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a woman loves a man.
귀갓길 지하철. 길고 긴 하루 동안 제 할 일 실컷 하고 깊은 밤이 되어서야 마침내 의무방어적으로 시편 45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저녁에는 친구들과 걸쭉한 라멘을 먹었고, 아이스 달고나 라테를 마셨고, 대화에 관해, 오해 없이 대화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에 관해 한바탕 떠들었다.
시편 45편은 어느 나라의 임금님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본문만 봐서는 거기에 어떤 비유와 상징이 숨어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아직 내 수준에서는 주석서를 봐야 하는 본문인 것 같았다. 다만 문학적으로 아름다운 문장들이라고 느낄 수는 있었다. 이 본문의 기자가 노래하는 하나님과,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신앙이 너무나도 인격적인 것 같았다.
말씀을 묵상하면서 신앙은 지성과 감성, 영성 등이 융합된 것일 테지만, 결국 본질적으로는 사랑이겠구나, 신앙은 궁극적으로 어쩔 도리 없이 전인격적인 것이겠구나 하고 느꼈다. 그럼. 그렇겠지. 신앙의 본질은 결국 인격적인 것일 수밖에 없겠지. 그건 시인의 상상력에 붉은 피를 펌프질 하는 심장과도 같고, 문학을 살아 숨 쉬게 하는 허파와도 같은 것일 테지.
나는 지금 지하철 가장 뒷칸 출입문 바로 앞 오른쪽, 안티 바이러스 코팅 테이프가 부착돼 있는 철 손잡이에 기대 있다. 그리고 바로 옆, 그러니까 한 발짝 바로 왼쪽에는 삼십 대 중반 이상으로 보이는 커플(남자는 사십 대 초중반 정도. 그러니까 철없이, 대책 없이 서로에게 빠져들 만한 나이의 커플은 아닌 것이 된다.)이 기관사실과 객실을 구분하는 벽에 기대어 꼭 서로에게 붙어 있다. 부끄럽고 수줍은 것은 나다. 그들은 서로에게 빠져 있어 부끄럽지 않다.
둘은 몸을 베베 꼬며 소곤거리고, 실실 웃고, 부둥켜안는다. 별로 대단할 것 없는, 심야 시간대에 깊은 사랑에 빠져 있는 커플이라면 흔히 보일 수 있는, 자연스럽고 사랑스러운 스킨십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모습이 어색해 보였던 것은 나의 선입견 때문일 것이다. 보통 이 정도의 커플 바이브는 이십 대 초중반 쯤이 많이 보이는 자태인데, 그들은 삼십 대 중반에서 사십 대 정도로 보이는 연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은 농염해 보이기도 했고, 생경해 보이기도 했다. 그것은 아무튼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너무 당연한 추론이지만 둘은 서로 많이 좋아한다. 그렇지 않고서 삼십 대 중반 이상의 커플이 승객 밀도가 퍽 높은 심야 귀가 지하철에서 이런 제스처를 취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문장들을 쓰는 동안에도 여자는 벽을 등지고 나를 향해 서서 남자를 폭 안고 있다. 남자를 안고 나를 바라본다. 그들을 바라보지 못하는 것은 나다. 정말 당당히 시선 한 번을 못 주겠다.
남의 커플들을 보며 애욕일까 사랑일까를 굳이 나누려고 하는 것은 좋은 습관이 아닐 테지만, 어쨌든 난 애써 그것을 구분하려는 못된 이분법적 사고 습관을 갖고 있다. 힐긋힐긋 보았을 때 느껴지는 바 여자는 아름다웠다. 외모가 아니라 그녀의 기운 같은 것이 충분히 아름다웠다. 마스크 위에 걸려있는 눈빛이 아롱아롱했다. 남자에게 빠져있는 모습이 오래된 음식처럼 상해있는 것 같지도 않았고, 너무 설익은 풋과일 같지도 않았다. 아삭아삭 씹히는 신선한 샐러드 같았다. 남자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 한 여자의 진심으로써 충분히 건전한 사랑이라 도장 찍고 싶어 졌다. 사랑에 건전함이란 꾸밈이 적절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에 관해 많이 고민했다. 근본주의적인(보수적인) 신학 진영에서는 영혼과 물질과 건강의 전인적인 축복을 말하지만 실은 세속의 물질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몸의 치유에는 관심이 많지만 몸의 해방에는 관심이 거의 없다. 구원관은 영혼에 관한 것, 내세에 관한 것에 머무르는 편이다. 그들이 좋아하는 내러티브는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 가나안 복지 귀한 성에 들어가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 이야기, 또는 소위 목욕탕식 구원론(가톨릭의 교회주의적 구원론)과도 어딘가 닮은 부분이 있다. 무언가로부터 구별되고 구원받아 어딘가로 쏙 들어가는 것이다.
