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1. 새치.
머리를 자르는데, 나를 고이 덮고 있는 보자기 위로 새치가 우두둑 떨어졌다. 정말 한 것도 없는데 늙어가고 있는 것이다. 평생 정말 아무것도 안 했는데.
2. 종합 제리.
동네의 고전적인 슈퍼마켓에 갔다. 거의 슈퍼 전체를 훑고 지나갈 기세로 하릴없이 이 코너 저 코너를 뱅뱅 돌고 있었다. 무언가 꼭 사고 싶은 것이 있는 것 같긴 한데 아무것도 사기 싫은 마음.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내 모습.
커피를 하루라도 안 마시면 큰일이 나는 수준의 커피 애호가인데, 집에 있던 커피 도구와 원두들은 독립하지 않은 독립 하우스에 모두 가져다 놓은 역설적인 현실 속에 나는 놓여 있었다. 알갱이 커피 코너를 뚫어질 듯이 바라보다가 이내 떠나버린다. 괜히 엄마랑 머물러 있던 마른 포 코너도 한번 지나가 보고.. 그렇게 돌고 돌아, 모퉁이를 돌다가 옛날 젤리가 눈에 들어왔다. 젤리 종합 선물세트. 제조사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생경한 한국 회사. 완벽하다. 엄마가 시골에 갈 때마다 꼭 천안 시내에 들러서 한 봉지 사들고 가시던. 그 옛날 종합 젤리. 이것을 사러 왔나 보다. 그렇게 돌아 돌아 ‘명성제과의 종합 제리’를 사러 왔나 보다. 원래 난 젤리나 사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 젤리를 좋아하시던 할아버지도, 젤리를 사 가시던 엄마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 나도 종합 제리의 맛을 이해하게 되었다. 집에서, 또 가방에 넣어두고 밖에서, 한 개씩 한 개씩 까서 먹으면서 어쩌면 이제 종합 제리 애호가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3. 주식.
몇 날 며칠, 주식창을 온종일 보곤 했다. 그 결과 제법 벌기도, 번 돈의 열 배 가까이 되는 돈이 뚝뚝 떨어지는 그래프를 아무 감각 없이 바라보기도 했다. 할아버지처럼 젤리를 오물거리고 커피를 홀짝이고 작고 작은 것들을 오물오물 홀짝홀짝거리는 동안 그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경이롭고 소중한 시간이 째깍째깍 흘러갔다. 주가 그래프가 곤두박질치듯이 무언가, 아직은 소중하다 말할 수 있는 가치들이나 어떤 영원한 것들이 일제히 굴러 떨어지는 것을 잠시 본 것 같았다.
4. 정말 진정한 것에 관해서.
그날들의 이야기를 또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어차피 그 친구가, 또는 그 친구의 친구가 볼 일은 없으니 괜찮겠지. 그리고 이제사 무엇이 어떻든. 공소시효가 지나도 한 다섯 번은 지났을 테니. 대충. 수년 전 어느 날이었다. 요즘 ‘여름이었다’는 문장이 유행인가 본데, 그날들은 정말 여름이었다. 인도였으니까. 사시사철 여름인 인도였으니까. 그날들은, 정말 더운 여름이었다.
인도에 도착해서 나름대로 정해진 일정에 따라 우리는 선교 활동을 열심히 했더랬다. 나는 셀프 팀장이었고, 지쳐가고 있었다. 인도는 정말 너무 더웠다. 덥기만 한 게 아니라, 찝찝하고 답답하고 막막했다. 재밌고 설레기도 했으나, 숨 막히는 공기가 모든 설렘들을 압도했다. 후덥지근한 공기와 지저분한 길거리와 고개를 저으며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우유부단한 표정의 가면만 쓰고 있는 사람들과 사역의 막막함, 일체의 그 끈적끈적하고 탁한 시간들.
