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의 희망

찰랑찰랑 찰랑찰랑

by jungsin


Merry Christmas.


어떻게 들릴지. 보편적인 언어는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열어두는 미학적 장점이 있지만, 숨겨진 이면의 의미를 잘 드러내지는 못한다. 오히려 숨기기까지 한다. ‘메리 크리스마스’처럼 환하게 밝혀주고, 동시에 어둡게 하는, 그토록 다양하고 풍성하게 읽힐 수 있는 문장이 또 있을까.


‘메리 크리스마스’의 뜻은 메리한 크리스마스가 되길 빈다는 뜻이지만, 말하는 사람에게도 듣는 사람에게도 ‘메리’라는 한 단어 안에 자신의 감정들이 온전히 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얼마나 다양하고 미묘한 감정의 스펙트럼이 메리 안에 꾸겨 넣어졌겠는가.


메리, 크리스마스. ㅁㅔㄹㅣㅋㅡㄹㅣㅅㅡㅁㅏㅅㅡ.... 성스러운 기쁨이 각각의 자음과 모음마다 알알이 빛난다. 동시에 울먹거린다. 동시에 소망에 벅차 인사한다. 동시에 무기력하다. 동시에 신난다. 동시에 절망적이다. 동시에 짜릿하다. 동시에 답답하다. 동시에, 동시에... 마음 구석구석의 감정을 모두 나열하자면 수십 개의 형용사로도 모자르다.


해마다 성탄 절기가 다가오면 나의 마음속에서 지배적으로 요동치는 감정은 다짜고짜 어쨌든 설렘이다. 현관문을 박차고 눈밭에 뛰어나가는 해피처럼 어렸을 때부터 막연하게 크리스마스를 좋아했다. 적어도 이 날은 온 세상이 나를 위해 준비한 날 같았다. 해피가 눈밭에서 뛰며 헥헥거릴 때 눈가에 눈물 반 눈곱 반 고여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온 세상이 밝아야만 하는 날 울먹이는 사람들의 명치엔 원래 소금 몇 스푼, 설탕 몇 스푼이 뒤섞여있다.


한 마디 성탄절 인사 안에도 저마다의 사연이 있기 마련이다.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밝고 찬란한 구원의 인사는, 얄궂게도 성탄 인사가 미처 다 덮지 못하는 구석진 그늘을, 인간의 종교 세계와 일반 세계의 숱한 모순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내 준다.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성탄 찬송과, 거리에서 흘러나오는 캐럴이 마음을 뒤숭숭하게 간지럽히기도 하고, 멀미처럼 술렁거리게 하기도 하는 동안, 늦은 오후 예배 설교를 들으며 느낀 점, 성탄절을 이틀 앞둔 시간적 분위기, 나의 모순적인 현실, 그리고 모순적인 우리 삶에 울려 퍼져야 하는 적절한 설교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들이 일렁였다. 나에게는 실존적인 물음이었지만, 자신을 향해서도, 세상을 향해서도 아무 힘이 없는 생각들이었다. 망망대해에 떠있는 돛단배처럼 조리 없이 흔들릴 뿐이었다.





저녁 예배엔 저녁 예배만의 음습함이 있다. 그건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 때문이다. 마치 수가성 여인이 늦은 시간에 우물에 물을 길으러 왔던 것처럼, 저녁 예배엔 늦은 오후 이후가 되어서야 1층 대예배당 한복판 자리를 편하게 느끼시는 분들(마땅히 언제나 편하게 느끼셔야 함에도 불구하고)이 많이 참석하신다. 갑자기 큰 소리로 아멘아멘아멘(실제로 그들의 아멘엔 띄어쓰기가 없다)을 외치시는 분. 헌금 찬양 시간에 시작해 폐회송에 이르기까지, 반경 20미터에 있는 회중이 모두 들을 수 있는 음량으로 마귀 대적 기도와 자신의 삶을 향한 화풀이 사이 어느 지점에 있는 방언 기도를 하시는 분. 그리고 약간의 우울감을 머금고 뒤늦게 들어오는, 그렇지만 역시 생기 있고 꾸밈에 나태함이 없는 청년. 그러한 성도들이 유독 눈에 많이 띈다.


