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를 돌리며

by jungsin



새벽 5시에 셀프 빨래를 하러 오니 당연히 아무도 없다. 지나가며 저기서 빨래하는 젊은 청년들, 어딘지 낭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여기서 빨래를 하며 앉아있게 될 줄 몰랐다.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 패러디. 맞다. 어제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첫눈이 왔고. 늦은 가을, 이른 새벽. 노이즈 캔슬링 무선 이어폰으로, Elly Ameling이 부른 멘델스존의 노래의 날개 위에를 반복 재생으로 듣고 있다. 세탁이 한 20여 분, 건조가 32분, 그러니까 대략 1시간이면 무겁고 지저분한 빨래들이 나름대로 깨끗해지고 바싹 말라서 나올 것이다.


세 개의 큰 빨래 가방에 뜨거운 커피를 담은 텀블러 두 개를 던져 넣고서 야반도주하는 사람처럼 메고 왔다. 집에서 800미터 거리의 이곳까지. 잠옷에 검은 재킷 차림으로. 스타벅스 오늘의 커피 케냐, 투샷 추가에 물을 약간 더 넣은 커피를 주전자에 데워와서 텀블러로 홀짝홀짝 마시는 맛이 꽤 유사한 행복감을 준다.


이런 기분들이 나쁘지 않다. 비전도 없고 희망도 없고 오직 죽고 싶지만, 이런 기분들이 나쁘지 않다. 어렸을 적 일요일 아침에(여기선 주일이라고 해선 기분이 안 난다. 일요일이라고 해야 한다.) 목욕을 마치고 작은 목욕탕 홀 대청마루 같은 곳에 걸터앉아 귀한 바나나 우유를 구멍이 좁은 빨대로 마시며 파일럿과 스튜어디스가 나오는 일요 아침 드라마를 볼 때의 상쾌하고 설레면서도 안락한 기분이 나를 관통해 지나가는데, 연유를 알 수 없다. 지금 내가 그런 기분일 리가 없는데 말이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와 같은 마음일까. 다시 일요일 아침에 쾌남 스킨을 진하게 바르고 목욕탕 홀에 걸어 앉아 바나나 우유에 빨대를 꼽아서 마셔 보고도 싶고, 원더스트럭 영문판 그림책도 읽어보고 싶고, 어디 시골에 틀어박혀 오싹하고 사랑스럽고 재밌는 이야기들도 쓰고 싶은데, 제일 좋은 것은, 그 모든 것에 굿바이를 고하고 안식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한 깨끗이 빨래가 된 바싹 마른 옷도 입어야 하고, 매력적인 머스크 향기가 나는 향수도 뿌려야 하고, 깊은 대화도 해야 한다. 살아있는 한 삶에 대한 애착을 버릴 수 없다. 그런 내가 싫고, 밉다. 내가 나쁘다.


인생이 정말 짧다. 오래전 신대원을 다닐 때는 공강 시간에 혼자 도서관에 앉아 오후 세시에 하는 정세진 아나운서의 노래의 날개 위에라는 클래식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으며 삶의 나긋하고 안락한 느낌에 빠져들기도 했었고, 고등학교 때는 미친 듯이 달리며 축구를 하며 인생을 불태우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는데. 모두 아니다. 이토록 짧은 삶에는 그런 게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정도 길이와 부피의 삶이라면 그냥 사랑하고 꿈꾸고, 하얀 쌍방울 속옷만 입고 스페인 토마토 축제의 파티원이 되어 처음 보는 사람들과 마주 보며 미친 사람처럼 웃다가, 엉엉 울다가, 어느 날인가 그냥 홀연히 가버리는 것이, 그 정도의 질량이 적합하다.


파자마를 입고 커피를 마시며, 곱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부르는 가곡을 들으며,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을 마구 써나가고 있지만, 이 셀프 빨래방에서 느끼는 작은 온기도 온전한 내 것은 아니다. 난 이제 한 이십 분 후면 처음과 달리 이곳이 외롭고 춥게 느껴질 것이고. 그러면 도망치듯 이곳을 빠져나갈 것이다. 여긴 확실히 내가 머물 곳이 아니다. 우리 집이 아니다.


계절은 거짓말처럼 흘러, 어느덧 공기가 차고 옷이 축축해지는 날들이 다가오고 있다. 낮에도 햇볕이 별로 없고 으스스한 계절이 오고 있다. 아무리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고, 아무리 세탁과 건조를 하고, 아무리 마음을 써내려 가도, 마음이 바싹 마르지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계절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다. 몸을 노곤하게 녹이는 따스한 햇볕이 얼어붙어 버렸다.


빨래 건조가 다 됐다. 불안한 집에 돌아갈 시간이다. 안식과 고향, 집. 자유, 따스한 볕. 그런 것이 없이 살아가는 노매드 라이프. 이 유목민의 삶을 완전히 끝내고 싶은데. 이제 영원한 고향이 아니라면 이 땅에서는 완전히 편안하고 안락한 공간도, 시간도 없을 것 같다. 온 세상이 빨래방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