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 여기.
원더스트럭이라는 그림책을 중고 서점에서 처음 마주치게 되었다. 아동 외서 코너에서 얌전히 빛을 발하며 앉아 있는 그녀. 예쁘고 고급스럽긴 한데 플레인한 어린이 그림책일 것 같아서 실용성에서 걸렸다. 사놓기만 하고 안 읽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무심하게 지나쳤다.
한동안 그녀의 존재는 잊고 몇날 몇일이 지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문득 직감적으로, 지금 안 사면 평생 가지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거나, 지금 펼쳐 읽지 않으면 그 빛나는 종이 속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언제 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그 책이 나의 의식 한구석에 자리 잡고 생의 대기 전력을 빨아먹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나 다시 그 서점에 들르게 되었다. 그 아이, 아직 있을까. 두근두근. 뒷문 앞 아동 외서 코너를 지나는데, 놀랍게도 아직 그 자리에 어여쁘게 앉아 있었다. 이젠 데려 와야 했다. 꼭 내가 데려 와야 했다. 이렇게 옷소매를 앙증맞게 잡아 끄는 아이의 손길을 뿌리칠 순 없었다. 보화를 발견한 것처럼 얼른 집어들었다.
그리고 방에 가져다 두고. 또 한동안 다른 책들과 함께 쌓아둔 채 거의 펼쳐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한달 두달 시간이 흘렀고. 어느 주일날 이제는 읽어야겠다는 계시를 받고는(?) 다른 책 몇 권과 함께 에코백에 넣고 외출을 했다. 사실 집 밖으로 가지고 나가기는 무겁고 큰 부피였지만 이제 때가 되었다는 어떤 신비로운 기분에 휩싸여 약간 무리를 해서 갖고 나갔었다. 하지만 밖에서도 그 책을 펼쳐 볼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이런 저런 일들로 쉴틈 없이 바쁜 주일이었다. 지하철에서도 바빴고, 예배 전에 사람들과 먹을 만두와 분식을 사가거나, 그것들을 예배 시간에 커튼을 치고 몰래 먹거나, 카페에서 모임을 하거나, 기타 다른 일들을 언제나 하고 있었으므로 결국 펼쳐 보지 않았다. 호기롭게 가지고 나갔지만 나는 그 큰 벽돌을 에코백에 넣고 다니며 서울 시내를 누비기만 했다.
그렇게 늦은 밤이 되었다. 함께 선교를 갔던 동생이 커피를 마시고 싶다고 해서 카페에 같이 들어갔는데, 모임에서 라떼를 마셨지만 테이크아웃 커피값이 싸기도 하길래 좀 얻어마시려고 그냥 하나 더 달라고 해서, 원더스트럭이 들어있는 에코백 안 한 구석에 잘 끼워 담아 두었다. 잘 고정되어 끼워져 있으므로 문제가 없을 것이었다. 조심스럽게 에코백을 들고 버스도 타고 지하철도 티고 집에도 잘 들어왔다.
결말은 모두 예상하는 대로. 참혹했다. 집에 들어와서 무심코 책을 에코백에서 꺼내어 보는데, 책장 윗면이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찬란히 물들어 있었다. 도대체 언제 그랬던 거지? 아아는 돔리드에 담겨 있었던 것 같고, 커피가 넘치는 듯한 감각도 느끼지 못했는데. 원드스트럭이 원더하게도 곱게 커피로 물들어 있었다. 아직도 축축히 젖은 채, 위쪽 부분에 주글주글 엔틱한 주름이 져 가고 있었다.
이렇게 읽지도 않고 들고 다니기만 몇날 몇일 하다가 커피에 물든 책이 한권 두권, 우량주 주가처럼 꾸준히 우상향하며 늘어나고 있다. 어느덧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커피에 물든 책>이라는 제목으로 하나의 코너를 만들 수 있을 정도가 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스무살이었을 것이다. 어렴풋한 기억이기는 하지만, 당시에 타임지 정기구독을 잠깐 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성격상 전화 마켓팅을 거절하지 못해서이기도 했겠지만, 마켓팅 전화를 받지 않았더라도 마침 난 그때 타임지를 읽고 싶어했던 것 같다. 스무살의 타임지라니. 생각만해도 가슴이 부풀어 오르고 근사하지 않은가. 그때는 대학에 타임지 읽기 동아리도 있을 만큼 타임지를 읽으며 영어를 공부하는 것이 싱그러운 유행처럼 번지던 때였다. 하지만 난 한달에 한번씩 오는 빨간색 타임지들을 어딘가에 고이고이 쌓아 놓기만 했다. 하루하루가 신나고 바쁜, 다른 수많은 스무살 신입생들과 마찬가지로. 스무살은 참 길기도 했지만, 얇디 얇은 타임지 열두 권을 포개어 놓으면 끝나 버릴 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삶이 너무 힘들고 두렵고. 또 정신없이 흘러가다 보니, 세월 가는 줄 잊고 있었는데. 스무살 때 타임지를 읽고 싶어했던 내가, 여태까지도, 그때처럼 영자 신문을 읽어야겠다고 생각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금요일에 신학 스터디가 끝나고 카페 타임 때 스터디 티칭 리더이신 목사님께 목사님은 영자 신문을 읽으신다면 무엇을 보고 싶으신지 여쭤보았다. 뉴욕타임즈, 영국의 가디언지,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을 언급하셨다. 아래층이 교보문고인데 바로 내려가서 사서 봐야겠다.
얼마나 살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살아있는 동안은 지금뿐이다.
지금 이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