그들에겐 낮 예배 회중과 같은 열정이 안 느껴진다. 성탄 주일 한 날의 예배에 364일의 실망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이다. 성탄의 빠삭빠삭한 햇볕마저도 그들의 영혼 깊숙이 비추지는 못한다. 바람 빠진 튜브처럼 처진 어깨가 숨죽이고 위축된 삶을 설명해준다. 그들의 영혼은 성탄절이라고 다르지 않다. 다른 날들과 마찬가지로 축축하고 눅눅하다.


이상한 것은 낮 예배 회중이, 더 간절할 것 같은 저녁 예배 회중보다 오히려 더 간절히 기도하고 뜨겁게 찬양한다는 것. 모순적이다. 낮 예배 회중의 간절함은 저녁 예배 회중에 비해 희석된 편이다. 묽고 싱겁다. 빵빵한 튜브처럼, 중국에서 넘어온 공갈 호떡처럼, 희망의 부피가 그것의 질량보다 훨씬 크다. 하나님이 아니어도 다른 많은 희망들로 마음의 뿌리까지 이미 촉촉하기에 물이 잘 빨려 들어가지 않는 것 같다. 364일 충만하기에 성탄의 1일이 특별히 더 간절할 것은 없다.


저녁 예배 회중의 삼투압 작용은 조금 다르다. 가만히 앉아있기만 해도 예배의 모든 기운을 뿌리에서부터 빨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것만 같다. 그만큼 그들에겐 성탄의 은총이 간절하다. 그렇지만 그들은 지쳐있다. 피로감이 섞이고 볼멘, 특유의 그 기도 소리처럼 그들의 영혼은 매가리가 없다.


설교자는 이러한 모순을 이해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십자가의 복음으로 집중하다가 또다시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인간으로, 신앙적인 윤리와 인간의 부담과 책임으로 수렴됐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 차라리 깨끗하고 단정하게 십자가에서 끝났으면, 지치고 연약해져 있는 성도들도 이해할 수 있는 고요한 여운이 남았을 것이다.





십자가는 스쳐가고, 신자의 책임과 개인 윤리로 흘러가면서 메시지가 흐물흐물해졌다. 하나님만이 소망이 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신앙 윤리따윈 해피나 줘버려라고 생각하며 축 쳐져 있는 저녁예배 회중들에게 지금 이게 적절한 방향의 메시지였을까. 이미 짐승처럼 기어가다시피 골고다 언덕에 한 발 한 발 힘겹게 올라가고 있는 사람들의 어깨에, 어렵고 무겁게 느껴지는 십자가를 지우는 것은 아니었을까.


낮 예배 회중의 공간의 온기는 사라지고,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 마침내 죄와 삶의 무게를 이고 대성전 장의자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청중들은 영양이 부족해 털이 듬성듬성 빠진 아기새들의 지저귐처럼 성실히 아멘을 했다. 물론 낮은 곳으로 가야 한다, 그래야 높이신다(높아지기 위해 낮은 곳으로 가는 것이 정말 낮은 곳으로 가는 건지 의문은 있었지만)는 등의 소주제들은 적어도 영광의 신학이 아니었다. 적어도 메시지의 방향 자체는 오순절 교회의 흔한 열정주의 트랙에서 이탈해있었고, 그런 점에서는 희망적이었다.


하지만 결국, 본질적으로 다른 뻔한 설교들처럼 제자리 걸음을 했다. 하나님의 열심은 점점 희미해지고, 인간의 열심이 점진적으로 불을 뿜었다. 거미줄 같고 좁은 미로 같은 모순적 현실과, 예배에서 봉사하시는 집사님들의 하얀 재킷과 한복, 밝은 웃음, 아무리 힘써도 안되는데, 인간의 책임을 자꾸 강조하는 해맑고 선명한 메시지들 사이에서 모래알처럼 굴러다니는 저녁 예배 성도들의 희망의 이물감. 목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아멘, 아멘. 성도들은 입가에 게 거품처럼 침이 고이도록 아멘을 하지만. 노력해야 하지만. 더 잘해야 하지만. 공부하려고 하다가도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하면 공부하기 싫어지는 것이 인간의 마음인데. 그저 다만 더 격렬히 노오력을 하라니. 왜 복음은 훈계와도, 응원과도 구분되지 못하는가.


