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빵 봉투를 찾아서.
세가지 사건이 있었다. 우선 카드 지갑을 잃어버렸고, 스터디카페 1일 1음료 이용권을 사용하지 못했다. 그리고 일단의 자매들이 지하철에서 파리바게트 빵 봉투를 잃어버리도록 방조했다.
나만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나만 그럴 것이다. 내 인생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매일 수많은 사건들이 일어난다. 그렇게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 바쁜 일상이어서 모든 경험들을 글로 쓸 수는 없다. 하지만 꼭 오늘의 일들은 글로 써보고 싶었다. 그것은 우선 상실감에 대한 보상 심리 때문이고, 두 번째로, 인생에 있어 상실감이란 것이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늘 속수무책으로 속상해 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삶에서 피할 수 없는 크고 작은 상실의 경험의 본질적인 의미에 대해 이해하고,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상실감에 대한 보상 심리란 김영하 작가나 박완서, 또는 은유 작가 중에 누군가, 혹은 그 셋이 모두 했던 말과 비슷한 생각인데. 그들 중 누군가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인생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나거나 누군가 자신에게 못되게 대하면 ‘오호. 좋아. 그럼 이제 내가 이 일들에 대해, 그 사람에 대해 글로 다 써버리겠어.’ 하는 생각을 떠올리며 속으로 참고 넘긴다는 것이다.
나도 상실과 관련된 경험들을 글로 쓰고, 또 고맙게도 누군가가 읽어주면, 상실감과 후회 때문에 강박적으로 굳어버린 감정의 응어리가 좀 풀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마음이 좀 더 또렷이 보이고, 그렇게 이해되지 않던 마음이 조금이라도 이해되며, 이토록 이상한 혼란스러움을 잘 넘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주저리주저리 글을 써보려 한다.
i) 우선 첫째로 카드 지갑을 잃어버린 사건. 오늘 경험한 상실 중에서 가장 크고도 가장 모호성이 없는 사건이다.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꽤 오랜 시간을 그것을 찾는데 할애했지만, 신기하게도 세 가지 사건 중 이 사건에 대해 가장 불편한 감정이 적은 편이었다. 카드 지갑 안에는 토스 체크카드와 최소한 수 만원에서 십만 원 이상이 남아있을지도 모를 교보문고 기프트카드, 커피빈 아메리카노 쿠폰 두장, 그리고 운전면허증이 있었다. 아마 내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못 찾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난 오늘 카드지갑에 관한 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따라서 후회가 없고, 이런 경우 불편한 감정이 그렇게 크지 않다. 돈은 노동으로 벌거나 투자로 벌면 된다. 아깝지만 할 수 없는 일. 난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쿨한 사람인가 보다. 이러한 쿨함에는 자존감과 마음의 여유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난 마음의 부자, 존재의 부자다. 이러한 사실을 느끼는 사람들이 나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보통 나보다 마음이 가난하고 예민하다. 그런 관계 구도를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소모적인 관계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나보다 마음이 넓고 풍요로운 영혼에게 끌림을 느끼고 그런 사람들을 만나 쉬고 싶어하는 나약한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튼, 내 영혼의 풍요로움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글을 통해 관심을 해소하길 바라고. 그리고 오늘 일은 난 몰라요. 나는 이제 내일 역학조사를 통해 몇 군데에 연락해서 카드지갑의 행방을 찾아보면 될 것이다. 누가 새 카드지갑과 교보문고 기프트카드가 탐나서 가져갔다면 기프트카드로 필요한 물건을 사거나 좋은 책을 읽기를, 그의 남은 생에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바란다.
ii) 그리고 둘째로, 1일 1음료 상실감. 이게 나에게는 참, 오묘하고 신비롭고 옹색한 감정인데. 이 감정적 사건이 이 글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내게는 중요한 사건이 된다. 난 이 일로 실제로 오후 이후 지속적으로 신경이 쓰여 불안하고 괴로웠으며, 지금도 괴롭다. 영어 시제로 하자면, 현재완료 진행형, have been V+ing다. ‘불안하다’나 ‘괴롭다’의 품사는 영어에서 동사가 아니지만, 동사로 쓰는 것이 더 어울릴 만큼 내 안에서 살아서 일하고 있다. 정말 늘 지극히 역동적인 활동을 하곤 하는 감정이다.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 그 후회와 죄책감과 미움, 증오. 그런 것들이 나를 괴롭힌다. 물론 이 스터디카페가 음료 맛집이기는 하다. 한 달 이용권을 끊으면 매일 제공되는 음료의 퀄리티가 여느 프랜차이즈 못지않게 괜찮은 편이다. 제조 음료 뿐 아니라 외국산 사과 탄산음료라든지, 몇 가지의 고급스러운 병음료를 선택해도 된다. 그러니까 물질적 가치로서 아까운 것도 있는 것이다. 거기까지는 일반적인 상실감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 내 감정이 그 일반적인 수준을 넘는 것 같다는 데 문제의 포인트가 있다. 그보다 더 궁극적인 상실감이 나를 괴롭힌다.
