰기, 제 자신과의 글쓰기, 그 와중에 하고 싶어서 덤빈 비즈니스 크루 독서모임 등등.. 할 일이 산더미라 여태 미엘을 등원시킨 뒤 여유롭게 늘어져 낮잠을 자거나 남편과 밀린 데이트를 하러 놀러갈 기회도 없었지만 행복한 요즘입니다. 그러니까 언니, 얼른 단우를 어린이집에 보내십시오. 저와 함께 자유를 즐기잔 말입니다. 한라산 영실코스를 다녀오잔 말입니다!      

그나저나 언니, 이번 서신은 역대급 지각입니다. 첫 단락에서 언급했던 아파트 엘리베이터 공사는 이미 이틀 전에 끝나 순조롭게 운행중입니다. 한마디로 엘리베이터 교체 공사보다 더 오래 걸린 이번 글입니다. 더불어 길고 길었던 저희 쿠킹스튜디오 공간 준비도 어찌어찌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여름만큼은 아직 한창인 것 같네요. 제가 글을 마쳐야 진짜 가을이 올 것 같은 기분입니다. 다음 서신은 좀 더 탄력있게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상상만으로 이미 즐거워진

새벽 두 시의 자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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