그보다 하나님을 보여주면 안 될까. 축축한 사람들에게 바싹 마른 하나님 한번 누가 짠 하고 근사하게 한 번 보여주면 안 될까. 그게 말씀에 봉사하는 신학 종사자의 역할이 아닌가. 십자가가 선포되긴 하는데 십자가를 져야 하는 인간의 용기로, 독촉으로, 희생에 대한 부담으로, 윤리와 책임으로 은근슬쩍 넘어가는 메시지에 김이 빠진다. 어설픈 신학 공부와 겨우 강단의 구색을 맞추는 설교로, 상처로 다 헤진 내 마음의 천조각에 허술한 압정 하나 더 박으려는 것 같아서, 집을 나설 때 켜놓은 것 같은 가스불 생각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언젠가 어느 자리에서 순복음의 신앙(7대 신앙 5중 복음 3중 축복)을 주제로, 한 강사분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강의가 끝나고 내성적인 난 순복음교회에서 수년간 신앙생활을 했지만 스스로 잘 풀지 못하고 있는 의문에 관해 마이크를 들고 바들바들 떨면서 질문을 했다. 질문의 모체는 하나님의 선하심, 전능하심, 세상의 악(세월호 사건이나 그 밖의 일어서기 힘든 절망의 삶들)이 서로 모순되며 충돌하는 문제에 관해 순복음 신학은 어떤 답을 가지고 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강사는 강의 내내 탁월한 학식으로 설명했다. 우리 교단의 신학은 물 셀 틈 없이 온전하기라도 하다는 듯. 줄줄이 꿰며 위용있게 칠판을 채워갔다. 치유의 복음, 축복의 복음, 블러 블러... 그러나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신학의 가장자리에서 삶도 신학도 정리되지 못한 채(혹은 잘못 정리돼 있는 채) 신앙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모순된 현실은 은근슬쩍 넘어가고 있었다.


이렇게 박식한 분이라면 그래도 문제의 실마리 정도는 인지하고 있지 않을까. 질문을 잃어버린 훈련생들을 대신해서 물어보고 싶었다. 실제로 우리 교단의 교인들 중에는 타교단에 비해 가난하거나, 가족분들 중에 아픈 사람이 있거나, 배움이 짧은 분들이 상대적으로 더 많았기 때문에 그런 주제의 강의 후에 는 반드시 남을 수밖에 없는 물음이었다. 아무도 묻지 않는 것이 더 의아한 물음이었다.


물론 함께 으쌰 으쌰 하며 독려하는 신앙 훈련 프로그램에서, 강의나 훈련 내용 모두에 있어서 순종적인 선순환만이 허락된 그런 종류의 훈련 분위기에서, 환영받는 질문은 아닐 수 있었다. 반골기질과 다크함에 빠져있는 나라고 그 정도 센스도 없을 리 없었다. 갑분싸를 일으켜 머쓱했지만 분싸가 핵 두려워 안 묻고 넘어갈 순 없었으니 피차의 필연적 민망함이었다.


하지만 사실 다른 교단의 현실 신학도 그다지 순복음교회보다 나을 것은 없다.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보수적인 장로교 목사와 성도들의 지적인 거드름에 비하면 원색적으로 희망을 노래하고, 함께 어떻게든 끌고 가 보려는 순복음 신학에서 나는 훨씬 더 매력과 정감을 느꼈다. 병과 장애, 가난을 끌어안고 사는 분들에게, 또 더러는 많이 배우지 못한 분들에게는 순복음이 표방하고 있는 목회신학이 다른 교단의 고상하고 과over 지성적인 목회신학보다 훨씬 더 가까이 다가서 있는 측면이 있다. 현실적인 부침이 심하고 한국교회에서도 은연중에 소외되고 있는(소외될 수밖에 없는) 많은 성도들에게는 순복음교회의 신학과 설교가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희망이 되어왔다.