후회와 나 자신에 대한 원망, 그리고 불안감과 두려움 같은, 언어로 정확히 집어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다. 그토록 미묘한 것을 잃어버리고 나면 자꾸 혼잣말이 나오곤 한다. 도대체 난 왜 이렇게 작은 것들에 대해 집착하며 불안해하고 후회하는 걸까. 초등학교 중학교 무렵 세미나 줄리(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혼종 치와와였는데 두 마리 모두 잃어버렸다. 세미는 엄마, 줄리는 그녀의 딸이었다.)를 잃어버렸던 경험 때문일까.
그보다 훨씬 어렸을 때는 누나의 인형을 동네 형이 가지고 도망가서 울면서 쫓아가는 꿈을 꾸었던 기억이 있다. 혹은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꿈인지, 실제 경험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의 감정이 내 마음에서 너무나 인상 깊게 남아있는 것이다. 배가 아플 정도로 목 놓아 울고, 발을 동동 거리고, 애타 하면서,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놀이터까지 누나 인형을 들고 도망치는(그 상황을 즐기며. 약간은 야비하게.) 동네 형을 쫓아갔던 아련한 기억인데. 지금도 그때의 불안하고 무서웠던 감정이 내 안에서 복원되어 기억날 만큼, 강렬했던 유년의 악몽이다.
나는 왜 집에서 나오면서 스터디카페에 들리지 않고, 그럴 수 있었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었는데. 그러려고 했는데. 그러려던 생각을 잊어버리고. 굳이. 왜.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후인 12시를 넘어 서둘러 이곳에 왔을까. 인생의 신비다. 이런 내 거친 모습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직원. 그런 순간들이 너무 신비롭다.
iii) 오늘 경험한 세 번째 사건은 이러했다. 지하철 안에서 1일 1음료를 잃어버릴 상실감으로 불안에 떨고 있을 때, 무심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일단의 자매들이 밝게 웃고 수다를 떨며 내가 내릴 역 한 정거장 전에서 지하철 문 앞에 서 있는 장면을 보았다. 그런데 그 자매들 뒤편 의자 아래에 손잡이가 달린 파리바게트 종이봉투가 놓여있는 것이다. 아, 이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 봉투가 그 자매들 중 누군가의 것일지, 아니면 다른 승객이 두고 내린 것일지는 물론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빈 봉투일지, 쓰레기가 담겨 있을지, 무엇이 담겨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한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은 고작 10여 초 정도의 순간이었다. 난 1일 1음료로 불안에 떨고 있었고. 의자에서 일어나서 그 자매들에게 다가가 저 봉투가 자매님들의 것이냐고 물어볼 만큼의 정신적 에너지까지는 (아! 애매했지만) 부족했던 것이라고 할 수도 있는, 그렇지만 조금 큰 목소리로 저기요! 외칠 수도 있었던. 그런 미묘하고 모호한 상황. 아무튼 난 숨죽여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고. 그녀들은 문이 열리고 내렸다.
그리고 덩그러니 남아있는 빵 봉투. 제발 비어있어라. 그냥 봉투이어라. 그냥 종이 봉투여라. 바랐지만. 내가 내릴 역에 가까워 일어서서 그 빵 봉투 안을 슬그머니 보았을 때, 먹음직스러운 빵 몇 개-자매들이 좋아할 법한. 슈크림이라든지, 대학 때 강의실에서 여학생들이 딸기우유와 함께 먹을 법한 폭신폭신한 질감의- 빵들이 몇 개 고이 담겨있는 것을 보고 말았다.
불안했다. 난 이 빵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노원역에 내려서 역무실에 맡길 것인가. 노원역 행이었으니까, 곧 청소 아주머니들이 이 봉지를 줍지 않을까. 그러면 그 아주머니들이 분실센터에 맡기시거나. 아니면 고생하시는데 청소하시는 아주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인 대기실 방에 앉아 그분들이 드셔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내리려는데. 아. 이 때 내 옆쪽에 앉아 계셨던 등산복을 입은 아저씨가 빵 봉투 근처로 다가오신다. 더욱 격렬히 불안해진다.
아저씨가 그 봉투 안을 들여다보고 말았다. 이내 빵 봉투 주변에 서서 빵 봉투를 응시하시며 잠시 망설이시다가, 결국 봉투를 집어드신다. 열차가 멈추자 그대로 들고 내리신다. 신경 쓰지 말자. 신경 쓰지 말자. 신경을 안 쓰다. 신경을 쓰지 않다. 신경이 없다. 나에게는 신경이 없다.
신경을 안 쓴다는 것은 애초 나에게 불가능했다. 결국 계단 즈음에서 아저씨께 괜히 말을 걸었다. 아, 아까 어떤 여자분들이 그거 놓고 내리신 것 같더라고요. - 아, 그래요? 아 난 이거 버리면 어까우니까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서.. 하나 드릴까요? -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단호하게. 손사레치며.).