깨끗이 씻고, 시원한 향기의 향수를 뿌리고 나와도 삼십 분만 지나면 팔의 땀구멍마다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들. 그 팔이 길거리나 버스의 사람들과, 팀원들과 서로에게 부딪혀 닿고, 인상은 자꾸 찌푸려지고, 마음도 잔뜩 찌푸려져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던 날들이 한 일주일쯤 지나고 있을 때였던가. 나는 이 선교가 2주일짜리였음을 새삼 떠올리며, 2주일이라는 사실에 감사하기도 했고, 더 짧게 잡을 걸 후회하기도, 막막해하기도 하며, 남은 시간들이 너무 길게 느껴져 공포스러운 기분에 사로잡힐 무렵, 그런 생각들을 환기도 시킬 겸, 나도 이렇게 힘든데 자매인 팀원은 당연히 더 힘들겠지 생각하며 팀원의 마음을 돌보아 주기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옆에 앉아있던 친구에게 무심코 툭 물어보았다. ‘아무개야, 너는 이런 데서 선교하면서 살 수 있다면, 한 얼마나 더 머물러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아, 우리는 그곳에서 오토릭샤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삼륜 구동 택시(말이 택시지 거의 세발 오토바이에 덮개만 씌워놓은 느낌의 스릴 넘치는 교통수단이다.)에 몸을 싣고 달리고 있었다. 뻥 뚫려있는 창 밖으로는 더운 바람이 우릴 삼킬 듯이 덮치고 있었고, 창밖의 길거리 풍경은 지저분한 흙먼지와 잿빛 시멘트 땅과 벽들,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한 손엔 벌거숭이 아이 손을 꼭 쥐고 걸어가는 무표정한 여자들, 그을린 진갈빛 피부를 햇빛에 그대로 노출시키고 웃통은 거의 안 입고, 빼짝 마른 들소에 올라타 있는 성난 표정의 남자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가는 오토릭샤의 창밖 풍경 뒤로 먼지와 함께 한 사람 한 사람 지나가고 있었다. 길거리에 날리는 잿빛 먼지 같은 희망이라도 있는지 없는지 도통 가늠할 수도 없는 사람들과 도무지 쥐어지지 않는 이 도시의 막연한 실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감싸고 있는 더위에 나는 두 손 두 발을 다 들게 되고 있었다. 단기선교였으니까 망정이지. 정말 이런 곳에서는 단 열흘도 더 못 살 것 같다는 생각 따위는 내게 이제 거의 확신에 가까워 가고 있었다.
‘아무게야 너무 덮지 않냐 여기? 다들 너무 고생하는 것 같다...’ 괜히 가자고 했나, 사실 정말 나는 하나님께 모종의 약속을 했으니까 온 거였지만, 다른 친구들은 거의 내가 설득하고 달래고 하드 캐리 하면서, 다소 무리를 해서 우여곡절 끝에 오게 되었었다. 다들 힘들게 왔는데, 현지에서도 지난하고 힘든 상황들이 계속되어서 미안한 마음도 있었고, 여러 모로 사실 겸언쩍은 사과도 좀 뒤섞이고, 얼마나 힘든지 속마음도 들어볼 수 있는, 달램과 위로를 동반한 복합적인 성격의 물음이었다. 팀장도 이렇게 힘드니, 다른 남자애들도 다 힘들어하고 있을 테니, 덩그러니 자매 혼자 따라온 네가 힘든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남은 시간들은 좀 쉬면서 시원한 데서 좋은 시간도 가지면서 보내보면 어떻겠느냐고, 회개를 맡아 고생하고 있는 자매애게 팀장으로서 여러 암시와 암투와 제안이 뒤섞인 물음이었다.
그 친구가 창밖을 바라본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 것 같다. ‘넌 며칠이나 더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그 친구는 나의 질문을 듣고도 잠깐 계속 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난 이상하게도 그 시간이 꽤 길게 느껴졌다. 그러더니. 금세, 계속 시선은 풍경이 지나가는 차창밖에 그대로 둔 채로, 배시시 웃으며 답한다. ‘평생?’
난 그때 아무 말도 못 하고, 잠시 자매의 프로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때, 난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후덥지근했던 공기가 일순간 시원해졌다. 창밖의 산들바람은 그 친구와 나를 향해 솔솔 불어오고. 영원한 시간의 태풍의 눈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았다. 내 생에서 그렇게 아름다웠던 장면을 나는 그리 많이 기억하지 못했다. 말 그대로, 눈물겨울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모든 것이 멈춰버렸고, 그 자매가 바라보는 것이나, 그 친구가 느끼는 갈증이나, 선교나, 하나님이나... 그런 것이 미칠 듯이 궁금해졌다. 나는 그 즉시 단번에 아직 그 실체를 알 수는 없는 어떤 목마름에 사로잡혔다. 그때. 나는 정말 진정한 무언가가 지나가는 것을 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