다만 지금의 순복음교회는 막상 깊이 들어가 보면 그렇지 않더라는, 서글픈 전령을 들고 어디로 누구에게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순복음 교회엔 이 즈음도, 아니 바로 오늘도 여전히 아픈 몸과 마음을 이끌고 교회에 오는 분들이 많다. 사회에서는 소외된, 그러한 분들이 실상 순복음 교회의 가르침대로 주일마다 몇 개씩의 예배를 드리며 가장 열심히 기도하지만, 정작 그분들이 순복음 신학(결과론적인, 인과율적인 신학)의 가장 찬란했던 시대의 빛이 만들어낸 가장 짙은 그늘에서 숨죽이고 있어야 하는 현실을 바로 곁에서 느끼며 서글픔과 애잔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잘 된 사람, 잘 되어가고 있는 사람이 순복음 신학을 뒷받침하고 견인해갈 수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에, 순복음 신학의 결과를 내지 못한, 아니 앞으로도 낼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그러한 분들은 여간해서는 교회에서 중직을 맡기도 어렵고(그런 분들은 중직이 되기 위해 헌금으로 마련해야 하는 목돈도 없으시겠지만.), 간증을 하거나 영향력 있는 자리에서 대표기도를 할 기회도 거의 없다. 그분들은 예배에서 공동으로 하는 통성기도 시간 외에는 거의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는다.


아무튼 이런 모순된 현실과 아픔을 이해하고 보듬지 못하는 ‘선명한’ 순복음 신학을 꼬집으면서 나름대로는 좀 샤프하게 물어보고 싶었다. 조목조목 짚으려고 애쓰며 질문했지만, 바들바들 떨었던 탓에 자세히 더 날카롭게 질문하지 못해서 아쉬웠다. 그보다 돌아온 답과 훈련생들의 푸석푸석한 듯한 분위기(물론 나 혼자 느낀 것일 수 있다)가 더 아쉬웠다. ‘질문하신 분이 더 잘 알 것 같다.’. 이렇다 할 답을 못 들었었다. 떨면 질문한 사람의 진중한 물음이 사실상 무시되고 말았다. 분위기만 서먹해졌었다.





교회에서 성탄 예배 때마다 하는 인사가 있다. ‘우리 모두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서로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한 해 중 그 순간처럼 분위기가 어색한 순간이 없다. 어렸을 때였으면 해맑고 깜찍하게 ‘메디 크리스마스’ 하며 옆에 계신 권사님 볼에 뽀뽀를 해드릴 수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어 죄인으로서의 현실을 마주하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당황하고, 길을 잃게 되어 마음이 복잡하고 심란한데, 갑자기 날짜가 12월 25일이 되었다고 해서 기쁨으로 충만할 리는 없지 않은가. 그건 종교적인 조울증이지 그리스도인의 심오한 성탄 기쁨은 아니지 않은가.


어른이 되어 마주하게 된 나의 안과 밖의 모순들. 정리되지 않은 삶들. 희망보다 오히려 절망과 두려움이 내 마음을 장악하고 있는 패색 짙고 의기소침해있는 신앙 현실. 나와 우리의 삶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해피, 해피 크리스마스란 없다. 뚜레쥬르 케이크나 여자 친구가 훨씬 더 위로가 된다.






늦은 오후 예배를 드리고 집에 오는데, 어두컴컴한 찻길 한쪽 어디선가 찰랑찰랑- 하는 방울소리가 들린다. 썰매 끄는 루돌프 목에 걸려있을 것 같은 방울소리가 여기서 왜 들리나. 두리번거려 찾아보니 길가에서 털모자를 쓴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깡충깡충 걷고 있는 소리다. 아이가 신은 작은 털 장화에서 나는 맑은 방울소리. 나도 어렸을 땐 걸음마다 삑삑 소리가 나는 신발을 신고 다녔던 때가 있다. 땅을 디딜 때마다 나는 그 소리가 재밌고 신났다. 어쩌면 어렴풋이 그 소리를 통해서 내가 사랑과 축복을 받고 있다고 느끼며, 그 소리를 통해 안심했던 것 같다.