진보적인 신학 진영에서는 신앙을 개별자의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것으로 본다. 하나님의 나라를 하늘에서 땅으로 끌어내려온다. 그들의 신앙은 삶의 구원, 그러니까 육체의 구원과 이 땅에서의 정치적인 해방liberation에 많은 무게중심을 둔다. 대체로 지성적인 연구 작업도 활발하고 정치적, 신학적 관점도 날카롭다. 하지만 그들은 가슴(하나님을 항한 사랑과 정념)이 차갑다는 지적을 받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내러티브는 출애굽 이야기(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노예의 상황에서 해방시키신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 대부분의 구약학자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내러티브로 꼽는다고 함.)다.
사실 신학을 이해함에 있어 보수와 진보 진영 따위 꼭 알 필요는 없다. 하지만 중심을 잡아가기 위해 이쪽저쪽 시소의 끝에 타보는 것은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다. 신앙에 관해 말하면서 굳이 진영 논리를 꺼내본 것은 이쪽도 저쪽도 아닌, 이 모든 것 밖에 있는 자유로운 무언가가 지하철 커플에게서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사회적 경직성으로부터 자유로워 보였다. 이 지하철 칸에서 그들만 어떤 통념적인 분류법 밖에 있는 사람들 같았다.
싫어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지만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없다고 한다. 사랑을 하면서 조건이 너무 명확해도 문제다. 또 너무 예의가 발라도 문제다. 왜 그런지도 모르게 사랑하고, 지하철에서도 어찌할 수 없이 서로에게 몰두하고, 쓰다듬고, 숨길 수 없이 서로를 추구하는 것. 그토록 전인격적인 집착이야말로 숭고한 사랑과 신앙의 특성이 아닐까, 생각되었다.
그들은 더 이상 우리와 같은 지하철 승객이 아니었다. 서로를 사랑하는 순간, 이미 지하철과, 정치와, 사회 밖에 있는 영혼들이었다. 그들은 일순간 나를 초라하게 만들어 버렸다. 사랑도 모르는 천치로, 그토록 진하디 진한 사랑도 한번 못해본 머저리로 만들어 버렸다.
신앙은 지성적인 이해와, 감성적인 공감, 영적인 교감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신앙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애달픈 사랑이다. 무디고 유약한 자기만족적 사랑이 아니라 모든 두려움을 잊도록 하는, 결연하고 비범한 자기 초월적 사랑인 것이다. 또 그것은 공동체적 관심과 희생적인 실천을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그것들 중 무엇도 서로 분리되고 구분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교회와 신학의 현실은 구분될 수 없는 것을 구분하여 진영 논리에 빠져 서로의 장점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상황 같다. 사랑에 빠진 커플이 어떤 것을 추구하든 그들은 본질적으로 옳다. 신앙인도 뒤뚱뒤뚱하며 하나님을 ‘자기애’적으로 애집하기도 하고 ‘자기의’적으로 신봉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거의 모두 옳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을 향해 가는 여행이라면 말이다.
계속 동어를 반복하고 있지만. 신앙의 본질은 사랑일 것이다. 자폐적 공동체 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활짝 개방되어 있는 사랑. 현실도피적 영성 주의가 아닌, 현실 속으로 들어가 무언가 새로운 행동을 감행하는, 용기 있는 사랑. 신약 성서가 하나님을 그렇게 정의하고 있듯(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을 믿는 자도 모두 사랑이다. 사랑을 사랑하는 자도 모두 사랑이다. 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은 순수한 결정체가 된다. 그는 자신을 전인격적으로 대상에게 내던져버리게 된다.
신앙의 본질은 그 지하철 커플의 모습과 그렇게 많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우리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우리는 같은 역에서 내렸다. 그리고 너무나 다른 길로 갈라져 멀어져 갔다. 글쎄. 그들이 어디를 향해 갔든 나는 이미 그들을 지지하기로 마음먹었다. 호텔에 갔든, 통풍이 잘 안 되는 남자의 자취방에 갔든 사실 뭐가 그렇게 중요하랴. 나는 일체의 몸짓을 아름답게 봤다. 폭 끌어안고 푹 빠져있던 여자의 눈빛을 오래도록 지켜볼 수 없어서 안타까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