이렇게 되었다. 역무실에 맡기시면 그 여자분들이 혹시 찾아가지 않을까요? 라고 말하고 싶은 걸. 그 애매한 상황에서 굳이 내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이 맞을까 고민하며, 결국 또 비겁하게 침묵하고 외면했다. 애써 모른척 그렇게 스터디카페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하지만. 생각이 나서.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나서. 그 해맑게 웃고 떠들던 자매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서, 결국 마음에 밟혀... 되돌아 걸어가고 말았다. 그 아저씨가 걸어가시던 쪽으로 돌아가봤지만, 아저씨는 안 계시고. 어디에 있나요 아저씨. 울면서 빵 봉투 찾는 사람 처음 보시죠, 아아-저씨.
그렇게 난 스터디카페로 무거운 발걸음과 애매한 마음들을 안고 돌아왔고. 직원들은 모두 퇴근해 1일 1음료 권한을 잃어버렸고. 카드지갑도 잃어버렸고. 그렇게 이상한 상실감과 후회의 순간들이 계속되었던 긴 하루 끝에 난 넓은 가죽 의자에 앉아, 멍하니 초점 없는 눈동자로 앉아 있었다.
나가며) 상실의 본질은 무엇일까? 물론 이렇게 글을 써봐도 상실의 본질을 이해할 순 없었다. 본질은커녕 아직 아무것도 모르겠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고. 그냥 이런 느낌들이 너무 싫다. 글을 쓰면서 속상함과 불안함이 조금은 누그러들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 것도 아니다. 분명한 건 이런 순간들이 끊이지 않고 내 삶에서 이어져 왔다는 것, 그리고 이처럼 크고 작은 상실감이 나를 언제나 괴롭힌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은, 지극히 평화로워야 할 어떤 때조차 일어나지도 않은 상실의 감각 때문에 신경증적인 불안감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심지어는, 내가 아닌 남이, 주변의 누군가가 뭘 잃어버렸을 때조차 내가 다 속이 상하고 불안해지는 것을 느끼곤 한다는 것이다.
악취도 싫고, 배고픔도 싫고, 미움도 싫고, 누군가가 나의 시간이나 공간을 침범하는 것도 싫지만. 내가 아마 이 세상에서 아마 제일 싫어하는 것은,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것일 것이다. 상실하는 사건. 그것과 관련된 모든 불안한 감각들, 감정들이 나는 너무나 싫다. 반대로 그 모든 것의 반대되는 상황에서, 그러니까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가 찾았을 때, 나는 극치의 안도감과 안식, 기쁨과 환희를 느낀다. 그러니까 이와 관련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나의 안식은 상실과 관련된 감정이라는 점이다.
검고 윤기나는 털을 가진, 작은 강아지 줄리. 몇 일 동안 남의 집에 벌벌 떨던 그녀를 오성빌라 마당에서 되찾던 어느 평화로웠던 오후 한 낮의 날씨나, 주변 소리와 분위기의 느낌, 그때의 안도감을 지금도 기억한다. 저 멀리서 남의 손에 안겨 쫑쫑거리며 벌벌 떨고 있다가 마침내 나를 발견하고 달려오던 줄리를 안을 때의 안도감. 카드 지갑이나, 스터디카페 음료나, 빵 봉투. 어떤 물건을 잃어버렸다가 찾을 때의 그 안심되는 안락함. 내게 그러한 안식의 감각은, 진공 상태에서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상실감과 불안에 기대어 있는 것이다.
나에게 최고의 편안함과 가장 평화로운 안도감은 상실감과 대척점에 있는 감정이다. 상실이 없이는 안도감도 없다. 잃어버린다는 것, 그 불안하고 혼란스럽고 경악스러운 공포감에 대한 설명할 수 없다면 나의 안식을 설명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나의 안식에 대한 이해는 먼저 나의 독특한 상실감에 대한 진지하고 온전한 이해를 필요로 하는 것이리라 짐작할 수 있다.
거듭 말하지만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때 지극히 불안해하는 것처럼 나는 무언가를 찾았을 때 정말 기쁘고 편안한 안식을 느낀다. 그러한 때, 마치 구원의 감각과도 흡사한 꽉 찬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살면서 경험하는 수많은 상실과 불안으로부터 영원히 구원받고 싶다. 하루만,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는, 아무 것도 잃어버리거나, 죄책감을 느끼거나, 후회를 느낄 필요가 없는. 잃어버린 것과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을 찾아 뛰어다닐 필요가 없는. 완벽한 안도감의 시간 속에서 하루만, 살아보고 싶다.
그러한 시간 속에서, 따뜻한 지중해의 햇살을 받으며, 창밖에서 끝없이 부서지는 파도를 편안하게 바라보며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는 것이다. 내게 하나님 나라의 이미지는 그러한 마음과 관련이 깊다. 소중한 것들을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는 곳. 정말. 정말, 아무것도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