그 귀엽고 연약한 아이는 엄마에게 자신의 생명과 같은 존재일 것이다. 이 넓고 거친 세상에서 혼자 걸어가기에는 너무 작은 아이를 맑은 방울소리가 지켜주고 있다. 아이는 찰랑찰랑하는 소리로 생명의 소중함, 삶의 소중함을 걷는 걸음마다 훌륭히 설교하고 있었다. 성탄절의 메시지가 저렇게 맑고 내 마음을 위로해주는 것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잠깐 헛된 상상을 해본다. 찰랑찰랑- 찰랑찰랑- 그 단순하고 작은 방울소리가 다시 살 힘을, 다시 사랑할 힘을 주는 것 같았다.





‘모순’이라는 키워드는 K 교수의 한 중앙일보 칼럼을 통해 얻었다. 지난 추석에 화제가 된 경향일보 칼럼에 이어, 이번 칼럼에서도 모순을 피할 수 없는 삶의 현실에 대해 무척 즐겁게, 그러면서도 진지하게 꾹꾹 눌러 짚었다. K교수는 우리는 이제 모순된 삶에 대해 이해해야 한다고, 그건 특히 어느 한쪽을 택해서 말해야 하는 운명을 가진 이론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삶의 경험을 통해 습득될 수 있다고, 모순된 삶의 주제들을 모순되지 않은(혹은 덜 모순된) 논리로 이끌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 생각을 교회로 가져오면, 웅변조의 선명한 메시지 이전에 모순된 우리의 삶을, 힘든 마음을 토로할 언어와 친구마저 잃어버린 처지의 청년과 외로운 노인과, 아픈 사람과 가난한 사람의 현실을 이해하는 것이 성탄의 문자적 메시지보다 중요한 것이라고 적용할 수 있겠다.


모순으로 가득한 우리의 현실에 대한 고민과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나서 우리의 모든 모순의 삶들을 부둥켜안을 수 있는 사랑의 논리를, 그럼에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아픔에 대해는 무신경하고 단지 능력만 갖고 갖고 계신, ADHD 증상을 앓고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먼저 우리 눈물에 구구절절 공감하고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라고 말해주었으면 줗겠다.



나만, 우리만 아파하고 고통받다가 마술처럼 구원받으면, 어딘지 억울하다. 아직은 미심쩍은 복음이다.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라면 우리의 우울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다. 내가 아픈 것처럼 좀 깨알같이, 충분히 아파하셨으면 좋겠다. 함께 아파하시지 않는데 인격적인 하나님일 수고 없고, 전지한 분일 수도, 전능한 분일 수도 없다. 그런 하나님은 장로님의 하나님일 순 있어도 나의 하나님은 아니다. 이런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크리스마스를 어떻게 메리하게 맞이할 수 있겠는가.



우리 인간의 관계도 이해와 공감이 90퍼센트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을 건너뛰고 복음의 세례를 주시려는가. 설교자나 되어서 어떻게 그런 메시지를 전하려는가. 속 터지는 우리의 심정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훈련과 헌신과 순종을 말씀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아픔에 대한 이해가 없는 채, 무미건조한 복음을 전하는 성직자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는가.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메시지가 전해지면 좋겠다. 그리고 나서 모순 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붙일 수 있는 능력의 성탄 메시지가 전해지면 좋겠다. 순수하고도 단순한 그리스도의 성탄 메시지를 전해주었으면 좋겠다. 우리를 다그치고 우리 안에서 신앙의 즙을 짜내려고 하지 말고, 성탄의 그리스도로 우리의 모순을 덮어줬으면 좋겠다. 그래야 공부하라면 더 공부하기 싫은 내 안의 악과 싸울 힘이 생길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올해도 눈밭 위의 해피 같았던 시절의 해피 크리스마스를 잠시라도 느끼기 위해서 명동의 떠밀리는 인파 속으로 뛰어들거나, 내 안에 깊이 숨겨진 신학적 허기짐을 네티비티 스토리 전체보기 유료 결제로 채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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